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flix 드라마 <지옥>을 통해 바라보는 '해석'의 문제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이 공개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관점에서 드라마를 바라볼 수 있겠지만, 오늘은 '해석'의 문제를 다뤄보겠습니다.
"모든 해석은 개인의 내면에서 나오는 순간 다른 해석과 갈등한다. 해석이 집결하는 사회적 마당에서는 해석들 간에 힘의 대결이 일어난다. 어떤 문제에 대한 해석이든 해석에는 늘 시비가 따라붙는다. 해석이 자유롭게 순환되는 사회를 두고 우리는 ‘열린사회’라고 한다. 1) 롤랑 바르트
모든 다른 해석을 장악하고 해석을 지배하는 자가 권력자이다. 중세도 그러했지만 현대에도 그러하다. 해석이 오로지 하나로 통일된 나라는 독재국가다. 다른 해석이 허용되지 않는 학문은 발전할 수 없다. 이런 권력을 ‘해석 권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박인기 경인교대 교수
한 대선 후보의 태도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습니다. 평소에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습관 때문입니다.
대선 후보와 쩍벌 다리와 무슨 연관성이 있기에 이토록 관심을 받는 것일까요?
뭐... 보통 사람보다 다리를 많이 벌리고 앉기는 하는 것 같습니다. 다리를 어깨보다 더 넓게 벌렸습니다. 보기에 그리 아름답지는 않죠? 그렇다고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분명 해당 후보자의 행위는 평범한 행위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이죠. 물론 장소에 따라 불편한 행동일 수도 있지만, 좀 예의가 없다 정도이지, 특별한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후보자의 이러한 행동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덧붙였습니다.
소위 '쩍벌 다리'의 후보는 강압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인물이며, 그러한 태도는 여전히 고쳐지지 않았다. 이런 후보가 과연 국민들을 잘 섬길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기사를 적었습니다.
'쩍벌 다리'라는 하나의 현상에 특별한 해석을 붙이니, 그 해석이 여론을 형성하고, 권력 형성에 영향을 주게 된 것입니다.
넷플리스 시리즈 <지옥>은 현상과 해석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현상'과 '해석'이라는 기본적인 구분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상은 실제로 우리 눈앞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해석은 그 사건에 대한 견해입니다.
현상과 해석이 일치할 때 그것은 진리가 됩니다.
하지만 모든 해석이 진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악의를 가진 해석이 난무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날 알 수 없는 어떤 존재가 나타나
"너는 2021년 11월 24일 오후 2시에 지옥에 간다" 라며 죽음을 고지합니다.
해당 일자에 괴생물체가 3마리가 나타나 고지받은 사람을 잔인하게 폭행한 후 뜨겁고, 빛나는 무언가로 태워버립니다.
딱, 여기까지 일어난 현상(Phenomenon)입니다.
드라마에 정진수(유아인 분)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보육원에서 자란 그는 '새 진리회'라는 종교단체의 창시자입니다. 그들은 고지와 시연이 '죄를 지은 인간'을 향한 신의 경고이며, 회개하지 않으면 더 큰 재앙이 미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새 진리회의 경고에 사람들은 공포에 떱니다.
하지만 새 진리회 의장인 정진수 본인도 20년 전에 고지를 받았습니다.
"너는 앞으로 20년 후 오후 22시 30분에 죽는다. 그리고 너는 지옥에 간다."
자신이 지옥에 간다는 예언을 들은 정진수는 극심한 공포 속에서 자신이 지옥에 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이미 '해석'이 발생했습니다.
정진수는 '지옥'이라는 단어를 '죄가 있는 사람이 가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해석했으며, 자신이 지옥에 간다면 자신에게 어떠한 죄가 있을 것이라는 해석을 한 것입니다.
다음은 정진수의 독백입니다.
"지옥에 간다는데 어떻게 죄가 없을 수 있어요?
저는 정말로 연필 한 자루도 훔친 적이 없었어요. 거짓말도, 남에게 상처 준 적도 없었어요.
착하게 살면, 울지도 않고 얌전히 있으면 엄마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고요.
신이 왜 그런 괴이한 일을 벌인 걸까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생각했어요.
근데 알 수가 없었어요. 이런 기괴한 일이 벌어지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면 사람들이 버틸 수 있을까요?
아마 엄청난 폭동과 정신적인 공황이 찾아올 거예요.
이유가 있어야 해요. 이런 기괴한 일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벌어지고 있다.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일어나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확실한 악인이 지옥에 가는 것처럼 만들어야 했어요.
저는 예언을 들은 후로 지금까지 공포에 시달려 왔어요.
20년 동안의 공포가 어떤 건지 아세요?
끊임없는 공포예요. 죄를 지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다른 사람의 죄를 방관할 수 있다는 공포!
저는 그 공포 때문에 더 바르게 살 수 있었어요.
저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이 공포를 선사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공포는 세상을 전보다 훨씬 더 정의롭게 만들 거예요.
그 공포가 세상 사람들을 죄에서 해방시킬 거예요."
누구라도 '지옥'이라는 단어를 듣는다면 달리 해석할 방법은 없을 겁니다.
'지옥에 간다'는 말은 '너에게 죄가 있다'는 말과 동일한 말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고지를 '죄인에게 내리는 벌'로 해석한 정진수는 자신의 해석을 적극적으로 퍼트립니다.
시연 동영상과 그에 대한 해석을 담은 정진수의 콘텐츠는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퍼지고,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듭니다.
곧 새 진리회라는 종교가 창시되고, 많은 사람들이 혹 자신에게도 고지가 내려지지는 않을까를 두려워하며 새 진리회의 해석에 정신적 노예가 되어갑니다.
하지만 정진수의 해석이 과연 옳은 해석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며 스토리는 전개됩니다.
방송국 피디(박정민 분) 부부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납니다.
너무나도 예쁘고, 천사라고 해도 될 만큼 사랑스러운 갓난아이입니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행복해합니다.
그 순간 어떤 존재가 아이에게 나타나 지옥행을 고지합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갓 태어난 아기가 고지를 받았다?'
이 현상은 '새 진리회'의 해석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새 진리회는 '죄를 짓은 사람'만이 고지를 받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사건이 세상에 밝혀진다면, 새 진리회가 가지고 있던 '해석 권력'은 붕괴될 것입니다.
현상과 해석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드라마에서 새 진리회 조직원들은 폭력을 동원하여 이 아기를 죽이려고 하고, 이를 피해 해석 권력을 무너트리려는 시도가 벌어집니다.
1517년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한 해입니다.
중세의 붕괴? 또는 근대의 서곡을 '르네상스'로 보는 분들이 많이 있지만, 진정한 근대의 시작은 종교개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 서구 사회는 개인이라는 존재에 눈을 뜨기는 했지만,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개인은 누군가의 소유였으며, 심지어 하나님(신) 앞에서도 인식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개인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의 사제를 통해야 했습니다. 가톨릭의 고해성사가 비슷한 경우입니다.
개인은 성경도 소유할 수 없었고,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런 개인이라는 존재가 '종교개혁'을 통해서 신 앞에서 인식되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존재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됩니다. 더불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어 성경을 소유하고,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교회의 사제가 성경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받은 제자들과 초대 교회는 이단 사설로부터 말씀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권위 있는 사람만이 말씀을 해석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교회가 권력을 소유하고, 지배적 지위를 누리게 되자, 말씀을 사사로이 해석하는 일이 발생하며, 더 나아가 이익을 위해 말씀을 왜곡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한 성직자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틴데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교황의 법 없이 사느니, 차라리 하나님의 법 없이 사는 게 낮지"
교황의 권력을 중심으로 한 중세 권력은 성경을 교리의 시녀로 만들어 버리며, 해석의 권력을 독점하였습니다.
1409년에 글로스터에서 태어난 윌리엄 틴데일은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려고 했습니다.
라틴어는 당시 유럽에서도 사용되지 않던 언어였는데, 유독 로마 가톨릭에서는 라틴어 성경만을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일반인은 물론, 목회자 조차도 읽을 수 없는 라틴어 성경은 자연스럽게 권력관계를 만들어 냈습니다. 라틴어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의 해석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틴데일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성경을 번역하려 했으나, 당시 교회에 의해 화형을 당해 죽었습니다.
틴데일에 앞서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위클리프는 그 시체가 꺼내져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해석 권력과 관계하여 중세의 교회는 그것을 독점하여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에 사람들이 머무르도록 했으며, 진리를 수호하기보다는 오히려 진리를 몰아내는 행위를 하고 말았습니다.
독일의 종교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해석학적 순환'을 최초로 정립한 사람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의 해석학적 순환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의 텍스트와 같은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은 그 전체를 이루는 개별 부분들에 자국을 남긴다. 따라서 부분들은 전체를 바탕으로 해서 이해되어야 하며, 전체는 부분들의 내적 조화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석학의 핵심은 텍스트의 배후에 있는 개성적이고 독특한 영혼의 내용에 스스로를 이입하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해석학의 지향점은 일차적으로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 배후에 있는 창조적 정신이었습니다. 그는 해석학은 우리와 텍스트와의 역사적 거리를 극복하는데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어떤 텍스트를 읽을 때 그 텍스트가 발생한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자와 텍스트의 지적 지평 horion 속에 우리 스스로를 이입하는 것이다."
해석이란 현재의 우리와 텍스트가 속해 있던 당시 역사/문화가 만나 상호 순환을 이루는 것이며, 부분의 해석은 전체 속에서 또다시 순환하며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드라마 <지옥> 속에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해석'도 전체와 부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떨까요?
현상에 대한 해석을 모두 받아들이지 말고, 커다란 틀 안에서 평가해본다면 그 해석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고지나 시연 같은 현상이 부분이라면 '전체'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이 전체라는 것은 부분을 해석하기 위한 '기준'이 되는 전제입니다.
저는 모든 역사를 관통하며 살아있는 가장 큰 틀의 전제는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현상은 이러한 큰 틀에서 해석되어야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Neflix <지옥>에서 '잘못된 해석'이 발생합니다. 그 부분을 짚어보겠습니다.
1) 죽음을 고지한 존재는 천사이다 -> 과연 천사가 맞는가?
2) 지옥행을 고지받은 사람은 죄인이다 -> 죄인이란 무엇인가?
3) 시연은 신의 경고이다 -> 과연 그런가?
중요한 해석의 부분에서 적어도 3가지 이상 명확하지 않은 해석의 부분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명확하지 않은 부분을 '정진수 의장'과 '새 진리회'는 자기식대로 해석하고, 그것인 진리인 양 공포심을 심어주어 사람들을 조정했습니다.
만약 내가 저 상황 안에서 있었다면, 어떤 해석을 했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입장에서 해석을 해보겠습니다.
1) 죽음을 고지한 존재는 천사이다 -> No! 성경의 천사와 일치하지 않는다.
저는 죽음을 고지한 존재가 사탄이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메시지를 전달하실 때는 2가지 형식을 취했습니다.
- 좋은 소식을 전할 때: 하나님의 천사를 통해서 전달되었다.
- 경고의 메시지를 전할 때: 인간인 선지자를 통해서 전달되었다. (말씀이나, 꿈이나, 환상 등을 통해서)
즉, 하나님께서는 좋은 소식은 천사를 통해서, 경고의 메시지는 '선지자(인간)를 통해서 전달하셨으므로, 나쁜 소식을 전하는 신비적 존재는 성경 속의 천사라 볼 수 없습니다.
2) 지옥행을 고지받은 사람은 죄인이다 -> No! 누구나 회개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행여 고지가 신의 경고라고 할지라도, 성경은 '참으로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은 누구나 '악한 본성'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너희는 죄인이니 지옥에 가라'라고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죽음을 통해 모든 죄가 용서되었으며, 그 사실을 받아들임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 시연은 신의 경고이다 -> No! 신은 공포를 통해 회개를 종용하지 않는다.
드라마 중간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형사: 뭐, 뜯겨 죽을까 봐 선하게 산다. 그걸 정의라고 할 수 있나요?
정진수: 공포가 아니면 뭐가 인간을 참회하게 할 수 있나요? 형사님은 그런 것을 보신 적이 있으세요?
형사: 말씀대로라면, 그 신은 인간의 자율성을 믿지 않는가 보네요.
정진수: 형사님 참 재밌는 이야기를 하시네요. 자율성이라...
성경의 하나님은 공포를 이용해서 인간을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한 하나님은 그 자유의지를 소중히 여겨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극복하는 방법을 선택했다는 것이 성경의 설명입니다.
그런 신이 시연이라는 방법으로 인간에게 공포를 주고, 인간을 굴복시켜 잘못을 뉘우치게 했다는 사실을 저는 믿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성경의 큰 틀도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성경의 하나님은 공포를 통해 회개를 종용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고, 존엄하게 여겨 자기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 신이십니다.
물론 여기에도 잘못된 경험이 있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세월호 사건'때 일부 교계 인사들이 세월호 사건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부의 견해일 뿐이지만, 성경의 정신을 왜곡한 잘못된 처사라 생각합니다.
<지옥>의 정진수 의장은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사회 전체는 정진수 의장의 메시지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올바르게 해석하고 행동했어야 합니다.
'고지'와 '시연'이라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도 우리가 이루어내야 하는 것은 서로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기독교의 가장 큰 가르침은 '사랑'입니다. 예수께서도 가장 큰 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을 사람함은 이웃을 사랑함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며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행위의 가장 큰 기준이 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역사 속에서 기독교는 큰 과오를 범하였습니다.
다음은 '스페인 종교재판'에 대한 서울경제신문의 내용입니다.
1834년 7월 15일, 스페인 전역에서 종교재판소(the Holy Office of the Inquisition)가 문을 닫았다. 1478년 설립된 지 356년 만이다. 중세 유럽의 종교재판소 중에서도 스페인 종교 재판소는 가장 악명 높았다. 프랑스에서 이단 혐의로 구금된 한 성직자가 꿋꿋한 태도로 죄목을 부인하다 ‘스페인 종교재판소로 보내겠다’는 위협에 겁먹어 없는 죄까지 털어놓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수백 개의 창날이 박힌 작은 상자인 ‘올드 아이언 메이드(old iron maid)’라는 고문 장치에 들어가면 결말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고 한다. 자백하거나 죽거나.
애초부터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다른 곳과 달랐다. 일단 출발이 늦다. 간헐적으로 치러지던 종교재판이 처음 생긴 시기는 1233년. 남부 프랑스에서 세를 넓혀가는 카타리파(알비파·비잔틴 제국에서 박해를 받아 유럽으로 이주한 기독교의 분파로 이원론과 영지주의, 극단적 금욕생활을 강조해 이단으로 몰렸다)를 처단하기 위해서다. 알비 십자군(1209~1229)을 일으켜 카타리파 신도 20만 명 이상을 학살하고도 근절되지 않자 교회는 세 가지 대책을 새로 내놓았다. 설교 강화와 수도회 신설, 그리고 종교재판. 초기의 종교재판은 알비파처럼 청빈과 순결, 금욕을 강조한 도미니크 수도회가 맡았다.
카스티야의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의 왕자 페르디난도 2세 간 혼인(1469)으로 형성된 스페인 연합왕국은 1478년 교황 식스토 4세에 청원해 종교재판소를 열었다. 심판은 교회가 아니라 스페인 왕실이 직접 맡았다.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 왕국이 여전히 남쪽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스페인은 종교재판을 유대인과 무슬림을 솎아내고 북유럽 신교도의 유입을 막는데 써먹었다. 개종 안 하면 내쫓고 가짜로 개종하면 종교재판으로 처단해버렸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시절 가톨릭과 유대인, 무슬림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스페인 지역은 ‘신앙 때문에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지옥’으로 바뀌었다.
희생자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다. 화형만 3만 1,912명이며 전체 희생자가 30만 명 이상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희생자가 200만 명 이상이라는 주장과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숫자’라는 반론이 상존한다. ‘스페인의 종교재판 12만 5,000여 건 가운데 사형 판결은 1.8%(2.250명)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통계를 떠나 종교의 이름을 빌린 재판이 반인 간 적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사람을 구분해 차별하고 굴종과 죽음까지 강요하던 악행은 우리 주변에서 사라졌을까. 3)
이뿐만 아니라 십자군 전쟁도 역사 속에서 회자되는 기독교의 과오입니다.
사랑의 종교가 사랑을 위해서 폭력을 행사한 아이러니한 사건입니다.
<지옥>에서 누군가가 '지옥'을 고지받고 죽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 가족을 위해서 울어주며, 위로하는 모습이 인간적인 모습이지, 그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당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폭력 등의 행위가 동반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을 놓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랑을 받는 존재이며, 존엄하다는 큰 전제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3) 출처 : https://www.sedaily.com/NewsVIew/1Z5AUMZIG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