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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Jan 22. 2022

우리는 다시 '아우라'의 세계로

발터베냐민의 아우라와 NFT에 대하여

제가 쓴 글 중에서 꾸준한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글이 하나 있습니다.

발터 베냐민의 '아우라'에 대한 글인데요.

https://brunch.co.kr/@freeman3102/37

https://brunch.co.kr/@freeman3102/38

저는 주로 철학/인문학 관련 글을 쓰기 때문에 폭발적인 조회수보다는 꾸준한 조회수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근데 유독 '아우라'에 대한 글이 조회수도 많이 나오고, 꾸준하기도 해서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2021년 4월 20일 루이비통은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서 '블록체인' 플랫폼 사용을 예고했습니다.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Aura 블록체인을 활용한 'Aura 블록체인 컨소시엄'을 결성한다고 합니다.

NFT (non-fungible token)는 명품의 생산과 판매 그리고 재판매에 관련한 모든 이력을 수정 불가능하게 관리함으로써, 명품이 명품 되게 하는, 명품이 지닌 아우라의 파수꾼 역할을 하는 블록체인 기술입니다.

명품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작품들도 NFT 기술을 통해서 판매되고 있으며, 유일한 디지털 예술로서 아우라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명품 회사들은 가짜 명품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왔습니다.

일명 짝퉁 상품들의 기술력도 나날이 발전하여 명품과 질적인 측면에서의 차이가 대단하지 않은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었죠. 어찌 보면 '명품을 소유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차피 똑같은 가죽, 똑같은 디자인, 똑같은 품질이라면 굳이 명품을 소유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죠.


하지만 분명히 다르죠.

명품은 명품이고, 짝퉁은 짝퉁입니다.

그러면 명품을 명품으로 만들고, 짝퉁을 짝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아우라(Aura)입니다.

아우라는 제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품의 아우라는 역사, 다른 말로 하면 이력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동일한 제품이라 하더라도 어떠한 역사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아우라를 갖게 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완전히 똑같이 만든 제품이라 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역사/이력을 갖지 않으면 거기에는 Aura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제품에 하자가 있더라도 명품은 아우라를 갖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발터 베냐민의 아우라에 대한 글을 쓰면서 풀리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발터 베냐민은 '기술복제 시대'에 원본에 대한 아우라가 무너질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이야기입니다. Google Art&Museum 프로젝트를 통해서 우리는 루브르에 가지 않고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볼 수 있고, 얼마든지 프린트해서 내 방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진도 이미지 하나를 구매하면, 여러 장 프린트해서 소유할 수 있기에 과연 '원본'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 맞기는 합니다.

그러면서도 궁금했던 것이 "그럼에도 여전히 원본 모나리자의 값은 점점 더 오르는 걸까?"였습니다.

모작을 소유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원본에 대한 열망은 더욱 강해져 가는 현상이 '아우라의 몰락'이라는 말을 부정하는 듯했습니다.

결국 지난 글의 마무리도 '정말로 아우라가 몰락했는가'로 결말을 맺었습니다.


아우라의 몰락과 관련한 가장 중요한 시사점은 우리가 '탈 권위주의', '탈 중심주의'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것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근대사회와 이성주의'를 비판하며, 새로운 시대는 '리좀 구조'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은 감자를 캐는 날. 어린 K는 하얗고 둥근 감자를 캐고 싶어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호미를 들고 아버지보다 앞장서 밭으로 나갔다. 감자나 고구마의 땅 속의 줄기와 뿌리는 땅 위의 줄기와 다르다. 이런 형태를 리좀이라고 한다. 한편 나무는 좌우대칭의 질서 정연한 형태로 줄기가 배치되어 있다. 이것을 수목 구조라고 한다. 고대나 중세도 그랬지만 특히 근대사회는 수목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군대처럼 질서화되어 있고 피라미드처럼 체계적이다. 이 수목 구조와 반대되는 개념이 리좀 구조다. 식물학에서 말하는 리좀은 땅속에서 수평적으로 뻗어있는 구근(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 형태의 뿌리를 말하는데 형태상으로는 땅에서 하늘로 향하지 않고 땅에서 땅속을 향하고 있다. 또한 리좀은 수목(Arbolic) 구조와 달리 계층화, 구조화되지 않고 중심이 없으며 모든 것이 중심인 열린 구조이다." 1)


리좀 사회는 수평 지향적 사회로서 탈 권위주의와 탈 중심주의를 지향합니다. 이러한 탈 권위, 탈중심 사회와 '아우라'의 몰락은 맥을 같이 합니다. 아우라는 결국 원본이라고 하는 중심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기술복제'가 가능한 시대에 이러한 중심성은 무너지고, 거리감은 소멸된다는 것이 지난번 저의 글의 요지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인간은 '아우라'를 몰락시킨 것이 아닙니다.

'아우라'를 몰락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아우라가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우라가 존재하는 한 내가 아우라가 될 수 없기에 '아우라'를 몰락시켰지만, 나를 아우라 되게 해 주는 아우라를 다시 복원시켜 그것을 소유함으로 나 자신이 아우라가 되고자 했던 것이 기술복제 시대의 큰 흐름이었습니다.

발터 베냐민이 말한 '아우라의 몰락'과 '거리감의 소멸'은 어느 지점에서는 맞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우라를 몰락시키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아우라를 소멸시킬 마음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간절히 스스로가 아우라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거리감을 유지한 채 고고하게 존재하던 '아우라'가 몰락한 시대!

하지만 그것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파편으로 나누어져 누구나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시대로 전환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명품'에 열광합니다.

명품 판매 관련 기사

명품을 소유함으로 자신의 정체성, 사회적 위치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는 명품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를 소유함으로 스스로 아우라가 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결국 우리는 다시 '아우라'의 세계로 진입했습니다.

NFT 기술은 이력을 증명해줌으로써 더 많은 '아우라'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이력/역사를 증명한다는 것은 원천(origin)을 밝혀 그것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명품의 구매는 그 상품이 가지고 있는 원천을 구매하는 것이며, 그 원천에는 보이지 않는 가치가 숨겨져 있습니다. 장인의 열정, 가치관, 노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유명한 마케팅 강의가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역사상 가장 마케팅을 잘한 회사가 나이키라고 말했습니다.

"Come on! Nike sells commodity"

잡스는 나이카는 그저 신발을 파는 회사이지만, 위대한 회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가치 value'에 집착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신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위대한 선수와 위대한 경기에 대해서 이야기했기 때문에 '나이키는 그저 신발 파는 회사가 위대한 가치에 참여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나이키 신발을 살 때 신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이키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소비하는 것입니다.


NFT 기술은 그동안 보여줄 수 없었던 고유한 가치를 드러내 줍니다. Invisible 한 가치를 Visible 하게 만든 것이죠. 짝퉁 상품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명품에 담긴 보이지 않는 가치를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샤넬 가방 자체는 보여줄 수 있지만, 그 가방이 가지고 있는 역사는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에(위조가 가능해서) 짝퉁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NFT 기술로 Invisible 한 Value를 Visible 하게 할 뿐 아니라, 복사가 불가능하게 되어 가치의 원천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다시 '아우라'의 시대로 들어갑니다.

현대 기술이 무너트린 아우라를 다시 현대 기술이 복원시키고 있는 아이러니의 시대입니다.

어쩌면 다시 르네상스가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술작품이 보호를 받고, 온라인 상에서 거래가 되는데, 원본에 대한 감정이 쉽고, 유통도 빠른 시대가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인문예술과 자본주의가 조우하는 시대가 되는 걸까요?



1) http://seebangart.com/archives/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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