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그(langue)와 빠롤(parole)에 대하여
제가 소속되어 있는 대안학교인 '서산 꿈의학교'는 '꿈이름과 존대어'라는 것을 사용합니다.
모든 공동체가 이를 철저히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교육의 지점으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꿈이름과 존대어를 쓰는 이유는 서로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존귀한 서로에게 그에 걸맞는 언어를 사용함으로 격을 맞추어 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꿈이름, 존대어를 사용함으로 비속어나 욕설 사용을 방지하며, 서로를 대하는 태도와 마음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1990년대에 미국 뉴욕시가 채택한 치안회복모델이다, 건물의 유리창이 깨진 채 방치되면 누구도 관리하지 않는 건물이라고 생각되어 낙서, 쓰레기 불법투기 등의 불량의 온상이 되고 경미한 범죄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일반주민은 불안하여 그곳에 가지 않게 되고, 한층 질서가 문란해져서 흉악범죄가 다발하게 된다. 즉, 폐를 끼치는 행위, 경미한 범죄를 묵과하면 그것이 에스컬레이트되어 흉악범죄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경찰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대수롭지 않은 행위로부터 단속하고 지역주민도 이것에 협력함으로써 치안이 회복될 수 있다는 방범 이론이다.
깨진 유리창의 이론의 이런 경향은 간단한 실험을 통해 알 수 있다. 구석진 골목에 2대의 차량 모두 본넷을 열어둔 채 주차시켜두고, 차량 한 대에만 앞 유리창을 깨져있도록 차이를 두고 일주일을 관찰한 결과, 본넷만 열어둔 멀쩡한 차량은 일주일 전과 동일한 모습이었지만, 앞 유리창이 깨져있던 차량은 거의 폐차 직전으로 심하게 파손되고 훼손된 결과를 보여주었다."
출처: https://ulsansafety.tistory.com/1144
우리 학교는 언어에도 이러한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 적용된다고 생각하며, 꿈이름/존대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언어 습관을 통해서 서로를 대하는 마음에 영향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깨진 유리창 이론에 근거한 꿈이름/존대어 사용을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과 연결하여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의식이 말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아이디어입니다.
전통적으로 인류는 생각이 먼저이고, 말이 나중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소쉬르는 반대로 생각을 했습니다.
구조가 먼저이고, 그 구조 안에 말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그 말에 의해서 인간의 의식이 영향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즉 언어구조가 먼저이고, 의식이 나중이라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하나의 단어는 하나의 이데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후기에 가면 이러한 생각에 변화가 오기는 합니다) 우리 눈앞에 있는 '말(a horse)'은 '말(Horse)'이라는 관념(이데아)과 연결되어 정확히 서로 대응합니다. 이미 말이라는 '실재'가 존재하며 그것에 해당하는 개별 '말'과 대응하는 것이죠.
물론 '말'을 '감자'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실체와 개체를 연결하는 것으로서의 언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최초의 아이디어는 세상 만물이 하나의 근원(일자)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게 한 원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에 앞선 원인이 존재하죠. 그렇게 추적해서 올라가다 보면 최초의 원인이 있게 됩니다. 그 최초의 원인으로부터 모든 것이 생성되었는데, 최초의 원인이 되는 그것은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질도 그 원인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이상학적 관념이 물질보다 앞선다는 생각은 일반적으로 무언가 새로운 것이 창조될 때 머릿속의 이미지가 먼저이고, 이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과정을 염두해 둔 것입니다)
세계의 생성 과정을 이러한 방식으로 바라보면, 관념이 개체보다 먼저 생긴 것이 분명하고, 먼저 존재하는 관념적 실재를 말로서 정의해내는 작업이 언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어는 대응하는 하나의 관념을 가지게 됩니다.
반면 중세의 '유명론자'들은 이와는 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명론(nominalism)이란, '단어들은 개별 사물을 지칭할 뿐, 그에 대응하는 보편자(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말은 말일뿐 그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유명론자들은 이런 대단해 보이지 않는 주장을 왜 한 것일까요?
중세의 스콜라(학문을 연구하는 집단) 전통은 플라톤 철학을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관념이 다른 세계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는데요.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실 때, 그분 안에 있는 그분의 생각을 물질을 통해서 구현해 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관념은 실제로는 하나님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명철한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간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유명론자들이 보기에 스콜라 학자들이 진리라고 만들어 내는 체계는 터무니없는 것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스콜라 철학자들은 오직 이성을 통해서만 진리를 발견하려고 했는데, 그러다 보니 소위 '뇌피셜' 같은 것이 대단한 학문인 것처럼 소개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검증되지 않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이기만 한 중세의 스콜라 전통과는 달리, 인간은 진리 앞에서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주장이 유명론에 담겨 있었습니다.
유명론자로는 오컴의 윌리엄 대표적인데,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관념은 실재와는 무관하고 오직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개별 사물(개체)로부터 추상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적인 대상이 되는 초월적인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으며, 오직 믿음을 통해서 받아들여 알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안셀무스가 말한 'Credo ut intelligam' 즉, '믿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진리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적용하여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유명론자들에게 '언어'는 사물을 지칭하는 기호이며,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도구일 뿐입니다.
소쉬르는 유명론적인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는 언어란, 초월적 실재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어는 '의사소통이 필요성' 때문에 생겨난 것이지, 사물을 지칭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아담이 하나님이 지으신 다양한 동식물에 이름을 지어주면서 언어라는 것이 생겨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쉬르는 언어가 사물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소통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호는 집단적이거나 사회적이며 따라서 한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서로 소통될 수 있다. 이것은 기호가 자의적이면서 동시에 시차적 시스템이라는 점을 함의한다. 언어 기호의 집단성, 의사소통 가능성, 자의성, 차이성 등의 특질은 소쉬르 언어 이론의 중핵이라 할 수 있다."
페르디낭 소쉬르(1857-1913)는 스위스의 언어학자로 근대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조로 불립니다. 그의 이론이 프랑스 철학자를 통해서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을 탄생시키는 배경이 되어 그를 구조주의 철학자의 시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는 전통적인 언어 이론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사람입니다. 칸트가 자신의 초월적 인식론을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라고 표현했듯이 언어학에서 소쉬르는 칸트와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관념과 언어는 뗄래야 뗄 수 없는 필연적인 대응을 한다고 생각한 전통 관념을 버리고, 모든 것은 자의적이고, 차이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차근차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전통 언어학은 관념과 언어의 관계성을 밝히는데 주력하였습니다.
소쉬르는 관념과 언어는 아무런 필연적 관계도 없으며 언어는 단지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단적으로 만약 세상에 사람이 딱 한 사람만 있다면 언어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와도 소통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생기면 소통의 필요성이 생깁니다. 앞에 놓인 사과를 지시하며 전달해야 하는데, 입을 열어 말하지 않고는 사과를 소통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어! 어!'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장 단순하게 말이죠. 하지만 그 옆에 '배'가 있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어! 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사과를 향해 '어! 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아! 아!'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점점 더 많은 사물을 지칭하다 보면 단어와 단어 간에 '차이'를 중심으로 합리적인 체계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소쉬르의 '차이성'입니다.
하나의 체계는 본질적인 무엇과 일치하느냐 문제가 아니라, 개체들끼리 상호 차이를 낼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즉, 어떠한 존재가 본질적으로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저 상호 간에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저 '차이'만이 존재한다는 말은 철학적으로 상당한 파장을 불러 일으키는 말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위계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어떠한 행동이 본질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그저 어떠한 이익을 위해 상호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또 언제 어떠한 이유로 그 위치가 바뀔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랑그와 빠롤'이라는 개념을 소개했습니다.
인간은 소통하기 위해서 언어를 만들어 냈으며, 효율적인 소통을 위해 '차이의 체계'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러한 차이의 체계가 '랑그langue'입니다. 이를 문법 체계, 언어의 규칙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체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는 과정에서 단어와 단어 속에 존재하는 차이의 체계를 통해서 습득하여 이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랑그'는 우리의 말을 지배하는 원리입니다. 의미가 전달되는 말은 모두 랑그의 통제를 받게 됩니다. 아니, 랑그가 허용하지 않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식도 랑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최초로 소통을 시작한 사람들에 의해서 구축되기 시작한 랑그는 문화인류학적으로도 의미를 갖게 됩니다. 현존하는 랑그는 단순히 말의 규칙을 넘서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축적된 지식이며,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드러내고, 의식을 지배하는 원리입니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의 핵심 주장은 '인간의 의식은 구조의 산물'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독립적 이성을 소유하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구조의 영향 하에 있는 수동적 사유 존재라는 것입니다.
소쉬르의 랑그는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의 탄생에 기틀을 마련해주었습니다.
랑그의 규칙 하에서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하는데, 이를 '빠롤parole' 이라고 합니다. 이는 구체적인 말하기 행위(발화)입니다. 입을 벌려서 소리를 내는 것이죠.
또한 '시니피앙sinifiant'과 '시니피에sinifie'의 개념이 있습니다.
시니피앙은 표현되어진 기호라면, 시니피에는 그 기호가 의미하는 이미지(의미)입니다.
우리가 사과를 지시할 때 '사과'라는 단어는 시니피앙이 되고,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과의 이미지'는 시니피에가 됩니다.
이때 중요한 소쉬르의 주장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우연적으로 결합'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과'라는 기호와 '사과의 이미'는 어떠한 유사성도 없이 그저 차이의 체계 안에서 생성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유명한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가 이 둘의 관계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그림 속의 대상물은 사과입니다. 하지만 그는 사과가 아니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사과라는 단어와 사과라는 대상물은 우연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내가 나의 작품 세계 안에서 그 관계를 다시 정의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이것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이라는 세계 또는 '필연'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그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우연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인간의 의식은 이미 구축된 언어 규칙에 영향을 받으며, 특정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부터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랑그'에 의식이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아이디어가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의 기반이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