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경수는 윤재의 소극장에서 오디션 대사를 계속해서 읊조리고 있었다. 경수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옆에서 봐주고 있는 윤재 눈에도, 경수의 연기는 문제가 있었다. 문제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걸핏하면 대사를 틀리기 일쑤였다. 아직도 경수의 손에는 대본이 들려 있었고 경수는 대사를 외어보고 대본을 훑어보기를 반복했다. 경수는 짜증과 답답함을 느꼈고 윤재는 슬슬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야, 당장 오디션 낼모레인데 너 어떡하려고” 윤재가 다그쳤다.
경수는 한 번 더 대본을 보지 않은 채 대사를 끝까지 마무리 지어보려 하지만 이번에도 중간에서 막히고 말았다. 경수는 외마디 외침과 함께 본인의 답답함을 표출했다.
“잠깐 쉬었다 할래?”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경수는 윤재 옆으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일 있어? 원래 대사는 잘 외웠잖아”
“아냐 아무 일도”
“아니기는 얼굴에 짜증이 가득한데”
“...”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왜 마지막이라고 생각 하냐 되면 이제 시작인거지”
경수는 윤재의 대답을 듣고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부담은 형이 주고 있는데?”
“낙관적으로 생각하자 이런 거지 새꺄”
윤재도 무안했던 듯 경수의 어깨를 밀며 대답했다.
“낙관은 무슨...”
“야 그리고 뭐 안 되면 어때. 안 된다고 그게 끝이야? 어? 그거 안 된다고 네 인생 끝 아니잖어?”
“형 지금 웃긴 거 알아?”
“왜? 뭐? 난 이런 얘기 하면 안 되냐?”
“됐다 됐어”
경수의 표정은 한층 밝아졌다. 경수는 다시 무대로 올라섰다. 이번엔 그의 손에 대본이 들려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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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님, 그 게임 표절이란 게 장르적 유사성을 인정해줘야 하는 부분도 있고 명확하게 베끼... 보도자료는 이제 본사 차원에서 입장 정리라던가 법률적인 검토도 해야 돼서 ... 제가 기자님한테 제일 먼저 드릴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네 네”
전화를 끊고 정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짧은 시간조차 정석은 사치로 느꼈다.
“매니저님? 뭐 연락 받은 거 있어요?”
“아뇨... 아직 검토 중이란 답만 계속 하네요” 현진도 정신이 없긴 매한가지였다.
“수영 씨, 커뮤니티나 유튜브 이런데 반응은 어때요?” 정석은 이번엔 인턴인 수영에게 물었다.
“계속 확인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반응이 좋진 않아요... 옹호하는 사람도 간혹 있긴 한데 거의 대부분은 부정적인 반응이에요”
정석은 자신의 감정이 한계치에 다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본인들 일 아냐? 지들은 검토만 하루 종일 한다고 하고. 대응은 다 우리한테 떠넘기고. 뭐 어쩌라는 거야. 뭐 방향성이라도 있어야 보도자료를 뿌리든가 말든가 하지. 그렇다고 우리 멋대로 쓰면 지랄이란 지랄은 다 할 거면서. 어제 대응 못했다고 쿠사리란 쿠사리는 다 줘 놓고 지들은 다를 게 뭐야 하...”
처음 보는 정석의 모습에 팀원들은 어찌 반응해야할지 몰랐다. 마지막으로 대답했던 수영은 마치 본인이 잘못한 것 마냥 고개를 푹 숙였다. 정석도 그제 서야 본인이 통제를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해요. 이렇게 화내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미안합니다”
“저 팀장님?” 현진이 매우 조심스럽게 정석을 불렀다.
“네 매니저님” 정석은 감정을 추스리기 위해 노력했다.
“먼저 연락은 없었는데... 입장문 올라왔어요” 현진은 본인이 실수한 것 마냥 정석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정석은 눈을 질끈 감으며 화를 누르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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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연습을 마치고 경수는 밖을 배회했다. 정석과 마주쳐 무슨 얘기를 해야 될지 몰라서였을까. 경수는 홀로 거리를 거닐었다. 전화가 울렸지만 이번에도 경수는 받기를 주저했다. 아버지로부터 온 전화였다. 경수는 휴대폰이 있었음에도 손목시계로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일종의 습관이었다. 시계는 열두시가 가까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경수의 대답은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미안한데 지금 응급실 좀 와줄 수 있어?”
“응급실? 어디 아파?”
“넘어졌는데 팔을 잘못 짚어서. 올 수 있어”
“어디야”
“xx병원. 어딘지 알아”
“지금 갈게”
경수의 대답엔 크게 걱정한다든가의 어조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감정도 없었다고나 할까. 가족이 아프다는 것에 대한, 아니 일상적인 대화라 하더라도 굉장히 무미건조한 어투였다. 경수는 스스로도 본인이 매정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사실을 인식한지는 오래되었지만 바뀌지 않았다. 바뀌고 싶지 않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같은 시간, 정석은 여전히 회사의 사무실이었다. 정석과 팀원 모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정석은 경수로부터 문자가 온 것을 확인했다.
‘오늘은 못 들어갈 수도 있을 거 같아’
정석은 어제 좀 뭐라 한 것 가지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기도 하고 하루 종일 쌓인 스트레스와 피로 때문이었는지 경수의 행동이 더욱 철없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뭐 어제 그 한마디 한 거 때문에 그래? 어차피 나 오늘 집 못 들어가’
평소의 정석이었다면 이렇게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문자를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답장은 곧바로 왔다.
‘아냐 그런 거. 아버지 응급실 갔다 그래서’
‘형은 왜 못 들어가는데?’
정석은 낯 뜨거워짐을 느꼈다. 본인의 섣부른 판단 때문에 실수했다 생각했다.
‘미안해 몰랐어 아버지는 왜 많이 아프셔?’
‘난 회사, 일 때문에 못 들어갈 것 같아’
‘좀 넘어졌나봐 나도 이제 병원이라’
‘그래 별 일 아니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오셨죠?” 응급실 접수데스크의 간호사가 경수에게 물었다.
“보호자에요. 최장호 환자요”
안내를 받은 경수는 응급실 안으로 향했다. 아버지 장호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장호는 한 손으로 다친 것으로 보이는 팔을 받치고 있었다. 팔 이외엔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장호의 표정은 좋지 못했지만 고통 때문이었다기보다는 어딘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에 가까웠다. 경수가 다가가자 장호의 낯이 살짝 누그러졌다.
“왔어?”
“어떻대?” 경수의 물음은 상투적으로 들렸다.
“아니 왜 그 차도하고 인도 사이 보면 턱 있잖아. 거기 올라가는데 하필 그 위에 그 뭐냐 보도블럭이 살짝 들려 있는 거야. 그래서 거기에 발이 걸려 가지고 옆으로 넘어져서 왼팔로 탁 짚었는데 딱 짚을 땐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이게 일어서니까 안 움직이더라고”
“그래서 뭐래 뿌러졌대?”
“아까 엑스레이 찍었는대 아니 아직도 아무 말도 안 해주고 잠깐만”
장호는 지나가던 간호사를 붙잡았다.
“저 간호사 선생님. 제가요. 엑스레이를 아까 찍었는데 아직도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지금 환자를 이렇게 내팽개쳐도 되는 겁니까?” 장호의 목소리는 살짝 격앙되어 있었다.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최자 장자 호자요” 장호가 대답했다.
“선생님 곧 콜해드릴게요”
“아니 아까도 금방 온다더니 지금 의사양반 자고 있는 거 아닙니까? 아픈 환자 이렇게 세월아 네월아 기다리고만 있어야 합니까!” 장호의 언성은 점점 높아졌고, 그로인해 주변 몇몇이 장호 쪽으로 돌아봤다. 경수는 익숙하다는 듯, 상황을 제지하려기보다는 조심스레 모른 채하며 자리를 피했다. 간호사도 당황할 법 했지만 이미 경험해본 상황이라는 듯 장호에게 같은 대답을 반복하고는 다른 업무를 보기 위해 자리를 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호의 화풀이가 효과가 있었던 듯 의사로 보이는 사람이 장호에게 다가왔다.
“환자분 어디가 불편하세요”
“아까 다른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사진까지 찍었는데 또 말씀드려야 합니까?”
“전 아직 들은 게 없어서요”
“그 선생님은 뭐하시고, 그 제가요. 그 차도하고 인도가 있지 않습니까? 그 만나는 부분에 턱처럼 이렇게 솟아 있잖아요?”
“그래서 지금 아프신 데가 어디에요?” 의사는 장호의 말을 끊고 물었다.
“여기 지금 왼쪽 손으로 탁 짚었는데 처음에 탁 짚었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왼쪽 손목이 아프시다고? 그럼 이렇게 한 번 움직여보시겠어요” 의사는 다시 한 번 장호의 말을 끊었다. 장호는 의사가 시킨 대로 한 번 움직여보려 했지만 잘 움직여지지 않았고 고통이 밀려온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의사는 장호의 왼팔을 몇 번 만져보고 상태를 확인하더니 간호사가 건네준 엑스레이 사진을 확인했다. 의사가 엑스레이를 확인하는 동안, 장호는 계속하여 자신이 어떤 과정으로 다쳤는지,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지속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여기 사진 보시면 여기가 왼쪽이고 여기가 오른쪽이에요. 왼쪽 보시면 여기 손목 쪽에 여기 이렇게 금간 거 보이시죠? 바로 반 깁스 해드릴 테니까 오늘은 그렇게 하시고 다음에 외래 진료 받으시면 될 거 같아요”
의사가 잠시 떠나자 장호는 경수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의사 새끼가 싸가지가 없어”
“아니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되지. 넘어져서 왼쪽 손목을 짚었는데 안 움직인다, 그러면 될 거 가지고 온갖 얘기를 다하고 있는데 그거 응급실에서 어떻게 다 들어주고 있어”
경수는 그런 장호의 모습에 싫증을 느낀 듯 짜증을 내었다.
“그렇다고 넌 또 왜 짜증이야” 경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경수가 응급실 약국 앞에서 약을 처방받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장호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장호의 왼팔은 깁스가 되어 있었다. 장호는 큰 소리로 통화를 하였는데 경수가 처음 들은 말은 상스러운 욕설이었다.
“이 씨발놈아. 지금 내가 팔이 부러졌다니까. ... 아니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이것도 네가 부탁한 거 하러 가다가 부러진 거 아니야 개새끼야 ... 이 씨발놈이 진짜 됐어 늦었으니까 내일 통화해. 됐고 끊으라고 씨발”
약사도 무슨 일인가 싶어 밖을 내다봤지만 경수는 애써 아무 것도 못들은 채 하려는 듯, 장호 쪽을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주차를 마친 정석의 얼굴은 피로에 가득 차 보였다. 시계는 새벽 3시에 가까운 시간을 표시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그의 눈에 집을 향하고 있는 경수의 모습이 보였다. 경수 또한 정석을 확인하고는 발걸음을 정석에게로 돌렸다.
“지금 퇴근 한 거야?”
“어. 아버지는? 괜찮으셔?”
“어 괜찮아. 형 일이 원래 이렇게 늦게 퇴근해?” 경수는 대화 주제를 돌리려 했다.
“항상 그런 건 아닌데 이번엔 사고가 좀 터져서”
“뭔 사고?”
“좆 됐어... 이직도 물 건너갔다”
“뭔 일이 있었길래...”
대화를 하다 보니 둘은 어느 덧 집 앞 현관문이었고 경수가 자연스레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먼저 들어섰다. 피곤한 듯 둘은 더 이상의 대화를 하지 못했다. 서로를 신경 쓰기엔 본인들의 머릿속이 너무나 복잡했다. 정석은 본인의 목표와 커리어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과 좌절감이 그를 뒤덮었다. 본인이 맡은 고객사에 대한 위기 대처에 실패했다는 사실, 이를 그가 새로 면접 볼 회사에서 모를 리가 없다는 생각, 본인이 수년간 쌓아온 결과물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게 했다. 경수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 비슷한 감정과 한 편으로는 다친 아버지에 대해서조차 본인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정석의 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후회하기 전에 잘해라. 어디서든, 누구도 들어봤을 법한 말이지만 경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장호가 응급실에 갔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조차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은 경수였다. 이런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봐야할 지 몰랐다. 각자의 잡념으로 인해 둘은 늦은 새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