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 엄마의 생활밀착형 한글공부
#9 식혜 아니고 식회
글쟁이 딸은 글을 쓸 때마다 저 깊은 바닥에서 작은 죄책감이 꿈틀거린다. 그것은 엄마를 향한 마음이다. 죄책감이라 하면 너무 죄스러운 것 같으니 미안함 정도로 하자. 나는 그 미안함을 씻기 위해 이따금씩 엄마의 한글 도우미가 되곤 한다.
추석을 앞둔 어느 날, 엄마는 아침부터 분주히 집안 살림을 시작했고 나는 메모장에 오늘 할 일을 적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엄마한테도 시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잠깐 이리 와 봐. 이거 내가 매일 그날 할 일을 적는 메모장인데, 오늘도 이렇게 적었거든? 여기에 엄마도 엄마가 오늘 할 일 적어봐. 저절로 글씨 연습도 되고 할 일도 안 까먹고, 치매 예방! 얼마나 좋아!"
'뭘 이런 걸 다 하나' 어색한 표정으로 식탁에 앉은 엄마는 펜을 쥐더니 자신 있게 '오늘 할 일'을 적었다. 그러곤 이내 고민에 잠겼다. 분명 만들어야 할 반찬은 많은데. 연필보다 식칼을 쥐는 세월이 더 많았던 그녀는 늘 이렇게 시간이 필요하다.
엄마가 처음으로 적은 건 식혜였다. 정확히(?) 말하면 '식회'! 세상에서 우리 엄마가 만든 식혜만큼 맛있는 걸 먹어 본 적이 없었는데, 식혜가 아니라 '식회'여서 그랬나 보다. 한 번 숨이 튼 엄마는 두 번째 할 일로 '무우 생채'를 적었고 세 번째로 '고추전갈담기’를 적었다.
다 음식 장만, 집안일이었다. 오로지 엄마 혼자만을 위한 할 일은 없었다. 적을 만큼 적었다는 듯 메모장을 내미는 엄마에게 한 가지만 더 생각해보자고 했다.
또다시 찾아온 아까보다 오랜 정적이 흐르고 엄마는 "아 맞다! 나 잠자야 돼"라며 네 번째로 잠자기를 적었다. 한 글자씩 힘주어 적는 엄마의 모습에서 엄마가 정말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각자 할 일을 하자며 메모장을 덮으려던 그때, "틀린 글씨 가르쳐 줘." 엄마가 한글 공부를 하고 싶을 때 나에게 하는 말이다. 내 눈에 엄마는 받아쓰기 채점을 앞둔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나는 빨간색 볼펜으로 '식회'를 '식혜'로, '고추전갈'을 '고추젓갈'로 고쳤다. 차마 '무우'까지 '무'로 바꾸지는 않았다.
엄마는 내가 고친 글씨를 보며 맞춤법을 익혔다.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그제야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글자 하나 배우는 것으로 당신만의 기쁨과 성취를 느끼는 엄마. 그녀가 이날 할 일을 다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