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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재 Oct 18. 2022

엄마와 단둘이 떠난 인생 첫 해외여행

2016년 상하이 트위스트

나의 첫 해외여행은 23살 때였다. 교환학생 준비를 앞두고 다음 학기 휴학을 결정한 나는 방학을 이용해서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한 것조차 유학이나 다름없던 시골 소녀에게 외국은 영화에서나 보던 곳이었다.


근로장학생 아르바이트와 대외활동으로 번 돈을 차곡차곡 모아 여행 경비를 마련한 나는 부모님께 제안했다. 나의 첫 해외여행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부모님은 기뻐했다. 우리는 중국 상하이로 여행지를 정하고 여행 준비에 들어섰다. 첫 해외여행에 부모님을 모시고 자유여행을 하기 겁이 났던 나는 무난하게 패키지 여행을 알아봤다. 다행히 여행사에 근무 중인 지인이 있어서 비교적 순조롭게 패키지 예약을 할 수 있었다.


2016년 1월 출국 전날, 서울 자취방으로 올라온 부모님과 나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언니들은 부모님을 모시고 해외여행을 추진한 나를 기특해하면서도 부러워했고 나는 부모님과 둘도 없는 추억을 쌓을 생각에 설렘을 감출 수 없었다.


아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항상 업무 전화가 끊이지 않는 편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통화가 생각보다 길어졌고 아빠의 목소리가 점점 무거워져갔다. 마침내 휴대폰을 내려놓은 아빠가 말했다. “아빠 내일 못 간다.”

여행 전날부터 제대로 꼬였다. 2016년 1월은 전국적으로 구제역이 심하게 퍼진 때였다. 아빠가 다니는 회사는 돼지를 키워 출하하는 양돈회사로 역시 구제역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여행 전날 회사 내부에서 구제역이 발견되었고 방역지침에 따라 모든 직원은 해외여행은 물론 국내 지역 간 이동 또한 금지되었다. 아빠가 이를 무시하고 출국하는 경우 회사에서의 징계는 물론 법적 제재를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머리로는 다 이해가 됐다. 어릴 적부터 저녁 9시만 되면 아빠와 함께 9시 뉴스를 시청하며 구제역 소식을 접해왔던 나였다. 지금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도 속상했다. 억울했다. 왜 하필 지금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더 화가 났던 건 아빠의 태도였다. 일 중독인 아빠는 갑작스러운 여행 취소가 그리 아쉬워보이지 않았다. 내 속이 타들어가는 건 모른 채 그저 회사 걱정이 전부였다. 결국 나의 첫 해외여행에 아빠는 함께하지 못했다. 나의 당찬 꿈은 무너졌다.


다음 날, 공교롭게도 슬픔은 상하이 공항에 도착한 순간 사라졌다. 아빠의 부재에 아쉬운 마음은 여전했지만 어쨌든 이것은 나의 인생 첫 해외여행이자 엄마와 단둘이 떠나는 해외여행이었기에 설레는 건 마찬가지였다. 엄마를 잘 데리고 다녀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기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한 손에는 생애 첫 여권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입국장 문이 열리고 우리는 3박 4일 패키지 여행을 함께할 가이드와 다른 여행객들을 만나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했다.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앞에서, 엄마와 나.


패키지 여행은 숨 고를 틈 없이 진행됐다. 8명쯤 되는 우리 일행은 운전기사와 가이드가 데려다주는 대로 구경하고 먹으라는 대로 먹었다. 비싼 패키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쇼핑 코스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가이드와 물밑 거래가 되어 있는 장소에 도착하면 무조건 구경을 하고 와야 했다.


그중 한 곳이 당시 한국에서 수요가 증가하고 있던 라텍스 침대 공장이었다. 수많은 라텍스 침대가 진열되어 있어서 직접 체험해보고 즉시 거래와 해외 배송이 가능한 곳이었다. 라텍스라면 이미 동네 전문가로 손꼽혔던 엄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 앉아봐도 되나 눈치 보며 뚝딱거리는 나와 다르게 엄마는 이미 대 자로도 눕고 옆으로도 눕고 난리가 났다. 아이처럼 신난 엄마의 모습이 보기 좋았지만 이러다 엄마가 큰돈을 쓰려고 하진 않을까 그땐 엄마를 어떻게 말려야 하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심지어 엄마는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아는 젊은 직원과 말을 텄고 라텍스 느낌이 어쩌고 저쩌고 아주 적극적으로 대화를 주도했다.


쇼핑 시간이 끝나갈 때쯤 한껏 만족스러운 표정을 드러낸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공장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운전기사가 기다리고 있는 미니 밴을 향해 걸으며 내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엄마가 이런 데서 돈 쓸 것 같제? 절대 안 쓴 게 걱정 말어. 이런 데서는 돈 함부로 쓰면 안 돼야.” 그럴 거면서 왜 그렇게 살 것처럼 행동했냐는 엄마는 말했다. “아이, 누워보란 게 누워보제.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르케 내 맘대로 누워본대? 얼만지 궁금하니까 총각이 한국말 잘하길래 물어본 거시고. 아따, 우리 딸이랑 누워 있응께 좋았구만!” 우문현답이었다.


연신 좋다 좋다를 내뱉은 엄마였지만 체력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2일 차 오후가 되자 엄마는 이동하는 차 안에서 무조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고 다른 일행분들이 배려해주신 덕분에 맨 뒷줄에 누워서 갈 정도였다. 나는 엄마에게 무릎을 내어주기도 하고 엄마의 다리를 주물러주기도 했다. 중국의 기름진 음식들도 엄마의 컨디션에 영향을 줬다. 원래도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하는 엄마인데 중국 요리 특성상 기름이 많이 들어가서 엄마를 더욱 허기지고 예민하게 만들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서 바나나와 오렌지로 대충 속을 채우곤 했다. 중국의 옛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길거리나 시장 골목을 걸을 때면 취두부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러 엄마를 곤혹스럽게 했다. 엄마와 함께 떠나는 여행은 생각보다 많은 변수를 고려하고 대응해야 했다. 동시에 엄마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엄마가 어떨 때 컨디션이 좋아지고 나빠지는지 엄마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여행이었다.


우리는 3박 4일 동안 많은 곳을 다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를 둘러보며 독립의 역사를 기리고, 황포강에서 유람선을 타며 으리으리한 상하이 야경을 바라보고, 등장하는 배우만 200명이 넘는 송성가무쇼 공연을 관람하며 대륙의 스케일을 제대로 느꼈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엄마와 내가 아시아 최대 높이의 송신탑 동방명주에서 260m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유리 바닥 위를 걸었다. 둘이서 손을 붙잡고 하나 둘 셋을 외치며 유리 바닥 위로 발을 내디딘 그 순간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히 자리하고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샹하이 샹하이 샹하이
트위스트 추면서
온 동네를 주름 잡았던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
잊지 못할 추억의 트위스트


엄마와 함께 보낸 3박 4일의 시간은 설운도의 노래 제목 그대로, 사랑의 트위스트였다. 내가 대한민국 땅이 아닌 곳에 엄마와 함께 서 있다는 게 마냥 신기하고 행복했던 여행. 스물 셋, 내 힘으로 돈을 모아 가장 잘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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