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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1975] 커트와 너바나의 고향, 애버딘

by 김성대

1967 – 1975


애버딘에서 시애틀까지. 커트와 너바나의 음악 역사는 애버딘, 터코마, 올림피아를 거쳐 시애틀에서 만개한 뒤 거기에서 지고 만다. (지도출처=Google Maps)


애버딘Aberdeen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맥주 마시고 대마초 피우고 사탄을 숭배하는 것뿐이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TV를 많이 봤다.

데일 크로버Dale Crover, 멜빈스Melvins 드러머


애버딘은 벌목꾼들의 마을이었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일하고 밤새 술만 마시는 것 같았다. 좀 초라해 보였다.”

채드 채닝Chad Channing, 전 너바나 드러머


애버딘에서 자랐다. 애버딘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벌목 마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파티를 즐겼다. 그런데 80년대 들어 업체들이 값싼 노동력을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나면서 지역을 먹여 살리던 산업이 침체되기 시작했다.

쿠르트 반더후프Kurdt Vanderhoof, 메탈 처치Metal Church 기타리스트


애버딘은 오래된 산업 도시들이 그랬던 것처럼 종말론적인 분위기였다. 경제가 죽고, 돈도 일자리도 없었다.”

토비 베일Tobi Vail, 올림피아Olympia 출신 음악가인 토비는 훗날 커트의 여자 친구가 되어 커트가 평생 안고 갈 페미니즘 신념을 심어준다.


‘비의 도시’ 시애틀. 그곳에서 남서쪽으로 110마일 떨어진 애버딘은 시애틀보다 비가 더 많이 내리는 동네다. 산기슭의 만인 그레이스 하버Grays Harbor County에 속한 애버딘은 태평양 연안 올림픽 반도The Olympic Peninsula로부터 남쪽에 위치했고, 인근 올림피아에선 서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다. 커트 코베인의 고향으로도 유명한 애버딘에선 150피트 상공에서 하얀 연기를 내뿜는 목재 공장과 제재소들이 있던 탓에 안개와 구름, 매연이 구분되지 않았다. 훗날 커트는 그런 애버딘이 “무료한 트윈 픽스Twin Peaks-90년대 초 미국에서 방영된 미스터리 호러 드라마의 배경 마을 이름” 같았다거나 “백인 하층계급이 사는 지옥”이라고 거칠게 묘사했다. 이유는 위에서 데일, 채드, 쿠르트, 토비가 증언한대로다.


벌목 일이 생업이었던 건 커트가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될 또 다른 마을 호퀴엄Hoquiam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지역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는데, 호퀴엄은 인디언 말로 ‘나무에 굶주린’이라는 뜻이다. 애버딘은 스코틀랜드어로 ‘두 강이 만나는 곳’을 의미한다. 초기 개척자들이 애버딘에 정착한 건 바로 이 두 강, 위시카Wishkah-위시카 강은 나중에 너바나의 공식 라이브 앨범 《From the Muddy Banks of the Wishkah》에 등장한다와 체할리스Chehalis 강 때문이었다. 포장도로가 깔리기 훨씬 전, 강들은 목재 운송의 주요 경로였다.


커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애버딘 집. (사진=Seattle PI)


20세기 초, 전성기 애버딘의 인구는 5만 명이 넘었다. 사실 이 지역은 1950년대부터 악명 높았던 흄 스트리트Hume Street-지금은 스테이트 스트리트State Street로 이름을 바꾸었다를 중심으로 형성된 대규모 환락가였다. 혹자는 애버딘의 저 ‘불미스러운 과거’가 주민들에게 열등감을 주었다고도 한다. 그러던 50년대 후반 경찰 단속으로 성매매업이 사라지면서 선원들은 다른 곳에서 쾌락을 찾기 시작했다. 선원들의 소비가 끊겨 지역 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듯 보였지만, 애버딘은 항구와 철도 종착역이라는 지리적 특성에 힘입어 벌목업의 본거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1960~70년대 들어 미국 정부가 철도를 체계적으로 폐쇄하며 위축돼 갔다.


커트가 태어난 해1967년 선술집만 27곳이 있었던 애버딘은 70년대 후반 벌목할 나무가 부족해진데다 해외산 목재와 경쟁까지 겹쳐 관련업은 사양길로 접어든다. 이 여파로 시내 대형 백화점이 문을 닫았고 백화점 상품들이 빠진 자리엔 책과 잡지, 중고 옷을 파는 벼룩시장이 들어섰다. 심각해진 실업문제는 지역민들의 알코올 중독, 가정폭력, 자살 등으로 이어졌다.커트가 슈퍼스타가 된 1991년 애버딘의 자살률은 전국 평균치의 두 배에 이르렀다. 거듭된 경제, 사회적 쇠퇴로 전체 인구가 전성기 대비 3분의 1에도 못 미치며 애버딘은 그렇게 ‘인구 소멸 지역’이 되어 갔다. 올림피아에서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로 활동한 리치 젠슨Rich Jensen의 말처럼 고속도로변의 쓰레기 트레일러 정거장에 불과해져 버린 애버딘의 매력이란 고작 “소나무 꼭대기에서 쉬는 독수리, 새벽의 바다 냄새 같은 자연 그대로의 야생성” 밖에 없어 보였다.


록 스타라고 하면 설사 때문에 8만 관객을 2시간 동안 기다리게 하는 액슬 로즈가 떠오른다

크리스 노보셀릭, 1992년 싱가폴 『스트레이츠 타임스Straits Times』와의 인터뷰에서


무릇 예술은, 그 예술을 하는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사람은 종종 자신들이 환경을 지배한다고 착각하지만, 그들은 부지불식간 그 환경 아래 살아가고 성장한다. 그 사이 한 인간의 정서가 형성되는데 아티스트의 경우 그 정서는 영감으로, 급기야 예술적 표현으로 진화한다. 춥고 찌푸린 날씨가 잦은 북유럽의 블랙 메탈 밴드들, 천혜의 자연이 품은 아이슬란드의 비요크Bjork와 시규어 로스Sigur Rós, 아픈 정치 역사를 가진 아일랜드의 유투U2, 중공업의 쇠 비린내로 자욱했던 영국 버밍엄의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와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가 다 그런 '환경'의 부산물들이었다. 같은 논리로 애버딘의 질척거린 도시 환경이 너바나의 눅진한 음악 성향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 리 없다. 무엇보다 애버딘은 커트가 자란 곳이고 너바나가 태어난 곳이며, 커트와 크리스가 처음 만난 곳이다. 둘은 이후 몬테사노Montesano, 터코마Tacoma, 올림피아를 거쳐 시애틀에 입성해 록 스타가 된다. 물론 자신들이 혐오한 액슬 로즈와는 근본부터 다른 록 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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