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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이 할 수 있는 일

by 정지우

살아갈수록 삶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가능한 한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아니어도, 누가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돈을 얼마를 줘도 그다지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된다. 그보다는 가능한 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나여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얼지 고민한다. 그리고 이것은 확실히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가능성이 높겠다, 싶으면 일단 하고 본다. 대체로 내게 그것은 글쓰기와 관련되어 있긴 하다.

이러한 대체불가능성을 더 중요하게 느끼기 시작한 건, 아이의 탄생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나는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이가 커나가고 서로의 기억이 되어가면서, 점점 더 나는 아이에게 대체불가능한 아빠가 되어간다고 느낀다. 이 느낌은 확실히 강력한 삶의 의미를 주고, 삶의 중심이 되어준다. 나의 대체불가능한 자리라는 느낌이 다른 무엇에서보다 강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나는 단단하게 삶에 자리잡는 듯 느껴진다.

이 느낌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 생길수록, 삶의 나머지도 가능한 한 더 '대체불가능한 인간'으로 살았으면 싶은 마음이 생기는 듯하다. 그냥 내가 아니어도 되는 일, 나 같은 없어도 그만 일, 나쯤은 쓰고 버려도 금방 대체될 수 있는 자리 같은 것에 집착하는 건 어딘지 아쉬운 데가 있다. 그보다는 집요하게 나만의 대체불가능성을 찾아가는 게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산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요즘에 나는 글쓰기도 더 그런 방향을 지향해보려고 애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본능적으로 그렇게 나의 대체불가능한 자리를 향했던 일들이 결국에는 삶에서도 단순히 의미를 넘어 더 '이익'이 되는 자리이기도 했다. 내가 썼던 책들만 돌이켜봐도, <분노사회>라든지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같은 건 정말 나의 주관성이 너무 강하게 반영된 책들이라, 그런 책들은 세상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책들이 나를 먹여 살렸다. 최근에는 저작권 분야에서 출판, ai 등을 파고 들다보니, 역시 그런 부분이 나를 먹여 살리기도 한다. 딱히 돈 되는 영역도 아니어서, 대부분의 변호사는 아예 관심이 없는 영역이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나만이 할 수 있다는 느낌을 오히려 주어서 좋다.

생각해보니, 이번에 낸 <글쓰기로 독립하는 법>에서도 이런 대체불가능한 '전문성'을 만드는 법에 대해 다루기도 했다. 아마 나도 모르게 내 삶 전체에 그런 지향들이 묻어 있기 때문에, 책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던 게 아닐까 싶다. 삶에서 어떤 방향성이 있다면, 막연히 더 부자가 되거나 행복해지는 것만이 내게는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나는 나이가 들수록, 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싶다는, 아주 근본적인 지향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딱히 남들의 인생에 휘둘릴 일도 별로 없다. 예를 들어, 개업해서 이혼 사건 1년에 100건씩 하며 큰 돈 버는 변호사 소식을 듣는다 한들, 딱히 내 삶이 흔들리진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양인문서로 10만 부씩 팔았다는 작가 이야기를 들어도, 어차피 내가 쓸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별반 영향 받는 건 없다. 나는 그저 나만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좁은 길로 계속해서 걸어나가는 것만이 내 삶에서 내가 할 일이라 믿게 된다. 죽기 전에, 나만이 쓸 수 있는 것을 조금 더 쓰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들을 조금 더 하고 죽으면 좋겠다. 그런 방향성의 그런 삶이라면, 역시 OK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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