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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재 Oct 29. 2022

약해지는 엄마, 강해지는 딸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보호자가 바뀌어간다


갓 태어난 아이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심지어 싸는 일마저 스스로의 조절 능력으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살짝 부는 바람에도 힘없이 나풀대는 배냇머리가 한 올 두 올 자라나고, 사계절을 지내며 비로소 걸을 수 있게 되고, 귀여운 치아도 하나둘 생겨나 음식물을 씹어서 삼킬 힘이 생기고, 그제야 사람 구실을 하기 시작한다. 최소한의 신체적 발달을 마치면 정서적 발달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 무릇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동물이기에 배려와 양보, 감사와 거절 속에 다양한 감정을 익히며 스스로의 그릇을 만들어 나간다.


요즘 엄마의 모습을 보면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것만 같다. 무릎이 아파 장시간 걷기가 힘들고 이따금씩 치아가 말썽을 부려 마음껏 먹지 못할 때가 있다. 머리카락의 굵기도 예전만 못하거니와 흰머리가 몰라보게 늘어났다. 스마트폰을 다루는 일이나 무거운 가구를 정리하는 일 등 혼자서 할 수 없는 것들이 서서히 늘어간다. 고집 많은 미운 네 살처럼 아빠 앞에서는 점점 자기주장이 강해지는 반면, 그토록 강인했던 여성이 막내딸이 서울로 돌아갈 때마다 자식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


보살핌의 주체도 바뀌어간다. 내가 직장인이 되고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기까지는 엄마의 보살핌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지금도 김치며 고추장이며 절대 사 먹지 말라는 챙김은 여전하지만 필수불가결의 의미를 따지면 달라진다. 이제 엄마가 보내주는 택배는 나의 의식주와 생존을 위한 목적보다 엄마가 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함으로써 엄마가 느끼는 성취감과 보람, 엄마의 자존감을 위한 목적이 더욱 커졌다. 오히려 엄마에게 내가 없으면 안 되는 부분들은 늘어났다. 에어컨이 고장 나고, 냉장고에서 물이 새고, 스마트폰 화면이 이상해지면 엄마는 나를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는 예순을 넘기고 나는 서른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전성기가 바뀌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30년 전 엄마는 누구보다 아름답고 맑은 여인이었으리라. 그때의 엄마가 지금의 내 모습이 되었고 엄마는 최정상을 찍고 내리막을 걷는 연예인처럼 인생의 후반전을 치르고 있다.



엄마가 이상하다


평화로운 봄날, 본가에서 따스한 아침 햇살을 이불 삼아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던 날이었다. 휴대폰 진동음이 울렸다. 엄마였다. 이 시간에 엄마가 웬일인가 싶어 받았다. 엄마는 잔뜩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건물 현관 공동 비밀번호가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엄마에게 일러주었다. 1234 제대로 누른 거 맞냐고. 이미 평정심을 잃은 엄마는 내려와서 열어달라고 했고 나는 곧장 밑으로 내려갔다. 엄마는 아침 일찍 목욕탕을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열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는 출입 기계가 고장이 난 건 아닌지 직접 비밀번호를 눌러보았다. 그런데 잘만 열리는 것이다.


다시 한번 해보라는 말에 엄마는 자신 있게 손가락을 올리더니 냅다 숫자부터 눌렀다. 틀렸다.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기 위해서는 # 버튼과 * 버튼을 순서대로 먼저 눌러야 한다. 2년 넘게 이 집에 살면서 별 탈 없이 잘 열어왔을 엄마다. 엄마에게 알려주었다. 엄마 #* 먼저 누르고 그다음에 숫자를 눌러야 해. 엄마는 세상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는 숫자만 눌러도 되던 게 왜 이러냐며 자꾸만 억울해했다. 한참 열띤 토론을 마친 뒤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이 찝찝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 일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몇 달 뒤 엄마는 또다시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지 못해 스스로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휴대폰까지 두고 외출했던 엄마는 빌라 밖 화단에서 내 이름을 수차례 부르고 있었다. 입구에서 만난 엄마는 이번에도 #* 이 아닌 숫자부터 누르려했다. 갑작스러운 이상 행동에 나는 혹시나 엄마가 치매에 걸리진 않을까 생각하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 엄마는 눈치챘는지 "엄마 아직 치매 아니야"라며 멋쩍은 웃음으로 넘겼지만 나는 여전히 그 일을 잊을 수 없다.



엄마의 엄마로 살리라


나의 엄마, 설효림 여사는 여전히 강한 여성이지만 약해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녀의 막내딸, 나 양은희는 아직도 약한 풋내기 어른이지만 강해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부모의 사랑을 받는 방법을 모른 채 부모가 되어버린, 그래서 나를 무한히 사랑하지만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모르는 설효림 여사를 보며 나는 다짐한다. 그녀의 남은 인생만큼은 내가 엄마의 엄마로 살겠다고.


지금의 엄마의 모습을 노화의 과정이라 말하고 싶지 않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간다는 뜻의 공수래공수거는 인간의 삶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유한한 인생의 끝을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은 아이의 모습과 닮은 점이 많다. 사람은 아이로 태어나 아이가 되어 죽는다. 나의 엄마 또한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되어가는 것, 그러니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것뿐이다.


그런 엄마를 바라보며 더 강해지자고 마음먹는 나는 가수 노사연의 노래 '바램'을 들으며 엄마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나는 오늘도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한다. 나는 글을 모르는 엄마에게 한글을 가르쳐준다. 나는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 엄마를 위해 오늘도 엄마의 오른쪽에 선다.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를 찾아 들려주고 어젯밤 놓친 드라마를 찾아 보여준다. 고된 노동에 뭉친 근육을 마사지해주고 영양제와 약은 잘 챙겨 먹었는지 묻는다. 엄마의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토닥여주고, 안아주고, 함께 사진을 찍는다.



에필로그


어느 날 엄마에게 한글 공부를 위해 일기를 써보라고 했다. 엄마는 다행히 일기 쓸 힘이 남아 있었던지 아니면 일기를 쓰고 싶을 만큼 그날을 기억하고 싶었는지 펜을 손에 쥐었다. 막상 쓰려고 보니 그저 어색하기만 한 그녀는 뭐라고 써야 하냐며 망설이다 이내 한 글자씩 적기 시작했다. 나중에 펼쳐 본 그녀의 공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설효림 이름을 바꿨다
나는 기분이 좋다 행복하다
이재부터 나는 다시 태어난다
열심이 살자
건강하게 살자
오늘은 친구하고 옷닭을 먹고
차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
ㅎㅎ 하하 즐거다



엄마의 첫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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