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은 나의 이십대에 동경의 대상 같은 것이었다. 스무살을 시작하며, 나의 목표는 세상의 중요한 고전을 모두 읽고 말겠다는 불가능한 이상 같은 것을 향해 있었다. 그럴 때, 어디에서부터 그 목표를 밟아나가야 할지 몰랐던 나는 일단 '노벨문학상'을 기준으로 삼아 책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닿고 싶은 저 너머 세계의 어떤 통로가 되어줄 것만 같았다.
알베르 카뮈, 사르트르, 헤르만 헤세, 토마스만, 귄터 그라스, 마르케스 등 내게는 동경과도 같았던 이름들이었고, 나는 그 표지를 따라 한 시절을 항해했다. 나중에는 그런 동경도 사그라들고, 내 나름의 삶을 나아가게 되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세계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작가들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 나라의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은 내게 굉장히 묘하게 다가온다. 싸이가 빌보드 차트 1위를 했다거나, 오징어게임이 넷플릭스 1위를 했다거나,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받았다거나 하는 것과는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사실 내가 저 너머를 꿈꾸었던 그 시절의 동경 같은 것은, 어쩌면 이미 이 땅에도 있는 일이었다는 걸 묘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한강은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로, 한국의 역사와 그에 대한 상처에 몰두하는 방식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것은 저 너머에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기 이 땅에 있는 이야기였다.
사실, 나도 어느덧 그 청년 무렵이라는 걸 떠나보내고, 이제 마흔을 바라보게 되면서, 삶이라는 것이 '저 너머' 어디에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은 여러모로 깨달아왔다. 우리는 나의 삶이 주어진 여기 이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또 그 속에서 진정성 있게 나의 삶을 대할 때, 동경하던 저 멀리 닿을 필요 없이, 여기 이 곳에서 삶의 진실 자체를 만나게 된다. 최근 우리나라의 수많은 문화, 예술, 콘텐츠 등이 전 세계적인 호응을 얻는 걸 보면서 더욱 그런 걸 느끼게 된다. 어쩌면 이제 한국인은 드디어 한국인일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살짝 앞선 세대의 이야기들을 들으면, 그토록 미국이나 일본의 문화를 동경하는 게 청년문화였다고들 한다. 가령, 90년대는 그야말로 일본 문화에 대한 동경이 엄청난 때였다고들 하기도 하고, 그 이전에는 미국, 그보다 더 전에는 유럽을 동경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도 먼 땅을 동경하는 삶이 아닌, 여기 이 땅에서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그 삶에 본질이 있고, 그 삶에 진실이 있다는 걸 믿어도 좋은 때가 오지 않았나 싶다. 우리 삶은 가짜가 아니고, 모자란 것도 아니고, 저버려야할 것도 아니다.
요즘에도 흔히 한국에서의 삶을 저주하며 '헬조선은 탈출밖에 답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들도 심심찮게 이루어지지만, 우리는 이제 여기 이 땅의 삶과 문화를 사랑해도 좋고, 사랑해야만 하는 그런 때가 온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세상 모든 나라가 그렇듯 우리 나라도 문제도 많고, 탈도 많지만, 그래도 어쨌든 온 세상을 매료시키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진실을 전하는 것들이 이 땅에서 피어오르고 있으니, 그에 힘입어 조금 더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의 것들을 사랑해도 될 때가 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아무튼, 이번 기회로 또 우리 사회에 조금은 더 긍정과 자부심이 피어나길 바라본다. 나아가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문학을 사랑하는 문화도 꽃피면 좋겠다. 당장 책 읽기 좋은 가을이라고, 온갖 책 축제들이 넘쳐나고 있다. 책 읽는 게 제일 멋지고 섹시하고 우리 자신과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일이라는 편견이 널리 퍼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