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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재 Aug 26. 2020

태풍, 내가 가장 싫어하는 두 글자.

태풍이 불던 날, 엄마도 울고 나도 울었다.

#4 태풍이 오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아프지 않았을까.


실시간 검색어에 태풍이 오른다. KBS 9시 뉴스에서는 태풍이 한반도에 근접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린다. 어쩐지 마음 한 켠이 아리다.


태풍.

어쩌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두 글자.


내가 다섯 살이던 해인 1998년, 우리 가족은 깜깜한 시골 구석에서 읍내로 이사를 갔다. 아내와 네 딸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아빠는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6천 평의 땅을 샀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황무지였다. 엄마, 아빠, 세 언니들과 나는 황무지에 남겨진 거친 돌을 일일이 주워 담고, 땅을 갈아엎고, 배나무를 심었다. 우리 가족의 새로운 버팀목이 될, 과수원이었다.


어린 배나무를 한 해, 두 해 키워가며 당도가 좋은 나무로 가꿔나갔다. 어느 농사가 안 그렇겠냐만은, 과일농사는 특히나 손이 많이 갔다. 배는 열매를 일일이 골라내고, 약을 바르고, 봉지를 씌워야 한다. 6천 평의 과수원을 열두 번도 더 헤집고 다녀야 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여름에도 '불청객' 까치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온 밭을 쏘다녔고, 그렇게 우리는 가을 수확철을 기다렸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태풍이 우리 가족의 희망을 짓밟을 줄은.


2002년 8월, 태풍 '루사'가 지나갔다. 과수원은 쑥대밭이 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망연자실했다. 지자체에서 태풍 피해조사를 나왔지만, "과일이 전부 다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보상을 받기는 어려웠다.


이듬해 2003년 9월, 이번에는 태풍 '매미'가 찾아왔다. TV에서는 실시간 태풍 상황에 대한 뉴스특보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나는 창문 너머로 거세게 몰아치는 비바람을 바라봤다. 안방에 있던 엄마 아빠는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뒤, 과수원은 또다시 쑥대밭이 됐다. 땅에는 떨어진 배들이 가득했고, 수많은 가지가 꺾였고, 까치를 막으려고 세웠던 거대한 그물망 축대마저 기울었다. 이번에도 지자체에서 조사를 나왔지만, 얼마를 보상해준들 태풍이 오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농사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인 줄 알았다. 원래 '망하는' 건 줄 알았다. 고작 10살이었던 내가 그 심각성을 온전히 느끼기는 어려웠다. 인간이 아무리 돈을 벌어보겠다고 노력해도 자연의 천재지변 한 번에 무너지는 줄만 알았다. 그냥 우리 가족은 그렇게 가난한 팔자인 줄만 알았다.


태풍이 오지 않았다면,

엄마는 아프지 않았을까.


그 후로도 얄궂은 태풍은 여러 번 찾아왔고 해를 거듭할수록 엄마는 농사를 싫어했다. 하지만 눈치 없이 먹성 좋은 네 딸들을 키우려면 과수원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엄마에게 도움을 청했고, 엄마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싫다'는 말을 애써 삼키며 아빠를 따라나섰다.


경제력이라곤 1도 없고 살림만 할 줄 아는 엄마에게 노동의 선택권은 없었다. 주체적이지 못했던 엄마의 노동은 그녀의 자존감을 더욱 갉아먹기만 했다. 몇 년 후 엄마는 원인 모를 아픔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왼쪽 청력을 잃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엄마의 운명을 나는 괜히 태풍에 탓하곤 한다. 그해 여름, 태풍이 오지 않았더라면.


올해도 어김없이 태풍이 온다. 나는 엄마 아빠에게 "태풍 온대, 조심해"라며 안부를 전했다. 십수 년 전 이야기는 차마 꺼내지 못하고 가슴에 묻는다. 농사를 짓지 않는 지금도 태풍 소식을 들으면 걱정부터 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은 처연하기만 하다.


부디, 아무에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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