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와 가벼운 삶
저는 몇 년 전 집을 지었습니다. 처가와 저희가 재정을 함께 충당해서 지은 집이라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평수, 디자인, 골조 방식 등 여러 가지로 내 마음대로 되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30평 정도의 독특한 디자인과 작은 공간들이 여기저기 있는 그런 집을 원했습니다. 어느 공간에는 탁 트인 전경이 있고, 또 다른 공간은 어둠 속에서 작은 빛줄기만 떨어지는 그런 집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장모는 60평 집을 원했고, 아내는 모든 곳에 빛이 잘 들어오는 채광과 높은 천고를 원했습니다.
급기야 저의 집은 60평 규모의 높은 천고를 가지고 있는 독특한 디자인의 미술관과 같은 집이 되어버렸습니다.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막상 집이 지어지고 보니 너무나 눈에 띄고, 거대했습니다. 높은 천고에 넓은 평수, 모든 장소에 채광을 고려한 디자인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 집에서의 삶은 너무나도 좋습니다. 넓은 공간 덕에 이방 저 방을 옮겨 다니며 잠을 잘 수 있고, 다양한 여가를 즐길 수 있어 여행도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우리 집이 제 마음에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몇 가지를 당부하셨는데, 그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마10:9-10, 새번역]
9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10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은 마땅하다.
유진 피터슨의 메세지 성경에는 'Travel light'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볍게 여행하라'
제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과 같은 궤적에 있는 경제학자 한 분이 계신데 E.F. 슈마허라는 경제학자입니다. 1911년 8월 독일에서 태어난 슈마허는 케인스와 애덤 스미스의 이론을 기반으로 하는 주류경제학을 반대하며 '물질적인 목적을 추구하고, 정신적인 목적을 가볍게 여기는 생활은 인간과 인간, 국가와 국가를 서로 대립하도록 만들며, 전쟁의 원인은 여기에 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는 대안적 경제학을 제시하기 위해 다양한 사상을 검토하였는데, 중년의 나이에는 기독교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욕망을 키우거나 확장하는 일은 지혜에 대립되는 것이다. 욕망이 커지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요인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며, 그래서 생존을 위한 두려움도 커지게 된다. 욕망을 줄이는 경우에만 분쟁과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인 긴장 상태를 진정으로 줄일 수 있다." 출처: 작은 것이 아름답다 중
슈마허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유하도록 하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학을 비판했으며, 결국 그러한 삶의 형태가 우리를 위기에 빠트린다고 했습니다.
"필요를 확장시키고 키우는 것은 지혜를 죽이는 지름길이다. 이는 또한 자유와 평화의 반대말이다. 필요한 것이 많아질수록 자신이 통제하기 어려운 외부의 힘에 많이 의존하게 되고, 이는 결국 존재론적 공포를 증가시킨다." 출처: 자발적 가난 중
우리의 삶의 방향이 우리의 욕망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간다면 그것은 자유를 얻고, 성취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자유가 축소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과거 알렉산더를 만난 디오게네스의 일화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시대의 지혜를 찾아다니던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를 찾아가지만, 알렉산더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력과 재물을 욕망하기보다는 알렉산더가 가린 한 줄기 빛을 더 갈망했던 이야기입니다.
물론 저는 어느 정도의 재물이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슈마허도 빈곤의 경계선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어느 수준 이하의 빈곤은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고, 인간성을 상실시킵니다. 하지만 어느 선을 넘어서는 부 역시 인간성을 상실시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역사학계의 놀라운 발견 중 하나인 '쾨베클리 테페'는 튀르키예 동남아나톨리아 지역의 산맥 능선 꼭대기에 있는 유적지입니다. 이 유적은 1963년 이스탄불 대학과 시카고 대학의 합동 조사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쾨베클리 테페의 축조 시기는 약 1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신석기시대에 닿아 있습니다.
이 유적이 놀라운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전통적인 역사학은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채집, 수렵에 의존했기 때문에 정착생활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정착생활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 이유도, 그럴 힘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쾨베클리 테페의 발견으로 신석기인들도 거대한 건축물을 축조할 동기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으며,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이 유적이 '종교적 활동'을 위한 '사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동시대에 다른 도시들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종교적 활동을 위한 사원이 발견됐다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구심점은 '경제적 목적'이 아닌 '종교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는 '신을 향한 종교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사람들이 경제적 목적을 위해 공동체와 도시를 이루고, 집단의 필요에 따라 종교를 만들어 냈다고 설명했지만, 괴베클리 테페의 발견으로 오히려 인간은 오래전부터 신을 향한 강력한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드러났습니다.
인간 사회는 번영과 안정을 위해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 질서 유지를 위해 힘을 동원하기도 하고, 보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 사회의 근본적인 질서는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건강한 '종교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좋은 출발을 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인간의 악과 부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또한 이를 대체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물질적 풍요가 이러한 구심점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성을 상실시키고 있습니다.
슈마허는 이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교회없이 살아가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교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출처: 당혹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 중
정신적인 것의 가치를 상실한 사회는 길을 잃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다른 어떤 것 보다 예수의 정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풍요와 평안을 주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가볍게 여행하라는 당부를 하신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물질적 소유를 위해 종교성을 이용하는 듯 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친구를 사귑니다. 선물을 주기도 하고, 이권을 주기도 하며, 재정적 도움을 주워 친구를 사귑니다. 하지만, 진정한 친구는 정신적 유익을 주고 받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 집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집으로 마무리를 지어야겠습니다.
좀 더 가볍게 살기를 소망하고, 생각보다 큰 우리 집이 나의 필요를 넘어 모두에게 유익한 집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