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년 덕질 일기
초등학교 4학년 겨울이었다. 아빠와의 리모컨 전쟁에서 승리한 나는 6시내고향과 뉴스가 아닌 새로운 채널을 찾으러 떠났다. 일일드라마가 시작하는 8시 20분이면 나는 다시 엄마에게 리모컨을 뺏긴다. 방탈출 게임처럼 제한된 시간 안에 반드시 내가 보고 싶은 채널을 찾아야만 한다. 안 그러면 아빠가 다시 뺏어갈 테니까.
이렇게 많은 채널을 두고 5번부터 11번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는 모양새는 우리 집안 풍경의 축소판과 같았다. 이 넓은 우주에서, 아니 대한민국도 이렇게 넓은데 이 조그만 시골에서 뻔하게 반복되는 매일. 나는 학교와 집을, 아빠는 돼지 농장과 과수원을, 엄마는 읍내 사거리 정도만을 오가는 삶. 그러니 리모컨으로 채널 올리는 버튼을 자꾸만 눌렀던 건 우물처럼 좁은 시골에서의 지루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나의 본능이었으리라.
50번인지 100번인지 훌쩍 넘겼을 때, 내 눈길을 사로잡은 채널은 스포츠 채널이었다. 우리나라 남자 프로농구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정신없이 공을 주고 받는 선수들 뒤로 관중석에 꽉 들어찬 사람들이 환호한다. 룰은 모르겠지만 이기고 있는 팀이 꽤 신나보인다. 달아나면 쫓아오는 형국으로 점수가 시시각각 바뀌고 왠지 지금 앞서고 있는 팀이 이길 것 같은데 함부로 확신하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다. 홀린 듯 보고 있던 찰나, "9번, 9번!"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채널은 돌아갔다.
일일드라마가 끝나면 이번에는 리모컨이 아빠의 손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함께 뉴스를 본다. 메인 뉴스부터 광주전남 뉴스, 스포츠 뉴스를 지나 가장 중요한 날씨 예보까지 봐야 한다. 스포츠 뉴스는 날씨를 보기 위해 지나가는 통과의례 같은 것인데, 그날 스포츠 뉴스에 내가 봤던 농구 경기가 보도됐다. '안양SBS'라는 팀이 리그 역대 최다인 15연승을 달성했다는 소식이었다.
농구를 하나도 모르는데도 대단해보였다. 경기 내내 치열하게 싸우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선수들과 감독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희열이 느껴졌다. 무리 중에 최고가 되는 기분은 어떨까.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으면 목표를 이뤘을 때 저렇게 기쁜 표정이 나오는 걸까. 또, 그런 이들을 저기 관중석에 앉아 응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은 그 순간 이후 나는 리모컨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스포츠 채널을 틀었다. 이기든 지든 상관없었다. 농구를 볼 때만큼은 집과 학교만을 오가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기분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고자극 도파민이었던 것이다. 중계를 보면서 동시에 거실에서 농구를 하기도 했다. 집에 나뒹굴던 고무 탱탱볼로 드리블하고 슛하는 시늉을 했다. 마음만은 마이클 조던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나는 체대입시를 준비했고 농구로 시험을 봐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갔다. TV에서 봤던 경기장 관중석에 내가 앉아서 경기를 관람했다. 대학농구를 취재하는 기자 활동을 할 때는 일반 관중석이 아닌 기자석에 앉아 경기를 보는 특권도 누렸다.
그것도 모자라 학과 동기, 선후배와 교내 최초의 여자농구동아리도 만들었다. 나의 최애 선수이자 농구부 출신 선배님의 등번호 11번을 그대로 달았다. 번아웃으로 모든 걸 내려놓았을 때, 유일하게 시작한 일도 성인 여자농구 동호회를 만든 것이다. 지금도 주말에는 동호회에 나가 농구를 하며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
높은 연봉, 넓은 집, 화려한 명품을 소유한 삶보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는 지금의 삶이 좋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 시작은 별 거 없었다. 그저 TV 채널을 돌리다 이뤄진 우연한 만남이었을 뿐이다. 농구와의 우연은 20년의 세월이 쌓여 운명이 되었다.
나는 이 운명적인 이야기를 기록하고 나누고자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좋아하는 것을 찾아 헤매는 분에게,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싶은 분에게, 무엇보다 농구를 좋아하는 분에게 이 이야기가 가닿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