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요? 그럼 금방 나오겠네요"
"넷째요? 그럼 금방 나오겠네요"
엄마는 결혼하면 자녀를 많이 낳고 싶었단다. 그녀의 꿈은 2남 2녀. 가장 외롭지 않고 다복한 자녀 구성이다. 남자 형제끼리, 여자 자매끼리 친해질 수도 있고 네 남매가 서로 함께 어우러지며 유년 시절을 원만하게 지낸다면 그것이 바로 최고의 자식 농사일 것이다.
엄마는 첫째도 딸, 둘째도 딸을 낳은 이후 고심에 빠졌다. 아들을 낳고 싶은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두 살 터울로 낳은 셋째까지 딸이었다. 오히려 남편과 시댁에서의 남아선호사상은 없었다. 아들을 바란 건 엄마뿐이었다. 기필코 아들을 낳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네 번째 임신에 성공한 엄마. 그러나 그 아이는 유산이 되었고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엄마의 슬픔이 길어졌다. 그 무렵 아빠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점쟁이 할머니에게 찾아가 읍소를 해 굿을 치르기에 이르렀다. 이후 다시 한 번 생명이 찾아왔다. 열 달을 뱃 속에서 고이 키워 출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1994년 6월 9일 늦은 밤, 엄마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아빠는 곧바로 엄마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진통에 힘겨워하는 엄마에게 간호사가 물었다.
“몇 째예요?”
“넷째요.”
“아유 그럼 금방 나오겠네요. 조금만 참으세요.”
그날 엄마는 밤을 꼬박 샜다. 금방 나올 거라는 간호사의 촉은 단단히 틀렸다. 밤새 진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지칠 대로 지쳐버린 그때, 엄마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1994년 6월 10일 오전 8시, 넷째가 태어났다. 간호사는 엄마에게 아기를 건네주며 딸이라고 알려줬다. 사력을 다한 엄마는 겨우 초점을 맞춰 아이를 바라봤다. 자궁에서 갓 나온 조그만 핏덩이. 약간의 머리카락과 얼굴, 온 몸이 뻘겋고 축축하다. 못생겼다. 게다가 또 딸이라니. 엄마는 좌절했다. 아기 얼굴도 남편 얼굴도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녀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다. 10살, 8살, 6살 딸들을 학교와 유치원을 보내고 남편 따라 돼지 키우는 일을 도왔다. 에어컨은 꿈도 못 꾸는 시골 집에서 선풍기마저 힘겹게 돌아가는 집. 축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삼시세끼 아궁이 떼워 밥 짓느라 더위를 식힐 여유가 없었다. 요즘이야 출산 후 산후조리원 코스가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집에서 산파의 도움을 받아 낳지 않고 병원에서 낳은 것만으로 감사하게 여길 일이었다.
유난히 더웠던 그해 여름, 먹고 자고 싸기밖에 못하는 갓난아기를 키우느라 엄마는 이골이 났다. 결국 더위를 참지 못한 엄마는 마당에서 등목을 했다. 훌러덩 옷을 벗어 던지고 수도꼭지를 틀어 지하수를 한 바가지 끼얹었다. 아 시원해. 갓 출산한 산모에게 찬물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여름 내내 제대로 된 산후조리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더위와 싸우며 엄마의 냉수마찰은 계속되었다.
세월이 흘러 50대가 된 엄마는 한여름에도 추위를 탔다.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 바람만 쐬도 등이 시렵다며 담요를 둘렀다. 자기 전에는 양쪽 날갯죽지 사이에 핫팩을 붙이고 잠들었다. 엄마는 나를 낳고 나서 찬물로 등목을 해서 그렇다고 했다. "산후조리원이 어딨어, 그때 찬물을 막 찌끄르지 말았어야 했는데. 여름이 얼매나 덥던지, 아주 그거라도 안 했으면 진작 죽었어" 찬물로 등목을 한 게 그렇게나 등이 시릴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을까. 고생한 엄마가 안쓰럽고 내가 태어난 게 미안하면서도 엄마의 말을 온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웠다.
2018년 여름은 역대급 폭염으로 기록된 해다. 무려 38일 동안 전국에 폭염경보가 내려졌고 서울 지역 한낮 최고 기온은 39.6도에 이르렀다. 밖에 나가는 순간 자외선이 온 몸을 공격하는 기분이 들었다. 5분만 걸어도 등골에 땀이 줄줄 흐르며 공들인 화장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뉴스에서도 때아닌 기록적인 폭염에 서로 앞다퉈 특보를 보도하는 데 혈안이 올랐다. 너도나도 전문가랍시고 데스크 한 자리를 차지해 폭염의 원인에 대해, 과거의 폭염은 어땠는지 분석했다.
그때 내 눈을 사로잡은 통계가 있었다. 2018년 폭염 이전에 역대 가장 뜨거웠던 여름은 1994년이라는 것이다. 무려 40도가 넘는 날씨였다. 아, 어쩌면 엄마의 냉수마찰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선풍기도 없는 작은 주택에서 40도의 더위를 무슨 수로 이겨낼 수 있었을까. 축사에서 온갖 돼지 분비물과 싸우고 옷에 한껏 냄새를 배어 돌아오는데 달리 무슨 방법이 있었을까.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내가 뉴스를 봤는데 1994년 여름이 진짜 더웠대. 역대 가장 더운 해였다는데? 엄마 나 낳고 엄청 고생했겄네. 미안해 엄마. 그리고 고마워.”
못생긴 여자 아이로 태어나 미워 죽겠는데 한여름에 애 키우랴 일하랴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나는 그 뉴스를 보고 그제서야 엄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찬물로 등목해서 등이 시렵다는 엄마의 말에는 설마 진짜 그럴까 의심의 여지를 남겨두었지만 뉴스 보도 한 줄에 모든 의심이 사그라들었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이해는 늘 한 박자 느리다.
1994년 어느 늦은 밤, 그때부터 나는 엄마를 고생시켰다. 그리고 내가 아들 노릇을 한다. 사실 엄마가 바라는 아들 노릇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아들과 딸의 역할 구분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남아선호사상을 경멸하지만 엄마에게는 아들 노릇을 하고 싶다. 엄마가 돌아가시면 상주도 내가 하고, 생활비도 넉넉하게 드리고, 늙어서 부양이 필요하면 그 책임도 마다하지 않고 싶다.
엄마의 고생을 뒤늦게 알아 챈 못생긴 넷째 딸은 뒤늦게 노래로 마음을 전한다.
오늘밤 그대에게
말로 할 수가 없어서
이런 마음을 종이 위에
글로 쓴 걸 용서해
(중략)
하지만 그대여
다른 건 다 잊어도
이것만은 기억했으면 좋겠어
내가 그대를 얼만큼
사랑하고 있는지를
사랑하는지를
- 장혜진, <1994년 어느 늦은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