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아무것도 아이라"
노희경 작가님을 좋아한다. ‘사람이 전부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매일 8시간씩 꼬박꼬박 글을 쓰는 노 작가를 존경한다. 오래 기다려 온 신작 <우리들의 블루스>도 매 회 사람과 인생을 공부하게 만들었다. 이야기의 전개는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 내 주제에 감히 명작가의 시나리오를 쉬이 예견하려 했다는 반성이 뒤따르게 했다.
극 중 영옥은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는 쌍둥이 언니 영희의 존재를 숨긴 채 제주도에서 해녀 일을 하고 있었다. 물질하는 중에도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휴대폰에 동료 해녀들은 영옥의 사생활을 의심한다. 욕심부려 전복을 따다 위험한 상황도 여러 번 겪게 되자 급기야 혜자 삼춘은 영옥을 그만두게 하라고 대장 춘희 삼춘을 종용한다. 해고 위기에 처한 영옥은 춘희 삼춘에게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속사정을 이야기한다.
며칠 후 물질을 나가는 날, 혜자 삼춘이 영옥만 따로 픽업했다. 출발하기 전, 차 안에서 혜자 삼춘은 영옥에게 말한다. “그거 아무것도 아이라. 우리 조카손녀도 자폐아라. 이 동네에도 그런 집 한 집 걸러 한 집씩 있어. 그러니 신경쓰지 말라게. 아무것도 아이라.”
엄마가 아파서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변에 거의 말한 적이 없다. 말할 필요도 말할 타이밍도 없었다. 22살 때였을까, 대학 친구들과 신촌 거리에서 밤늦게 술을 마시다 술기운에 울면서 털어놓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아마 그것이 처음으로 친구들에게 밝힌 기억일 것이다.
늘 엄마의 오른편에 선다. 왼쪽에 서면 엄마가 내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하기 때문에 늘 엄마의 오른편에 선다. 무심코 길을 걷다가도 내가 왼쪽에 있을 때면 곧장 오른쪽으로 자리를 바꾼다. 그러다 우연히 엄마가 차도 쪽에서 걷게 되는 것을 본 누군가가 ‘저 딸은 엄마를 차도 쪽으로 밀어내고 본인은 안쪽으로 걷다니, 효심이 없네’라고 생각할까 봐 눈치를 봤다. 엄마를 배려하는 나의 그런 행동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과보호처럼 보이진 않을까. 사연을 궁금해하진 않을까. 나도 엄마의 아픔 앞에 당당하지 못했다. 그러니 자꾸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다.
혜자 삼춘의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기 집안도 그렇다고. 다들 말은 안 해서 그렇지 그런 집이 많다고. 영옥의 얼굴은 보지 않고 무심히 던진 혜자 삼춘의 위로가 마음을 울렸다. 누군가 더 일찍,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었더라면 그간 내가 엄마에게 했던 행동들이 조금 더 당당해질 수 있었을까.
3년 차 직장생활을 하던 중에 찾아온 번아웃을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나는 한 달간 휴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곧바로 영광으로 내려갔다. 스무 살에 고향을 떠나 서울살이를 한 지 8년 만에 엄마 아빠와 장기간 지내게 되었다. 간절히 바라던 시간이어서일까, 쉼을 갖는 것에 기간을 정해두니 더 잘 쉬어야 한다는 또 다른 강박이 생겼다.
2주가 지나자 나는 하루 종일 무기력하고 우울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방에서 혼자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잠들 수 없었다. 어떻게 얻은 소중한 한 달의 휴가인데. 나만큼 우울한 휴가를 보내는 사람이 또 있을까. 몰려오는 비참함을 억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 시간이 흐르기만을, 괜찮아지기만을 기다렸다.
휴가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나는 심리상담소를 찾았다. 예전부터 한 번 가볼까 생각했던 곳인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무너진 마음 상태로 갈 줄은 몰랐다. 이후 나는 그곳에 갈 때마다 나의 치부를 모두 드러냈다. 눈물샘도 함께 열었다.
선생님이 사람을 그려보라고 했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를 그렸고, 선생님이 이 그림이 누구를 떠올리며 그렸는지 묻길래 내 모습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검사가 끝나고 다른 이야기로 상담을 주고받다가 선생님이 말했다. "그래서, 은희 씨가 느끼는 책임감이 너무 커. 초등학생인데 어깨가 너무 무거워 보였어요." 내가 그린 여자 아이의 어깨는 조금 과장하면 김종국 같았다. 입고 있는 옷이며 헤어 스타일은 다 어린아이 같은데, 태평양 같은 어깨가 누가 봐도 초등학생 아이와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불쌍했다. 나 자신이.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내가 내 모습을 그렸는데, 짊어지지 않아도 될 책임감을 가득 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나는 여태 그 책임감이 오늘의 나를 대단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사람은 꼭 대단할 필요가 없으니까. 열세 살의 나는 연약해도 괜찮고, 보호받아 마땅한 존재니까. 도와달라고, 나 좀 바라봐달라고 말해도 되는 나이니까.
일찍부터 엄마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미처 나를 돌보지 못했다. 가족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나까지 걱정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뭐든지 잘하는 아이가 되어야만 했다. 10살 때부터 밥을 짓기 시작했고 중고등학교 내내 주말이면 혼자서 밥 먹고 공부하고 컴퓨터 하면서 노는 게 일상이었다. 혼자 있는 게 익숙했고, 혼자 하는 게 당연했다.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누가 바라봐주지 않아도, 묵묵히 내 하루를 내가 지켜내는 삶. 나는 그것을 독립이라 착각했고, 내 안에 움튼 외로움을 알아채지 못했다. 감정 표현은 갈수록 어려워졌고 눈치만 늘어갔다.
"크고 빵빵한 풍선은 편안하지가 않아요. 언제 터질까 긴장되고 두렵죠. 반면에 바람이 적당한 풍선은 훨씬 여유가 있어요. 은희 씨 내면에 있는 풍선의 크기를 조금씩 줄여봐도 좋을 것 같아요.” 상담 선생님이 나에게 해준 말이었다.
상담과 함께 정신과에도 주기적으로 방문해 진료를 받았다. 의사 선생님이 내린 진단명은 불안장애와 우울증. 휴직 기간에 갈비뼈와 왼쪽 등이 아프고 심장 박동이 빨라져서 몸에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엑스레이를 찍었었는데, 몸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는 걸 비로소 알았다.
매일 밤 자기 전에 약도 먹고 일주일에 한 번 상담도 받고 있으니 나의 고통은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에서도 여러 번 공황 증세를 느낀 나는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이어가지 못했고 퇴사를 결정했다. 며칠 전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회식을 하고 열정적으로 일하던 내가 돌연 퇴사를 선언하니 이사님도 적잖이 놀란 반응이었다. 이사님께 이야기를 들은 대표님은 나와 따로 미팅하자고 불렀다. 회의실에 들어가 앉은 나에게 대표님은 말했다. “너랑 비슷한 사람 내 주변에도 정말 많아. 다들 티를 안 내고 다녀서 그렇지. 그러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몇 달 동안 가족과 친구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정신과에 다니고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나는 내가 이런 일도 겪는구나, 나와 비슷한 사람이 내 주변에는 없구나 생각하며 외로웠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대표님의 그 한 마디가 마음속에 작은 구멍을 내어 볕을 들여주는 기분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내 주변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 그러한 믿음이 외로움을 덜어주었다.
엄마의 귀가 들리지 않는 것도 내가 마음이 아픈 것도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우리와 비슷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각자의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 불행하고 우울한 감정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우리들의 블루스(blues)는 평생 우리를 쫓아다닐 것이다. 마음의 면역력이 낮아질 때마다 고개를 들어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삶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블루스를 우울(blue)로 생각할 수도 있고 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살면서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 우울할 것인가, 춤을 출 것인가. 나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엄마와 손을 맞잡고 음악이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이고 싶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하는 날 동안 행복한 순간들을 수집하고 싶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사명 하나. 우리는 이 땅에 괴롭기 위해 불행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직 행복하게 위해 태어났다는 것. 모두 행복하세요!
-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