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재우는데, 눈을 감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왜 그러니?"하고 물었더니, 아이는 울면서 대답했다. "이상한 생각이 자꾸 나."라고 하면서, 자기 머리를 때리려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생각이냐고 물었다. "죽으면 무덤에 가잖아, 그러면 지네들이 잡아먹잖아. 죽는 게 너무 무서워." 나는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죽는다고 꼭 무덤에 가지 않아도 돼. 하늘나라로 바람타고 날아갈 수도 있어."
그러나 아이는 계속 무서운지 말했다. "하늘나라로 가는 것도 무서워. 나 혼자 뼈다귀 되어 있을 거잖아." 나는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 모습 그대로 갈 수 있다고 했다. "일곱살인 나 그대로 갈 수 있는거야?"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아이에게 둘리와 공원에 가는 이야기를 해주며 진정시켰다. 아이는 그러다가 또 물었다. "이상한 생각이 자꾸 나. 무덤에 안 가면 불에 타 죽는 거잖아." 나는 말했다. "그냥 바람타고 손잡고 하늘에도 날아갈 수 있어."
그런 식으로 어르고 달랬다. 아이는 겨우 잠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조금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아이에게 거짓말을 한 것 같아서다. 아이는 엄마가 없는 밤, 나랑 둘이서 잠들 때면 종종 죽음 이야기를 했다. 왜 그런지 몰라도, 엄마가 없으면 더 죽음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그럴 때면, 늘 하늘나라에서 같이 만나서 살 거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이가 묻는 대부분의 질문에 아빠는 대답해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사실 아빠도 정답을 모른다. 나는 아마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이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저 스스로 받아들이고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슬픔이고 공포이지만, 삶에 익숙해져서 어느덧 받아들일 때가 온다. 그 때까지 찬찬히 나이를 먹어갈 수밖에 없다.
아이가 죽음 이야기를 하며 울 때면, 사실 나도 조금 슬퍼진다. 아이가 하는 말이 진실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진짜고, 그것에 대해 느끼는 공포도 진짜고, 작별에서 오는 슬픔도 진짜다. 이 모든 건 피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 이후애 내가 있을지 없을지, 있다면 어떤 존재일지 모르겠으나, 죽음이 이 생과의 이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삶 또한 끝없는 이별이기도 하다. 아이는 이 일곱 살 무렵의 슬픔을 거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가령, 엄마 아빠랑 매일 같이 있고 싶은 마음, 작별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잊어갈 것이다. 독립할 것이고, 멀리 떠날 것이고, 자기의 삶을 향해 더 걸어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이미 살아서 이별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삶 자체가 죽음의 연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은 죽음도, 미래도 없다. 있는 것은 여기 오늘의 밤, 무르익어가는 연말과 반짝이는 트리가 있다. 아이의 양손에는 엄마와 아빠의 손이 있고, 자신은 의기양양하게 아빠가 엄마에게 선물해준 목도리를 둘러매고 있다. 우리는 산타를 기다리며, 캐롤을 부른다. 이번 겨울에도 우리가 사랑하는 섬에 가서 눈밭을 거닐 것이다. 우리는 여기 있다. 아직 여기 살아 있고, 오늘 밤 삶을 사랑하고 있다. 그러면 된 것이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펑펑 내리면 좋겠다. 커다란 이글루를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