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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Jul 19. 2021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에 대하여 1

제의가치에서 전시가치로의 전환

발터 벤야민(1842-1940)

발터 벤야민은 유대계 독일인입니다. 그는 마르크스 주의자로서 문학 평론가이며, 철학자였습니다.

발터 벤야민

벤야민은 성공한 사업가의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골동품 거래로 큰돈을 벌었습니다.

1905년 튀링겐에 있는 진보적 교육기관 하우빈다에 진학하여 청년운동의 지도자 구스타프 비네켄을 만났습니다. 그 영향으로 부르주아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곧 이에 염증을 느끼고, 유대교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절망 속에서의 구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벤야민은 유대 정신이 위기에 처한 유럽 문화에 자양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벤야민은 프리랜서 작가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식인이 프롤레타리아의 대변자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겐 지식인에게 열린 실천의 길은 글쓰기뿐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신의 창조를 이어받아 사물의 이름을 명명하는 일을 했던 아담의 사역처럼,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망각된 사물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는 일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


발터 벤야민의 인생을 관통하는 주요 주제는 '자유'였으며, 근대 기술이 어떻게 인간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그의 철학에 나타나있습니다. 그는 '아우라'라는 개념이 어떻게 특정한 대상으로부터 해방되어 무수한 개별자에게로 옮겨져 소멸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이러한 아우라의 몰락 과정은 단순히  예술작품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발터베냐민의 주장입니다. 그는 아우라의 몰락 과정과 같이 기존 권력이 어떻게 특정 소수로부터 민중에게로 전이 되었는지, 또는 전이 되어야만 하는지를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아우라

아래 그림은 중세의 이콘 중 하나인 <성모>입니다. 자세히 보면 성모의 머리 주변에 둥그런 원이 감싸고 있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머리 주변에 둥그런 원은 그림 속의 인물이 특별한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성모>

성모와 아기 예수의 머리에 있는 둥그런 원은 '아우라'의 일종입니다.


요즘 '아우라'라는 단어는 일상어가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있는 특별한 분위기 또는 다른 사람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 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됩니다. 요즘 중고생들이 많이 사용하는 '스웩'이라는 단어도 일종의 '아우라'를 지칭하는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술작품 속의 아우라(aura)

'아우라(aura)'라는 단어는 '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αύρα로 부터 유래하였습니다. 1930년대 발터벤야민이 예술과 관련해서 사용한 개념인데, 앞서 설명한 바가 같이 본래 아우라라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벤야민은 예술작품 속의 아우라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멀리 있음'과 '가까이 있음' 그리고 '지금'이라는 시간적이며 공간적인 범주로 아우라를 설명했습니다. 즉 아우라란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 가까이 있지만, 사실 '멀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우라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로서,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다.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따라갈 때-이것은 우리가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숨 쉰다는 뜻이다."2)

발터 베냐민은 '아우라'를 설명하면서 '공간과 시간'을 언급했습니다. 아우라를 생성하는 요소에 공간과 시간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의미입니다.


거리감

아우라의 본질은 '거리감' 또는 '접근 불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거리감은 '원작original'이라는 요소에 의해서 발생하게 됩니다. 20대 시절에 프랑스를 여행 한 적이 있습니다. 르부르 박물관을 방문하였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았습니다.

모나리자 그림은 두꺼운 유리벽 뒤에 전시되어 있었고, 수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이 모습이 마치 유명 연예인이 기자들의 프레쉬 세례를 받는 듯 했습니다. 그때 모나리자가 얼마나 대단한 그림인지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하나도 모르던 저도 '모나리자'가 놓인 특정한 공간에서 '거리감'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가까이 있지만, 멀게 느껴지는 것'


모나리자는 나의 눈 앞에 놓여 있었지만, 그것은 또한 멀리 있는 무언가였습니다.

물리적으로는 가까이 있지만, 심적으로는 멀리 있는 것으로 느끼는 무엇이 바로 아우라 입니다.


하지만, 모든 예술 작품이 이런 거리감을 형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정 작품들만이 거리감을 형성합니다. 이러한 거리감은 예술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거기로부터 아우라가 형성됩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은 어떤 작품에서 '거리감'을 경험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원본성

거리감을 가진 예술 작품의 원본은 접근 불가한 아우라를 형성합니다. 특정 시공간에 존재하는 '단 하나 뿐인' 원본은 '일회적 현존재'입니다.


"원작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기 때문에,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 작품이 있는 곳은 단 한곳뿐입니다. 말 그대로 '일회적인 현존재'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예술작품은 원본성, 진품성, 일회성이라는 물리적인 특징을 토대로 자신의 아우라를 형성하는 것입니다."3)  


제의적 가치

앞서 거리감을 이야기했지만, 이 거리감은 일종의 제의적 장치입니다. 제의는 제사의 의식을 말합니다.

모든 종교 의식에는 '거리감'이 존재합니다. 제사를 지낼 때의 '절차'가 거리감의 형상입니다.  

이러한 절차는 '의전'에서도 나타납니다. 타국의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면 어떠한 절차를 통해서 응대를 해야하는지를 명시해 놓은 것이 의전의 핵심 내용입니다. 거리감(또는 성스러움, 존귀함 등)의 존재는 절차를 통해서 표현됩니다.

개신교, 천주교 뿐만 아니라 타 종교에도 '신'께 다가가는 인간은 특별한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성경의 출애굽기와 레위기에는 이러한 절차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니다.

광야 시대의 제사를 드리던 장소인 '장막 성소'

정해진 날, 정결한 상태에서 정해진 절차를 통해서만 '신'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나 그러한 제의 의식을 집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레위인'이라는 제사장 계급을 통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절차는 점점 더 간소화 되었고, 멀리 계시던 '신'은 개신교에 이르러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닿아있는 성령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일종의 거리감이 파괴된 것입니다.)

아우라 자체인 '신'은 그에 걸맞는 복잡하고, 치밀하게 설계된 절차를 통해서 자신의 아우라를 형성합니다.


반면, 아우라가 없는 존재도 거리감을 주는 절차를 통해서 아우라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병헌 주연의 영화 '마스터'는 불법 다단계로 많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손해를 입히는 사기꾼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불법 다단계 회사를 차리고 그럴 듯한 차와 옷을 입고, 대단해보이는 무대를 만들어 사람들을 속입니다. 영화 초반에 연출된 대규모 집회에는 화려한 조명과 무대, 멋진 옷과 말투,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의 시선을 한번에 받을 수 있는 중앙무대가 있습니다. 이렇게 준비된 무대 위에서 본질적으로는 사기꾼인 주인공은 회사의 대표로서 아우라를 형성합니다.


아우라를 형성하는 시선

저는 개인적으로 아우라를 형성하는 것은 결국 '시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어떤 작품이 그 자체로 아우라를 가지고 있겠지만 결국 그 아우라를 더 큰 것으로 형성하는 것은 '인간의 시선'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볼 수록 그 작품은 아우라를 획득해 갑니다.


1917년 뒤샹의 작품 '샘'은 특별히 제작되지도 않은 흔한 '변기'입니다.

마르셀 뒤샹의 '샘'

아우라와는 거리가 먼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변기가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미술관의 작품 전시 공간에 자리를 잡게 되자, 아우라를 형성하며 한 획을 긋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물론 뒤샹은 전통적인 예술작품의 가치 또는 아우라가 무엇인지를 통렬하게 보여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작품이 또 하나의 아우라를 형성했으니 전통적 가치에 혁신을 가하려는 의도는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4)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To be continued.

 

같이 읽으면 도움되는 글: 우리는 다시 아우라의 세계로





1) 서울신문, 2011년 11월 28일,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2) 벤야민, 최성만 옮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3) 심혜련, <아우라의 몰락 이후의 아우라>, 처음있는 독일 철학사

4) 애초부터 작품 속에 '아우라'가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시선이 '아우라'를 만들어 내는 것인지에 관한 논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근대철학의 인식론 논쟁과 같이 선험성이 존재하는지의 여부에 대한 논쟁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선험성을 믿기 때문에 '아우라'는 선험적인 어떠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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