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의 몰락
발터 벤야민의 그의 책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다"
1826년 프랑스의 '조세프 니세포르 니에프스'가 최초로 카메라 옵스큐라에 투영된 영상을 포착해 영구적으로 상을 물체에 정착시켰습니다.
사진의 탄생을 바라본 회화는 원본을 더 잘 재현하려는 시도가 자신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사진과 무슨 수로 경쟁을 한단 말인가, 그들은 가망 없는 경쟁을 포기하고 핀젤 대신 카메라를 들고 거리의 사진사로 나선다.”1)
발터 벤야민은 새로운 사진과 영화의 기술적 가능성에 열광했습니다. 이 새로운 미디어들은 보수적인 예술관념의 억눌린 인간의 창조력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과거 예술가들은 실제하는 원본을 더 잘 복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원본은 ‘아우라’를 가지고 있으며, 복사본은 그 아우라를 입어 원본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현대를 ‘기술복제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사진과 영화는 처음부터 복제로 시작합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 찍은 화일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숫자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동일한 복사copy가 가능합니다.
처음부터 복제된 상태로 원작이 되는데요. 이렇게 원본 없는 복제를 우리는 ‘시뮬라크르’라고 부릅니다.
저는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거리감 소멸' 사건이 '종교개혁(1517)'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예수는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한 존재입니다. 저 멀리 어딘가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와 거리를 좁힌 중요한 사건입니다. 로마가 예수의 신앙을 국가 종교로 공인(313년)한 이후 인간과 '신' 간의 거리감이 다시 생겨나게 됩니다. 종교개혁은 이렇게 생긴 거리감을 혁명적으로 제거합니다. 마틴 루터는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하며, 사제를 통하지 않고 누구나 '신'께 다가갈 수 있음을 선포합니다.
또한 특정 사제들만 보던 성경이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누구나 성경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초월적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내주하시는 하나님'으로 강조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발터베냐민은 기술이 거리감을 소멸시켰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진이 발명되면서부터 '원본'의 무한복제가 가능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원본'을 의식하면 살던 의식의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오히려 '의식'의 전환이 이러한 기술을 발견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했는지도 모릅니다.
종교개혁과 관련해서 생각해보면, 과거에는 '사제 중심' 종교로서 언제나 사제라고 하는 원본을 신경써야 했습니다. 사제가 어떤 말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살펴야 했다면, 이제는 개인이 '신'께 나아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최종적 원본 이외에 '유사 원본'의 권위는 소멸해버렸습니다. '신'이라는 최종적 권위 이외에 다른 권위들이 소멸되면서 시대를 장악하던 권위의식이 사라지고,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결국 다양한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발터 베냐민은 기술의 발달로 인해 원본의 아우라가 소멸되었으며, 다양한 영역에서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했습니다.
"기술적 복제는 원작이 도달할 수 없는 상황에 원작의 모사를 가져다 놓을 수 있다. 기술적 복제는 원작으로 하여금 사진이나 음반의 형태로 수용자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해준다. 사원은 제자리를 떠나 예술 애호가의 작업실에서 수용되고, 음악당이나 노천에서 연주된 합창곡은 방안에서 들을 수 있게 된다."2)
"일정한 장소에서 원본으로서 그리고 여기와 지금 아니면 볼 수 없기 때문에 강력한 아우라를 소유함으로써, 제의적 가치를 가졌던 예술작품은 이제 바로 이러한 가치에서 해방됩니다.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를 가질 수 있었던 예술작품은 이제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것이 돼야 합니다. 제의적 가치에서 전시 가치로 가치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죠."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은 접근 가능성이 보장된 그리고 전시 가치를 가진 예술작품입니다. 이것은 또한 기술복제시대의 새로운 지각 가능성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의 몰락이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는 권위를 몰락시켰고, 이러한 인식은 사회 전반으로 번져나가 결국 사회 속에서의 '성역'이라고 하는 의식을 무너트렸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너짐은 인간의 자유로 이어집니다. 결국 발터 벤야민은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앤디 워홀(1928-1987)은 자신의 작업실을 factory라고 불렀고, 실크스크린 방식을 통해 작업을 하며 동일한 작품을 여러 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작품들은 원본이라는 생각 하에 고가의 작품으로 팔려 나간 것이 현실입니다. 영화의 원본이 컴퓨터 화일에 불과하다고 해도, 최초의 촬영본은 소장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전당포 사나이'라는 미국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온갖 종류의 물건을 감정하여 사고 파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수천개가 만들어진 장난감도 최초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무언가를 찾아내고, 거기에 가치를 매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기술복제가 가능하나 이 시대에도 여전히 아우라는 판을 치고 있는 듯 합니다.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아우라를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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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읽으면 도움되는 글: 우리는 다시 아우라의 세계로
1) 진중권, <미학오딧세이 3>
2)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