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인식론과 기독교의 믿음
중,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철학수업을 하는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철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철학하면 여러분은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제가 1995년에 군대를 갔는데, 군대 신병시절 선임들이 저에게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철학과'라고 말했는데, 선임들이 저보고 손금을 볼 줄 아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철학과 하고 손금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돈암동에서 월곡으로 넘어가는 '미아리 고개'에 몰려 있던 '철학관'이라는 '점 집(요즘 타로점 같은)'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근데 왜 미아리 고개 점 집들이 철학관이라는 간판을 걸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철학이라는 말의 뜻과 운명을 예측하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말이죠.
철학이라는 말은 한자로는 哲學 (밝을 철, 배울 학)으로서 '학문을 밝히다'라는 뜻인데, 이는 '진리를 알다'라는 의미입니다. 정확히는 '진리를 알아가다'입니다.
헬라어로는 φιλοσοφία '필로소피아'인데, φιλο 는 '사랑하다'라는 의미이고, σοφία는 '지혜'라는 의미입니다. 즉, 진혜를 사랑하다는 의미로 한자 철학과 유사한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Philosophy입니다.
철학은 '진리'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영역입니다.
[요 4:24, 새 번역]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 8:32, 새 번역]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 14:6, 새 번역]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성경은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예수 자신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진리이며, 그 진리인 예수를 통해서 구원이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실존이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Blind)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 21:14, 새 번역] 성전 뜰에서 눈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눈먼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내용이 많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칸트는 1724년 독일에서 태어난 위대한 철학자입니다. 그의 철학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인식론'입니다. 그는 인간이 '세계가 존재하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볼 수 있는 능력 안에 있는 것 만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내가 보는 세계는 나의 눈과 뇌가 나에게 보여주는 것만 보는 것이며, 실제 하는 세계가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X-ray를 통해서 우리의 몸을 보면 살은 없어지고, 뼈만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눈이 가시광선만을 포착하기 때문에 우리 몸속에 존재하는 뼈를 보지 못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우리 몸을 보면 우리가 보지 못했던 어떤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론적 한계는 단순히 '나-물리적 세계' 사이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왜곡과 한계는 내가 사람의 마음을 바라볼 때도 발생합니다.
개학을 했습니다. 처음 친구들을 만났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에 드는 친구들이 있고, 나한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거슬리는 친구가 있습니다. 마음속에 한번 거슬린 친구의 행동은 어쩐지 더욱 거슬리고, 나중에는 '이게 일부러 저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계속 쌓여가고, 급기야 실제로 안 좋은 관계로 발전합니다. 왜냐하면 '좋지 않은 기분'은 나의 생각도 비틀고, 그런 생각으로 친구를 보니 그 친구와 비틀어진 관계가 되어버리는 신기한 마법이 벌어집니다.
즉, 사람의 마음과 생각도 중립적이지 않고, 어떠한 선입견으로부터 시작되어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또는 보게 되는 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자기의 인생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이런 질문을 해보세요. "앞으로 10년 후 내 삶은 어떻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매 순간 부정적인 사건과 이유를 찾아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자신의 생각이 현실화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반면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사건들은 흘려보내고, 긍정적인 사건들로 자신의 삶을 채우게 되겠지요. 물론 그 결과가 자신이 예상한 대로 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장담하건대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세요. '절망'이라는 생각과 감정을 가진 사람에게 '구원'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삶이 꼭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눅12:22, 새 번역]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구절과 이어지는 구절은 이것입니다.
[눅12:31, 새 번역] 그러므로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절망이라는 감정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미래에 두려움을 가진 사람입니다. 미래에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할까, 굻어 죽으면 어떻게 하나 등의 두려움이 절망을 안겨 준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구원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미래가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고, 오히려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좋은 삶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진리를 알게 되면 인간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철학은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 너머에 존재하는 진리를 알려는 행위입니다.
나의 생각 너머, 나의 감정 너머, 우리의 무의식 너머에 존재하는 '실제로 존재하는 진리'를 탐색하고 알려는 시도입니다. 기독교 신앙 전통에서는 '묵상'이라고 하고, 일반 철학 전통에서는 '사유'라고 합니다.
다만 '사유'의 전통과 기독교 신앙 전통의 진리를 다소 다른 내용이 있기는 합니다.
철학을 배우는 이유는 우리 눈에 보이는 그대로, 내 감정이 느껴지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보다, 한번 더 곰곰이 생각하는 훈련을 하기 위함입니다. 단편적인 지식에 휘둘리는 삶을 살지 않고, 진리를 밝혀가며 그 진리를 알아가는 삶을 통해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에 더 나은 길을 제시하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