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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Sep 01. 2024

니체의 권력의지와 박해

박해의 진정한 의미

세상의 박해

기독교 신앙의 초창기에는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만으로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과거는 달랐습니다. 양화대교 북단에 '양화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양화진은 1754년 영조 30년에 군진(軍陣)으로 설치되었습니다. 양화진의 강물은 깊어 제물포로 들어오는 전국 각지의 생산물이 이곳으로 들어와 도성과 궁궐로 배분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세의 공격으로부터 취약하여 방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화진은 조선의 고유한 문화와 외국의 문화가 서로 만날 운명적인 지형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치던 시절, 양화진은 선교사들의 순교지가 되었습니다. 1866년 3월 프랑스군이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를 응징하기 하고자 군함을 끌고 쳐들어 옵니다. 그리고 10월에는 강화도에서 패퇴하는 병인양요가 발생하는데, 흥선대원군은 양이에게 더럽혀진 한강을 선교사들의 피로 씻겠다며 양화진 한 언덕(잠두봉)에서 천주교 선교사 8천 명의 머리를 자르고 시신을 한강에 던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잠두봉을 '절두산'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그토록 박해했을까요?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1860년 중국과 러시아는 조약을 맺게 되고, 러시아는 연해주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되어 러시아와 조선은 국경을 맞대게 됩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에게 러시아 남해를 막기 위한 조선-프랑스 간에 조약을 중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프랑스 선교사들은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힙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흥선대원군이 프랑스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데, 조약도 거절당하고, 외세 세력과 내통을 한다는 소문까지 나는 일이 벌어지자 그는 프랑스 선교사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병인박해의 배경이고, 양화진 절두산 박해의 이유입니다. 


예수의 시대에도 예수와 그 제자들을 박해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는 '헤롯'왕입니다. 그는 권력에 눈이 멀어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말만으로도 베들레헴과 인근에 사는 2살 미만의 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인물입니다. 

그다음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지키기 위해 예수를 죽였으며, 그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정죄했던 집단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지역과 영역을 마치 '하나님'처럼 여기고 살았습니다. 

구약 성경 열상 21장의 '아합'왕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 중 한 명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불리게 된 사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나봇의 포도밭 강탈'이라 불리는 사건입니다. 아합 왕의 왕궁 앞에는 나봇이라고 하는 사람의 포도밭이 있었습니다. 아합왕은 그 밭을 자신의 정원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그 밭을 자신에게 팔라고 말했지만, 나봇은 땅을 팔고 사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합은 결국 나봇을 모함하여 죽이고, 그 밭을 차지했습니다. 

어찌 보면 최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평범한 백성의 밭을 빼앗은 일이 그리 대수인가라는 생각도 들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가장 악한 사건으로 여겼습니다. 


가까운 나라 일본은 에도 막부 시대에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했습니다. 사실 로마 박해보다도 길고, 끔찍한 박해가 일본의 박해입니다. 다이묘들은 기독교의 평등사상이 일본의 질서를 무너트린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 사상이 절대로 일본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권력과 사회가 안정된다고 여겼습니다. 


북한 역시 기독교를 가장 강하게 부정하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사회주의 국가가 종교를 부정하는 이유는 종교가 '기득권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고, 주입하는 역할'을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교를 거부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은 사실 자기들이 신의 역할을 대신하고, 1당 독재의 이념을 교리로 삼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없애 버리고, 자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 후에 신은 없다고 선언했지만, 사실 자기들이 신 행세를 하는 중입니다. 


니체의 권력의지와 박해

니체의 '권력의 의지(Will to Power)'는 그의 철학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에 '권력 추구를 향한 본성'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권력에의 의지는 단순히 권력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창조성을 주장하고 향상하려는 근본적인 추진력입니다."_'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권력에의 의지는 단순히 권력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창조성을 주장하고 향상하려는 근본적인 추진력입니다."_'선악의 저편'


그는 권력의 의지가 인간이 추구하는 하나의 삶의 형태가 아니라, 모든 인간 행동의 근본적인 이유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누군가는 추구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 그 자체라는 것이죠. 니체는 이러한 생각을 통해서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Ubermensch(초인)'을 제시합니다. 초인은 자신의 삶을 긍정하며, 창조적이고, 기존의 윤리적 틀을 넘어서는 인간입니다. 니체의 인간상에서 긍정적인 면을 발견한다면 적극적이고, 열정적이며, 창조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반면, 권력을 지향하고, 독점하며, 자만하는 인간의 모습은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그는 그의 책 '선악의 저편'에서 기독교의 진리인 사랑, 섬김, 양보, 존중 등의 윤리를 '노예의 윤리'라고 했습니다.  


“The morality of the weak—that is to say, Christian morality—has prevailed, indeed it has destroyed the moralities of stronger people.”

"약자들의 도덕성, 즉 기독교 도덕성이 득세해 왔고, 실제로 그것은 강자들의 도덕성을 무너뜨렸습니다."


니체는 우월한 인간성은 '도전하고, 성취하는 것'이지만, 다수의 약자들이 강자의 성취를 시기하며, 그들의 손과 발을 묶을 목적으로 약자의 윤리를 만들어 냈고, 체계적으로 주입해왔다고 주장합니다. 니체가 보기에 기독교는 이를 지지하는 종교로서 역사의 발전을 저해하는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니체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 분명한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한 이유는, 그들의 수가 적고 약하기 때문이었고, 요셉을 택하신 이유도 그가 막내로서 인생의 벼랑 끝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나심도 베냐민이라고 하는 가장 약한 부족을 통해서였으며, 그 자신이 가장 낮은 모습으로 말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는 니체의 '권력 의지' 주장과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는 것으로서 온전한 인간성은 '약자에 대한 사랑과 배려'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우주적 질서라는 것이 성경적 주장입니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왜 흥선대원군은 선교사들을 죽였고, 헤롯은 아이들을 죽였으며, 예수님 시절 종교지도자들은 왜 병들고 약한 자들을 죄인으로 취급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선교사는 이방인이었고, 아이들을 스스로를 방해할 수 없으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항변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이유를 붙여 약자를 탄압합니다. 선교사들은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이고, 아이들은 메시아가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였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은 죄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니체가 강조하지 않아도 인간의 역사는 '강자'의 역사이며, '약자'는 그 자체로 박해받을 만한 이유가 너무나도 충분합니다. 


박해가 아닌 비판

한 교회가 아파트 재개발 단지 안에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재개발조합과 금액 협상을 벌이며 쇠파이프와 화염병까지 동원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신의 재산권 지키기의 조금 과격한 모습이라고 보입니다. 하지만 해당 교회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교회 박해'입니다. 


또 다른 교회는 커다란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준다고 합니다. 이 일이 언론에 조명을 받고, 상당히 시끄럽게 되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 언론은 마치 교회가 일반 기업처럼 목사의 것인 듯 상속이 된다고 하여 보도를 했습니다. 이에 대해 해당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온갖 꼼수를 동원해서 세습을 완료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기대와 소망을 주는 곳이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을 모두 버리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교회를 위함'은 무엇인지 많이 궁금했습니다. 세습을 하는 교회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인 보도에 대해 교회 관계자들은 이를 '교회 박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박해가 아닙니다. 이것은 정당하지 못한 일을 저지른 교회에 대한 비판입니다. 돈을 추구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교회를 향해서 세상이 지적하는 것은 박해가 아닙니다. 흥선대원군 시절의 선교사, 헤롯왕 시대의 아기들 그리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 어느 누구도 돈과 권력을 지키겠다고 세상과 싸운 적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오히려 오른 빰을 치는 자에게 왼 빰을 돌려 대라는 말씀으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안정적 교회 시스템으로, 거대한 자본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이 교회의 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예수께서는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두 벌 옷이나 신이 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정신의 일이고, 마음의 일입니다. 그렇다고 돈과 자본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진정한 출발이 어디에서 시작하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진심으로 사죄하는 마음, 진정으로 사랑하는 심정, 나를 넘어 타인에게로 나아가는 태도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그래서 대단해 보이는 지위나, 능력이 꼭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저도 마음의 깨어짐을 느낍니다. 폼 나게 돕고 싶고, 드러나게 선행을 하고 싶은 것이 저의 부패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는 목수의 아들로서 사시다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충만하심을 드러낸 예수의 뒤를 따르고 싶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받는 대접을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가 받은 그 고난은 '약자'들을 위한 것이었고, '사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박해'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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