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이면, 나는 어딘가에 기대어 앉아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세상이 잠시 고요해지길 기다리며, 먼지들이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감은 눈꺼풀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빛의 입자를 본다. 그러면 하루치 쌓인 내 안의 불안, 걱정, 불만 같은 것들이 물 위에 조각난 기름 방울들처럼 떠오른다. 그러면 이제, 또 하루치 글을 쓸 준비가 된 것이다.
나는 매일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불안을 모은다. 그저 하루가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하루를 살아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불안들이 쌓여 있다. 가족에 대한 걱정, 미래에 대한 고민, 인간관계에 대한 크고 작은 곤란들, 내 안의 불만족이나 삶에 대한 욕구불만 같은 것들이 소리소문 없이 내 안에 들어차 있는 걸 보게 된다. 그러면 고양이 털을 빗겨내듯, 하나씩 그것들을 벗겨낸다.
나의 노트는 그런 불안들의 무덤, 혹은 쓰레기통 같은 것이다. 거기엔 내가 뱉어내고 싶은 삶의 조각들이 잔뜩 쓰여 있다. 그렇게 차마 내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엉망진창인 조각들을 나의 일기장에 써내고 나면, 이제 조금 더 정갈해진 마음으로 나의 소재를 골라낼 수 있다. 나는 소재를 낚는 어부가 된다. 그렇게 조금 더 명료한 글 한 편을 쓰고, 타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에 남긴다.
매일의 글쓰기는 나에게 어떤 의식과도 같아서, 나는 그저 내 삶에 필요한 그 일을 매일 해나간다. 신비로운 건 그렇게 내가 해나가는 의식 행위가 내 안에서 머물며 끝나지 않고, 누군가에게 닿고, 누군가의 삶에 파문을 일으키며, 그와 내가 공명하는 일로도 나아간다는 점이다. 내가 필요하여 쓴 글이 다른 수많은 누군가가 자신에게도 필요한 글이었다면서, 나아가 많은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글일 것이라며 공유를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이상한 일처럼도 느껴진다. 이상하지만, 신비롭고, 좋은 일로 느낀다.
때로 글을 쓰는 순간은 이 세상의 다른 사건들과도 절묘하게 겹친다. 가령, 지금처럼,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어 자리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렸는데, 종일 구름이 머금고 있던 수증기를 견디지 못해 비로 쏟아 버리는 순간이 꼭 그와 일치한다. 이런 적은 한 두번이 아니고, 세상과의 절묘한 우연, 일치는 무척 흔하게 일어난다. 때론 글을 쓰기 시작하자 비가 그치거나, 아이가 잠들고, 해가 구름 사이로 뜬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내 안에 고도로 몰두하는데, 거기에서 다름 아닌 더 큰 무언가를 만난다.
우리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는 마치 나만이 열 수 있는 나만의 보물상자가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20년간 거의 매일 글을 써온 입장에서 하나 확신하는 건, 우리 안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건 나만의 보물상자가 아니라 지하수라는 점이다. 나는 땅굴을 파고 내려가 땅 밑에 숨겨둔 나만의 보물상자를 찾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 땅 밑에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우물과 이어진 지하수가 있다. 글쓰기를 할 때, 우리는 타인과, 세상과 이어지도록 만들어져 있다.
어째서일까? 아마도 언어의 기원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언어는 애초에 우리가 세상과 너무도 연결되고 싶은 꿈으로 탄생했다. 사물을 지시하고 그 사물과 연결되고 싶어 언어가 만들어졌다. 타인과 소통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에게 나를 이해시키고 싶어서 언어는 탄생했다. 그러니 언어가 가장 깊이 닿는 곳에는, 나를 넘어 타인이, 세상이 있는 것이다. 언어의 본질은 연결이고, 글쓰기의 본질도 마찬가지다.
그 광맥이, 광천수에 닿아 '연결'을 실현하고 나면, 내 안에 쌓인 하루치의 고독한 불안은 사라진다. 대신 거기엔 고요한 평화가 남는다. 내일 하루의 삶을 또 받아들일 수 있는 단단한, 화강암 같은 백지가 되어 있다. 그렇게 나는 또 하루를 마감하고, 내일을 살러 간다. 나는 이 흐름과 리듬 속에서, 끝없이 정갈해지고 끝없이 더럽혀진다. 그러나 매일 밤, 결국 이 고요에 도달할 수 있다. 어찌 보면, 그것이 내 삶을 살리고 지탱해온 절대적인 비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