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이슈 중 하나가 '다양성의 인정'이라 여겨집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다양성'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담론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고 백남준 작가의 미디어 아트 예술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동일한 모니터 플랫폼 위에 각기 다른 영상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거대한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는 모습이 현대 사회의 이념과 관심사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들뢰즈의 리좀구조는 이러한 현대의 정신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다음은 인문학공동체 에피쿠로스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 리좀(Rhizome)은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Felix Guattari)의 명저 <천 개의 고원(Mille Plateaux)>(1980)의 입문적 표제어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지금까지 서양의 사유는 ‘나무(樹木)’를 모델로 삼아왔습니다. 나무와 뿌리를 모델로 하는 이 사유는 항상 중심이 존재하고, ‘그리고…그리고…’로 이어지는 연속성의 논리가 지배합니다. 정신분석학·언어학·계보학·이원론에서도 드러나듯, 서양의 지식을 지탱하는 것은 이런 나무 형태의 사유입니다. 나무 형태의 사고에도 다양성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다양성은 중심을 가진 다양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무에는 뿌리, 줄기, 잔가지, 잎 그리고 꽃과 열매가 있고 좌우대칭의 잘 짜여진 구조로 질서정연한 형태입니다. 근대사회는 수목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군대처럼 질서화되어 있고 피라미드처럼 위계적입니다. 이 수목구조 반대의 개념이 ‘리좀’입니다.
식물학에서 말하는 ‘리좀’은 땅 속에서 수평적으로 뻗어있는 구근(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 형태의 덩이줄기를 말합니다. 리좀은 나무처럼 땅에서 하늘로 질서정연하게 자라지 않고 땅에서 땅속을 향하며 다양체로 존재합니다. ‘리좀’은 대나무나 잔디, 고구마, 감자, 토란 등의 뿌리줄기처럼 위계를 알지 못하는 수평적 연결의 상(象)입니다. 리좀은 중심이 없고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리좀은 중간, 사물의 틈, 존재의 사이에 존재하는 간주곡입니다. ‘리좀’은 ‘수목구조’라는 개념에 함의된 근대의 과학, 제도, 권력, 정주, 자본, 제국, 합리, 이성 등을 해체하는 새로운 사유의 틀이며, ‘망상조직과 같은 다양체’이며 여러 특질을 가진 다질성의 복합체입니다.
리좀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사이와 중간이고, 종단하면서 횡단하는 동시에 융합하면서 통섭합니다. 리좀은 고정된 체계나 구조가 없고 중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질서가 없고 인과관계도 아니며 다층적이고 다원적입니다. 또한 리좀은 선형, 원형, 방사형 등의 유클리드 기하학적 위계가 아니고 동형반복의 프랙탈 기하학도 아니며 연기나 안개처럼 비기하학적입니다. 리좀은 ‘연계’나 ‘관계’이기 때문에 ‘그래서’ 또는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연결됩니다. 리좀은 실천적인 개념입니다. 단순하게 지금까지의 서양적 사고를 해석하고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서 리좀적 사고의 실천을 강조합니다. 철학상의 하나의 개념을 창조하는 것을 넘어, 사고를 실천하는 양식과 방법을 제시합니다."
들뢰즈(G. Deleuze)와 가타리(F. Guattari)의 표현을 빌면, ‘사고와 표현’은 수목 체계가 아니라 리좀 체계입니다. 중심에 가까운 것과 먼 것 간에 위계가 발생하고 주변의 잔가지나 곁뿌리들을 중심에 동일화하고 그것과 포개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수목형이 아니라 인문학이든 교육학이든 사회학이든 어떤 학문 영역도 ‘사고와 표현’의 중심 뿌리일 수 없고, 모두 덩이줄기라는 의미의 리좀입니다. 이 리좀들은 다른 학문영역들과의 관계에 의해 각자의 값을 갖습니다. 리좀은 통섭(通攝)적ㆍ노마디즘(nomadism)적 체계입니다. 그것은 고정된 연구 대상을 뛰어넘고 방법론적인 고유성도 초월하며 이론적 집적에서도 하나의 줄기를 가지지 않습니다. 리좀은 고립이고 분과적인 학문을 구성하지 않고 분과학문뿐 아니라 계열학문까지도 유목민처럼 넘나드는 통섭(通攝)합니다.
‘리좀(Rhizome)’은 다양한 분야의 텍스트를 환경·문맥·상황·사용과 실천 맥락에서 이해하기 위하여 덩굴줄기(리좀, Rhizome)처럼 문학·사학·철학·예술 등의 인문학과 사회학·경제학·자연과학 등과 연결하고 접속해 인문학서원 에피쿠로스에서 진행하는 인문과정입니다."
이러한 다양성 추구의 모습은 하위문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래는 1990년대 대표적인 댄스 그룹 '나미와 붐붐'의 모습입니다.
과거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중앙에 메인 가수가 있고, 양 옆에 댄서가 배치되는 모습입니다. 들뢰즈의 표현대로라면 '나무 구조'의 줄기가 나미 씨가 됩니다. 중심과 주변이라는 공식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반면 BTS는 중심과 주변부라는 공식을 깨고 다양성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BTS도 리더의 역할이 있지만, 각기 다른 개성으로 대중에게 어필을 하고 있습니다. 인기의 차등은 있지만, 중심과 주변이라는 공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는 이 다양성 존중이라는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일부 기독교의 불편한 시선이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다양성 존중이라는 분위기가 성경적 기준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은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사실이기는 합니다.
다양성이 존중이라는 것이 무조건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일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로서 학생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존중해달라는 요구를 많이 받습니다.
학생들의 생각과 마음을 존중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생각이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좋다고 해서 공공장소에서 노래를 크게 트는 것이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며, 공적인 시간에 모든 자유로운 행동이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다양성이 존중받는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엄연한 선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 선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이라는 위치에 도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피해가 가지 않는다는 명분 하에 다수가 소수에게 횡포를 부릴 수 있는 선이기도 합니다.
다수가 소수에게 폭력을 행하면서 아무도 피해받지 않았다고 선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성 존중이라는 좋은 이념도 완전한 것은 아니며, 반드시 이를 담아내는 기준과 선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기독교인들은 '다양성'에 대한 지나친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 성을 탈출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때 유대교의 신봉자이자 수호자로 자처했던 사람이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같은 유대교 신자였던 사람들은 왜 사도 바울을 그토록 증오하며 죽이려고 까지 했을까요?
이는 그가 전하는 생각 또는 정신이 유대교가 추구하는 신념과 이상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특정'이라는 단어를 사랑합니다.
특정 민족, 특정 사람, 특정 방식, 특정한 구원.
그들은 하나님께서 오로지 유대인만을 선택하셨고, 그 가운데서도 특정한 방법으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자들만을, 구원하셨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유대 사회에는 확고한 계급이 존재했고,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과 이방인들로 넘쳐났습니다.
반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 구원하셨다고 전했습니다. 복음의 정신 속에는 특정 민족도, 특정 사람도, 특정 방식도 없으며, 오직 자신이 죄인이라는 변개할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우리의 죄를 값없이 용서하셨다는 사실만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이 시작된다고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따른다면 유대인들의 제사 방식도, 예루살렘도, 율법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 위에 세워진 유대사회 전체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래 위에 세운 집'이 무너진다는 말씀을 연상합니다.
복음 앞에서는 인간이 만들어 낸 어떠한 중심이 해체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욕망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낸 중심은 하나님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고, 오히려 인간의 모든 다양성이 그대로 인정되며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만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정신은 '다양성'을 지지합니다.
그분의 정신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억압적인 '중심을 해체'합니다.
그 안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다양성이 회복되고, 참으로 건전한 하나님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 타인의 존엄성을 해치는 과도한 다양성의 횡포를 제어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다양성은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며, 현대사회의 다양성 추구는 지지받아야 마땅합니다. 반면, 예수의 정신이 그 중심에 서서 다양성 자체가 또 하나의 중심성을 형성하는 불완전한 상황이 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