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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Aug 04. 2024

혼돈과 무의미에 대하여

포스트모던과 거대담론의 거부


인간은 목적이 있는가


사르트르의 철학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누구한테 속지 말고, 네가 옳은 데로 살아라'입니다. 

이 간단한 말을 하기 위해서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얘기는 실존이 본질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에 앞서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결국 이 말은 '본질이라는 것은 애당초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본질이라는 것은 '목적'이라는 말로 바꾸어 쓸 수도 있습니다. 


본질 = 목적 


본질이 없다는 말은 결국 목적이 없다는 것인데, 사르트르의 맥락에서 정확히 말하자면 '정해진 목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에 목적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마튼폰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망치도 목적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나무는 목적을 가지고 있나요? 강은 목적이 있나요? 


이렇게 보면 인간이 만든 것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보다 먼저 있던 것들은 '목적'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정해진 목적이 있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인간이 만든 어떤 종류의 물건들은 '인간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물건들은 그 의도를 따라 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내지 않은 자연과 인간 자체는 인간의 입장에서 어떤 목적이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물건 -> 목적이 있음 

자연과 인간 자체 -> 목적을 알 수 없음 


하지만, 자연도 인간이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목적이 '부여'되기도 합니다.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면 난방이라는 목적이 부여되고, 땅을 경작하면 수확이라는 목적이 부여됩니다. 

그렇다면 인간만이 무목적 상태에 남게 되는군요. ^^ 

왜냐하면 인간은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 역사에서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한 일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인간의 우주적 존엄성을 훼손하고, 하나의 도구로서 전락시킨 사례는 비일비재하지만 그것을 옳다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간은 다른 인간의 도구로서의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신자로서 기본적인 자격을 갖추도록 하기 위한(또는 자격이 있는지를 묻는) 절차가 몇 가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소요리문답'입니다. 소요리문답이란, 핵심적인 교리를 간단하게 묻고 답할 수 있도록 하여,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기독교에 여러 교파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교파인 장로교의 소요리 문답 1번은 다음과 같습니다. 


질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답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고전 10:31, 롬 11:36, 시 73:24~26, 요 17:22~24)


기독교는 인간의 목적이 존재하며, 그 목적은 하나님을 향해 있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인생의 의미라고 말합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태생적으로 무의미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삶의 목적을 설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두 말은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요? 


선한 의도를 이용하여 이득을 취함

앞서 소개한 소요리문답 1번에서는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이 궁극적으로 옳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가장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은 '그분이 허락하신 모든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이 부분은 잘못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것과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을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왜곡되게 해석하여 강요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것을 '교회를 영화롭게'하는 것으로 은근히 바꾸어 해석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일 수 있지만, 역사적 맥락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다른 교회의 뜻, 정확히는 교회 권력자들의 뜻이 있기도 했습니다. 신의 뜻이라고 하면서 사실은 자기 뜻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교회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이 젊은이들을 전쟁으로 내몰면서 '일본 제국을 위하여'라는 목적을 그들에게 부여하였지만, 결국 일본을 지배하는 몇몇 권력자들을 위한 것이었음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일본은 여전히 그들이 지배하고 있고, 일본 제국을 위하여 죽은 젊은이들은 '신사'에 모셔져 추앙을 받고 있지만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권력자들의 거짓말에 속은 것뿐입니다. 


이뿐 만이 아니죠. 나치에 속아 2차 세계대전으로 끌려 나온 독일의 젊은이들,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주장 등이 모두 올바른 가치, 목적을 왜곡되이 사용하는 예들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보통 사람들의 숭고한 뜻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거대 담론에 대한 반감 

거짓말하는 아버지 밑에서 큰 아이는 어른들을 믿지 않습니다. 행여 그 거짓말로 큰 고통을 받았다면 당연히 이를 악물고 속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20세기 프랑스의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프랑스 사람들은 왕, 귀족, 부르주아 등의 권력자들이 던지는 국민을 위한다느니, 자유와 평등을 위한다느니 하는 말은 번지르 하지만, 결국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거짓말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게 됐습니다. 

더군다나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이 결탁하여 거짓말을 해대면, 정신과 육체가 완전히 종속될 수도 있습니다. 조지 밀러 감독의 영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에서 우리는 이런 점들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세계가 종말을 맞이한 시대에 사악한 권력자 세 종류가 남습니다. 물, 에너지, 무기를 통제한 자들입니다. 물은 기본적인 생존을 통제하는 것이고, 에너지와 무기는 힘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지 밀러 감독은 물을 통제하는 자를 종교지도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을 통제하는 임모탄이라는 인물은 종교적 신화를 만들어 내고, 이를 통해서 군대(워보이)를 조직합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싸우다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속입니다. 


20세기 철학자들은 이런 점들을 염려했습니다.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저술한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 사회가 '거대 담론'에 반감을 가지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거대 담론이란 어떠한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야기(이데올로기)를 말합니다. 


저는 30대에 아프리카를 간 적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한국은 어떻게 전쟁 더미 위해서 성장을 했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선교사님들이 '한국의 성장'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저도 그 말에 동의가 됩니다. 완전한 폐허 위에서 지금의 문명사회를 일군 것은 '기적'이라는 말 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한국 근현대사에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거대 담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을 듣는 사람에게 종교적 열심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동일한 결과를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만약 아프라키 사람들도 우리처럼 새벽 기도하고, 여의도 집회처럼 다 같이 모여서 집회를 열고 기도하고 하면, 우리나라처럼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한국의 성장은 당시 역사적 상황과 미국의 무역 정책, 헤게모니 싸움 등의 여러 역사적 상황이 얽힌 결과이기에 기도만 한다고 재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경이 제시하는 진리성이 모든 영역을 회복하고, 바른 길을 제시하기에 종국적으로 기독교 신앙적 열심히 성공의 길로 인도할 수는 있지만, 마치 '이렇게 하니 저렇게 됐다, 그러니 너희도 이렇게 하라'라는 식의 거대 담론은 이것을 말한 종교지도자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는 있지만, 듣는 사람에게 정당한 보상을 하지는 못합니다. 

거대 담론은 그럴듯한 이야기이지만, 실제 돌아가는 현실세계와는 맞지 않고, 그래서 오히려 일부 사람들의 이익만을 대변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을 따르지 말고, 스스로 결정하라


사르트르가 주장한 '인생에 의미는 없다', '인간에게는 목적이 없다'라는 말은 단순히 "다 때려치우고 방구석에 누워서 살아라"라는 의도에 한 말이 아니라, 무엇이 본질인지를 정해주는 사람들을 순진하게 따르지 말고, 스스로 자기 인생과 삶의 의미를 '창조'하라는 의미입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삶이 의미가 있다', '이게 인생의 목적이다', '삶의 본질이란 무엇이다'라는 식의 주장은 대부분 거짓말로 판명이 됐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사회주의의 이상적 공산사회 실험'이 그렇습니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주겠다는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외침은 그 말을 한 ㄴ ㅗ ㅁ들만 평등하게 됐고,  그 말을 믿었던 모든 사람들은 더욱 불평등해졌습니다. 북한의 경우 김정은과 그의 가족, 그리고 측근들의 이익을 위해서 유지되는 국가일 뿐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들이 다시금 현대인들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권력자들을 믿지 마라', '지도자들을 맹신하지 말라'


이러한 반감이 광범위하게 퍼진 대표적인 사건이 프랑스의 '68 혁명'일 것입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도 맥락을 같이 합니다. 68 혁명 이후로 모든 대중문화는 거대담론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진행이 되어 왔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단순히 몇 가지만 생각해 봐도  금방 이해하실 것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 트루먼 쇼 등 

소설: 1984, 동물 농장 등

노래: 비틀스 이매진 등 


현대인들은 누군가가 목적을 가지고 정당화하는 이야기를 싫어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스스로 인생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 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을까요? 


혼란과 무의미 (Confused and aimless)

예수는 당시 군중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혼란스럽고, 무의미한 삶에 지친 사람들이 목자를 잃은 양 같다고 했습니다. 


[마 9:36, 새 번역]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보면 confused and aimless라는 단어를 사용해 혼란스럽고 무의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나옵니다. 


한때는 지도자들이 던지는 거대한 비전에 자신의 삶을 내던졌던 자들이 그것이 환상이고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차려, 이제는 누구도 믿지 않고 자기 스스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겠다고 각자 걸어가는 상황이 현대인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이 마저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합니다. 

이러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본주의의 물신 사상, 무한 경쟁'의 덫에 빠져 버렸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성공'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공하지 못하고 있고, '돈'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도 원하는 만큼 돈을 벌지 못하고 있습니다. 높은 지위에 올라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사람들도 그것을 이룬 순간 그것이 인생의 참 목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려 버렸습니다. 


이제 공동체는 무너지고, 삶의 의미도 상실한 사회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르트르가 말한 '무의미와 무목적'을 원래 의미와는 다르게 "원래 인생은 무의미한 거야! 아무런 목적도 없으니 소확행을 하며 살아야 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가 봅니다.


예수께서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신 군중들. 

그들은 혼란과 무의미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예수로 하여금 깊은 연민을 갖게 했습니다. 

예수는 그들의 모습이 '목자가 없는 양 떼 같다고 했습니다' 혼란스럽고, 무의미한 상태의 군중이었습니다.


인생의 의미는 스스로 찾을 수 없다


나만의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작은 공동체라고 그 안에 있어야만 인간으로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은 하나의 영적 경험입니다. 


마틴부버는 '나-너'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인간 실존을 표현했습니다. '나' 또는 '너'로는 인간을 온전히 표현해 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타자와의 연결을 통해서만 나라는 존재도 인식이 되며 타자를 통해서 의미 있는 존재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축구를 좋아합니다. 수원삼성 팬인데, 최근에 2부로 강등을 당했습니다. 아주 속이 쓰립니다. 

주로는 TV로 축구를 시청하지만, 가끔 운동장을 찾으면 수많은 팬들의 응원 속에서 웅장함과 짜릿함을 경험합니다. 이런 거대함의 일부가 되어버린 내가 좋습니다. 

이것은 영적 경험입니다. 영적 경험이란 '거대한 전체의 일부가 된 경험'을 말합니다. 


일본 제국주의나 나치 제국주의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들이 바로 '종교적 체험', '영적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와 권위자들에 실망한 인류는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겠다고 나섰지만, 결국 돌아갈 곳은 공동체 밖에 없고, 더 높은 층위에서는 '영원성', '무한함'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홀로 떠난 여행은 외롭고, 비루하며, 빈손으로 돌아오는 여행입니다. 


인간은 목적과 의미를 갈망한다

인간은 아무리 거부하더라도 목적과 의미를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방향에서 정해진 목적은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보이지 않으니 없다고 얘기를 한다 해도 크게 반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메타적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어쩌면 이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내 삶의 목적과 의미의 무늬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했는데, 그 예수가 나에게 보여주는 길, 진리, 생명은 무엇인지를 발견하며 살아가는 인생은 혼란과 무의미가 아니라, 희망과 의미 있는 삶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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