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에 남지 않은 진심
농구를 좋아할수록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유달리 눈길이 가는 부분은 득점이나 화려한 기록이 아닌, 그 이면에 있는 헌신적이고 투지 넘치는 모습들. 그런 모습에 더 감동을 느끼고 나도 그들처럼 하루하루를 더 성실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든다.
나에게는 특별한 선수가 있다. 양희종 선수를 처음 알게 된 건, 내가 응원하는 팀(당시 안양 SBS, 현 안양 정관장)의 신인 선수로 경기에 나섰을 때다. 잘생긴 외모에 성실한 플레이가 멋져서 응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기록적으로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 다른 선수들이 화려한 득점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때, 양희종 선수는 경기 기록지에 득점 등 주요 지표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해 '무록'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힘든 시기를 보냈었다.
하지만 팀을 향한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진심이었던 선수다. 그는 기록에서 드러나는 부분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궂은 일을 자처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몸을 날려 수비하고, 치열하게 리바운드를 잡고, 뒤에서 동료 선수들을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는 시즌을 거듭할수록 진가를 드러냈고 시상식에서 최우수 수비상을 놓치지 않으며 본인만의 농구 철학을 증명했다. 덕분에 나는 농구가 화려한 기록만으로 평가될 수 없는 스포츠라는 걸 배웠다.
양희종 선수를 응원하게 되면서,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연세대학교를 목표 대학으로 삼았다. 이유는 양희종 선수가 연세대학교 농구부 출신이었기 때문. 그렇게 학교에 입학한 나는 우연한 인연을 계기로 어느 대회에서 인사를 드리게 됐다. 단순한 인사였을 뿐인데, 그 순간의 설렘은 오래 남았다. 이후 페이스북 친구를 받아주셨고, 안타깝게도 나는 몇 년 동안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2022/2023 시즌은 양희종 선수의 은퇴 시즌이었다. 팀은 승승장구하며 우승을 향해 나아갔다. 나는 다시 없을 선수의 마지막 시즌을 응원하기 위해 최대한 자주 경기장에 갔다. 은퇴식이 열렸던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는 어쩌면 양희종 선수 덕분에 만나게 된 대학교 베프 친구들을 데리고 출동했다. 친구들은 내가 우는 모습을 기대했지만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고 싶어서 울 새가 없었다. 경기 종료 후 선수님이자 선배님인 양희종 선수와 사진을 찍게 됐다. 9년 전, 처음 인사를 나누게 해 준 다른 선배님이 "은희랑 사진 찍어줘"라고 했는데 선수님이 "나 은희 알아"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한마디에 밀려 오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축복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9년 만에 사진을 찍게 되었다. 끝나고 친구들에게 들으니 나보다 본인들이 더 설레서 난리였단다.
정규리그 우승 이후, 챔피언 결정전은 마냥 쉽지 않았다.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이 이어졌다. 양희종 선수는 6차전에서 어깨 부상을 당해 7차전 출전이 불투명해졌다. 사상 최초 연장전까지 접어들면서 경기는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전개로 흘러갔다. 3초를 남겨 둔 시점에서 우리 팀이 앞서가고 있었다.
그때, 감독님은 양희종 선수에게 교체 사진을 보냈다. 마지막 경기 종료이자 우승의 순간을 코트 위에서 보내라는 감독님의 배려였다. 양희종 선수는 어깨에 깁스를 한 채 유니폼을 갈아입고 코트에 들어섰다. 마침내 그는 동료의 패스를 받아 공을 하늘 높이 던지면서 우승을 확정지었다. 나를 포함한 경기장 모든 팬들이 환호했고 그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양희종 선수는 안양 최초의 영구결번 선수가 되었다. 오랜 시간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한 그는 이제 구단의 역사가 되었다. 은퇴 후 그의 성실했던 커리어는 계속해서 회자되었고 후배 선수들과 감독들은 그의 리더십을 칭찬했다.
나에게 양희종 선수는 응원하는 선수 그 이상의 롤모델이다. 가장 본받고 싶은 점은 역시나 그의 태도다. 선수로서 농구에 열정을 다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료 선수들을 원팀으로 이끌어가는 포용력과 리더십이 모두의 귀감이 된다. 또 한 가지 특별한 점은, 구단에 대한 감사와 경기장 스태프 분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터뷰 때마다 모기업의 지원과 배려에 감사를 표했고 꼬박꼬박 제품 홍보도 했다. 경기장을 청소해주시는 분들과 식사를 만들어주시는 분들에 대해서도 늘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선수였다.
나는 늘 결과중심적으로 살아왔다. 과정은 모르겠고 결국 결과로 승부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당장 결과가 드러나지 않으면 성급했고 초조했다. 하지만 양희종 선수를 보며 생각을 달리 한다. 눈앞에 화려한 기록이 없더라도, 성실함이 하루하루 쌓이면 진심이 되고 후회없이 최선을 다하면 그뿐이다. 코트 위의 성실한 발자국들이 새겨질수록 기억은 선명해진다. 그의 모습을 본받아, 화려한 순간이 아니더라도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며 살아가고 싶다.
p.s. 아래는 2023년 3월 은퇴식 직후 인스타그램에 남긴 글이다.
1. 내가 초등학생이던 2004/05 시즌 때 '단테 존스 신드롬'을 계기로 안양KGC(당시 안양SBS)의 팬이 됐다. 양희종 선수는 2007년 신인 선수로 안양에 입단했는데, 성실한 모습에 반해 최애 선수로 응원하기 시작했다.(네, 외모도 당연히 봤습니다)
2. 이후 고등학교 3년 내내 연세대학교 스포츠레저학과에 입학해서 양희종 선수의 후배가 되자 이 목표 하나만 바라보고 달렸다. 선수 한 명 때문에 대학을 정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지치고 흔들릴 때마다 이 선수의 존재 자체가 힘이 된 것은 틀림없었다.
3. 그렇게 연대는 나의 모교가 되었고 나는 양희종 선수의 후배가 되었다. 소중한 동기들과 선후배들 덕분에 양희종 선수와 영상통화도 해보고 2014 아시안게임 국가대표팀 저지도 선물받고 사진도 찍었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부담되실까봐 더 나대지는(?) 못하고 멀리서 응원만 했다.(작년에 대학농구리그 보러 학교 오셨을 때도 못 다가감...)
4. 시간이 흘러 2023년 3월 26일, 양희종 선수의 은퇴식이 열렸고 경기 끝나고 사진을 같이 찍게 됐다. 그런데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다!!! 벌써 9년 전 일인데 그때를 기억해주시고 "나 은희 알아"라고 하셨다...(감동 받고 멘탈 나가서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함)
5. 양희종 선수는 내게 최애 선수 그 이상의 존재다. 이제는 선배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자, 코트 안팎에서 헌신과 리더십의 가치를 알려준 인생의 멘토,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존경하는 롤모델이다.
6. 은퇴 소식을 접했을 때 아쉽기도 했고 은퇴식을 지켜보며 울컥하기도 했지만, 17년 프로 생활의 마무리를 아름답게, 행복하게 하시는 모습을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고 기뻤다.
7. 이제는 농구인생 제2막을 응원하며, 양희종 선수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동기부여가 되고 좋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도록, 내 인생도 성실하게 멋지게 살아가야지-!
8. 이로써 나의 17년 덕질의 결말은
#꽉_닫힌_해피엔딩
나의 Boss, 나의 Leader, 나의 Hero, 나의 Captain
17년 원클럽맨,
구단 역대 최초 영구결번,
구단 창단 첫 챔프전 우승 위닝샷,
KBL 최초 플레이오프 전승 우승 멤버,
2014 아시안게임 남자농구 금메달 주역,
2007-2023 안양의 레전드
No.11 양희종 선수의 은퇴식
+ 안양KGC 정규리그 우승 세리머니까지
절대 잊지 못할, 내 인생 최고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