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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재 Mar 17. 2021

미나리를 보고 아빠가 생각났다

낯선 땅에 뿌리내린 희망


영화 <미나리>를 알게 된 건 윤여정 배우 때문이다. 그동안 MZ세대에게 <윤식당>으로 친근해진 윤여정 배우가 75세의 나이에 각종 해외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휩쓸고 있다는 소식에 그저 감탄이 나왔다. 외국에서 많은 관심과 인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이 영화를 주목할 가치는 충분했다. 그래서 개봉 첫 주, 나는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당연히 윤여정 배우의 등장과 연기에 온 관심이 쏠려 있었다. <최악의 하루>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한예리 배우에게도 조금 관심이 갔다. 정작 러닝타임 내내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인물은 아빠 제이콥(스티브 연)이었다.


주변이 휑한 시골로 이사를 온 이유가 고작 '흙'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제이콥을 보며, 나는 우리 아빠를 떠올렸다. 제이콥의 생각, 말, 행동, 헐렁한 민소매 티셔츠까지. 모든 게 우리 아빠였다.




내가 5살 때, 우리 가족은 읍내로 이사를 나왔고 아빠는 자신이 땅 하나를 샀으며 그곳에 배 농사를 짓겠다고 말했다. 그 땅은 집에서 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는데 그야말로 황무지 그 자체였다. 여섯 식구는 주말마다 밭에 가서 허허벌판에 널린 돌을 주워 담았다. 대신 그 자리에 우리의 희망을 심었다.


그런데 어디 희망이 쉽게 자라나랴. 잘 심은 묘목이 자라나 과실을 맺을 무렵, 지금도 뉴스에서 '역대급 태풍'으로 거론되는 루사가 당시 우리 밭을 휩쓸고 갔다. 이듬해엔 매미가 찾아왔다. 그야말로 쑥대밭이 된 그곳에 우리의 희망은 없었다.


영화 속에서 물이 없어 걱정하고 불이 나서 고생하는 제이콥 일가족의 모습에서 나는 자꾸만 우리 가족이 보였다. 지금이야 '추억이 많은 곳'이라 회상하지만, 냉정하게 돌아봤을 때 당시의 나 그리고 우리 가족은 불행했고 우울했다. 언니들은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을 다녔고 엄마는 난치병을 앓아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아빠의 야망이 허세로 느껴졌고 그의 목소리는 짜증스럽게 들려왔다.


15년 후 과수원을 정리할 때까지도 나는 아빠가 왜 그렇게 농사에 매달렸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머리로는 아내와 네 딸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논리가 받아들여졌지만, 누가 봐도 잘 될 확률보다 망할 확률이 높은 일을 그렇게까지 몸과 마음을, 특히 엄마를 고생시켜가며 해야 했는지, 마음 한 구석에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영화를 보고 그제야 알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할 거라는 아내 모니카의 성화에 제이콥은 마음속 깊이 숨어 있던 한 마디를 내뱉는다.



애들도 한 번쯤 아빠가 뭔가 해내는 거 봐야 될 거 아니야.



그거였구나. 그 마음이었구나. 자기 몸 부서져라 힘들게 일했던 우리 아빠의 마음이 제이콥과 같지 않을까. 영화를 보며 처음으로 느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도전과 성취, 그 과정이 든든한 뿌리가 되어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정을 이룰 것이라는 신념. 제이콥과 아빠의 진짜 마음이었다. 그리고 영화는 네 식구가 거실 마루에서 다 함께 누워서 자고 있는 장면으로 그것의 힘을 보여준다.




생계로서의 농사는 정리했지만, 아빠는 지금도 작은 밭을 가꾼다. 두어 달 전부터는 창고 하나를 뚝딱 짓고 있다. 나는 설에 내려가서 기둥 세우는 작업을 도와줬는데 며칠 전에는 지붕을 씌우더니 문도 달았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건축 설계도를 보며 하나하나 직접 공사하고 또 그렇게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빠에게 우리 가족은 무한 칭찬을 쏟아낸다.


우리 아빠 우리 가족, 힘들고 우울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여전히 살아있다.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준 미나리는 다름 아닌 우리였다. 나는 다시 희망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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