인간관계에 대해 청년시절과 가장 다르게 느끼는 점
청년 시절, 내게는 인간관계에 대한 자부심이 하나 있었다. 그건 사람을 맺고 끊는 걸 확실하게 잘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스스로 마음만 먹으면 칼같이 사람과의 끊어낼 수 있는 차가움을 가진 것이 일종의 장점이라 생각했다. 외로움을 덜 타고, 고독을 즐길 줄 알며, 나만의 고집으로 나의 길을 걸어가며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치워내고 걸러낼 수 있는 힘이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근래 그런 생각은 상당히 바뀌었다. 오히려 정반대가 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생각이 달라졌다. 청년 시절 자부심이었던 것은 반대로 콤플렉스 비슷한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 차가워질 수 있는 게 좋은 자존감과 강한 힘의 결과가 아니라, 일종의 자기방어나 회피에 가깝다고 느끼게 되었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진정성 있는 힘을 가진다는 것은, 여하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붙잡고 감내할 수 있다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요즘은 인간 관계에서의 손절이 매우 흔해졌다. 조금의 상처, 약간 마음에 들지 않는 점만 있어도 인간관계를 쉽게 단절한다. '쎄함은 과학'이라는 미명 하에, 이상한 말 한 마디, 이상한 기분 한 번에 관계란 티슈처럼 뜯어 버릴 수 있는 게 되었다. 그러나 관계란 본질적으로,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상처는 많아질 수밖에 없다. 대화를 열 마디 주고받은 사람한테보다, 대화를 천 마디 주고받은 사람한테 상처받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함께 백 번 거닌 사람보다, 만 번 거닌 사람에게 더 기분 나쁠 일이 많다.
그러나 천 마디 주고받고, 만 번을 함께 거닌 사람과는 그만큼 서로에 대한 이해도 깊어진다. 그 과정에서 충돌도 있겠지만, 서로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고 고쳐가고 타협하는 일도 생긴다. 그렇게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융화된 부분이 넓어진다. 달리 말해, 그 사람이 내 삶이 되고, 내가 그 사람의 삶이 된 영역이 점점 더 커진다. 사랑은, 우정은, 관계는 언제나 '그래서 사랑해'가 아니라, '그래도 사랑해'로 깊어진다.
청년 시절, 나는 그런 걸 잘 몰랐다. 원 스트라이크 아웃, 혹은 쓰리 스트라이크 아웃 같은 원칙이 더 멋지고 강한 일이라 생각했다. 선을 한 번 넘으면 넌 아웃이야, 다시는 보지 않겠어, 한 번 기분 나빳으니 너를 지우겠어, 그것이 더 손쉽고도 피상적으로 인상을 사는 일인 줄 잘 몰랐다. 야구에도 쓰리 스트라이크 아웃 다음에 다음 회가 오듯이, 관계에도 다음 회, 또 다음 회가 더 멋지게 찾아올 수 있다는 걸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인간은 타인을 붙잡으면서 더 깊은 삶으로 들어선다.
나랑 더 잘 맞는 사람을 매번 찾아 떠난다는 건 꽤나 어리석은 일로도 느껴진다. 물론, 세상 어딘가에서는 우연히 나랑 무척 잘 어울리는 근사한 사람을 별똥별 떨어지듯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여전히 나와 맞는 부분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과의 인연을 잘 이어가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 100명 만날 시간에, 기존의 인연 10명을 10번 만나면, 관계의, 삶의 다른 깊이를 점점 알게 되어갈 수 있다.
올해를 돌아보면, 새로운 만남들도 있었지만 상당수 값진 만남들은 기존에 알던 사람을 한결 더 깊게 만나는 일이었다. 올해 내가 인터뷰 한 사람 중에 처음 만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올해 내게 대화의 즐거움을 가장 많이 느끼게 해줬던 건, 역시 작년에, 재작년에, 그 전에도 알던 사람들이었다. 올해 내게 가장 값진 기억들을 남겨준 일들도, 역시 기존의 인연들을 한 걸음 한 걸음 더 이어온 일들이었다.
물론, 올해 알게 된 사람들과도 내년에, 또 내후년에는 그렇게 깊은 인연을 만들어갈 일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 확실한 건, 나는 관계를, 사람을, 삶을 과거와는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더 이상 맺고 끊는 게 확실한 데서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여하한 상처나 실망, 약간의 불협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손을 붙잡고 기어코야 함께 가고마는 데서 더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성숙이고 성장이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