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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재 Oct 11. 2022

아버지 이름을 얼마만에 불러보는지

환갑 엄마의 개명 이야기

© jmason, 출처 Unsplash


새 이름을 짓게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개명 절차가 시작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법원에 개명 신청을 하는 것이다. 법무소를 통해서 대리 신청을 할 수도 있고 직접 법원에 방문해 신청할 수도 있고 대법원전자민원 홈페이지를 통해 온라인으로도 가능하다. 법무소는 비용이 비싸고 엄마를 데리고 법원에 가려면 광주까지 가야 해서 나는 온라인으로 신청하기로 했다. 나 같은 젊은이라면 필요 서류만 미리 준비한다면 온라인 개명 신청이 어렵지는 않다.


원활히 흘러가는 듯한 시점에서 발목을 잡은 것이 있었다. 바로 개명 사유였다. 특정 양식 없이 개명 사유를 적어 제출해야 했는데 여기저기 검색을 해보니 크게 어려운 점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가볍게 여기고 대충 적어서 냈다가 법원에서 불허할 수도 있으니 조금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다. 컴맹인 엄마 대신 내가 신청하는 것이라서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노트북을 두들기는 사이에 엄마는 낮잠에 들었다. 나는 취업 자기소개서를 쓸 때보다 더 높은 집중력으로 한 편의 소설을 써 내려갔다. 엄마가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아왔는지, 자신의 이름을 왜 싫어했는지, 새로운 이름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판사님이 눈앞에 있다고 상상하며 구구절절 읊조렸다. 1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정도 분량이 완성됐고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개명 신청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개명 신청을 했다고 해서 결과가 빨리 나오지는 않는다. 빠르면 한 달, 길게는 3개월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엄마의 경우 2개월 정도 되었을 무렵 결과가 나왔다. “설성순의 이름을 효림으로 개명하는 것을 허가한다”라는 판사님의 주문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일일연속극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9시를 넘겨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판사님의 개명 허가 주문을 읽어줬다. 휴대폰 너머로 느껴지는 아빠의 환호와 엄마의 미소.


사실 여기에서 내 몫이 끝나면 좋으련만. 엄마는 하루빨리 영광으로 내려오라고 했다. 그다음 절차가 진짜 본 게임이기 때문이다. 법원의 개명 허가 이후 한 달 이내로 주민센터에서 개명 신고를 해야 한다. 이후 주민등록증 재발급을 신청해야 하며 새로운 주민등록증이 나올 때까지 약 3주간 임시 신분증으로 은행, 보험, 휴대폰, 공인인증서 등 본인이 가진 모든 명의를 변경해야 한다.


읍사무소로 개명 신고를 하러 간 날이었다. 주민등록초본 등 각종 서류를 챙겨 읍사무소에 방문했다. 그중에는 난생처음 보는 서류도 있었다. 제적등본이라는 것이었다. 외조부모님이 모두 일찍 돌아가셔서 이 경우 제적등본 서류가 추가적으로 필요했다. 모든 서류를 준비해서 읍사무소 직원에게 제출했다. 그때 직원이 엄마에게 물었다.


“어머님, 아버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엄마는 흠칫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외조부모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이 많을 땐 내가 대답하면 됐는데 이건 나도 모르는 거다. 나도 덩달아 당황한 채 엄마 얼굴만 바라봤다. 다행히 엄마는 이름이 떠오른 듯 답했다. “설, 영, 태.” 외할아버지 성함이 설영태였구나. 그제야 알았다. 이윽고 엄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 아부지 이름을 오랜만에 말할라니까 생각이 안 나네.”


엄마는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얼마 만에 입 밖으로 내뱉어본 것일까. 몇십 년 만에 아버지 이름을 불러본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그 찰나의 순간이 내 마음에 훅 박혔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른 뒤에서야 비로소 엄마는 개명 신고를 접수할 수 있었다.


나도 언젠가 엄마 이름을 더 이상 말하지 않는 날이 오겠지. 내가 엄마 나이쯤 되면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엄마 나이가 될 때쯤에 엄마는 내 곁에 있을까. 엄마가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날은 얼마나 될까. 그렇게 생각하니 엄마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지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엄마의 새 이름을 많이 불러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효림아, 효림아!


세상에 부모 없는 자식은 없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에게 뿌리라는 것이 있다. 부모가 있기에 내가 있다. 작별 인사가 오래된 시점에는 그 이름을 쉽게 내뱉기 어려울 수는 있지만 결코 잊을 수는 없다. 그것이 부모와 자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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