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는 열정이 넘쳤다.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 사실에 너무 신이 나 침실에서 뛰쳐 나오곤 했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 못 견뎌 했다
웬디 엘리자베스Wendy Elizabeth, 커트의 모친
나는 정말 행복한 아이였다. 끊임없이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불렀고, 언제 그만둬야 할 지 몰랐다. 놀고 싶다는 생각에 너무 흥분해서 아이들에게 얻어맞기도 했다
커트 코베인
퀸시 존스Quincy Jones, 바비 셔먼Bobby Sherman-곡 <Seattle>을 불렀다, 하트Heart, 이소룡Bruce Lee 만큼 시애틀과 관련한 유명 인사가 될 커트 도널드 코베인Kurt Donald Cobain은 1967년 2월 20일 월요일, 상점도 교통량도 많은 워싱턴 주 가장자리 언덕에 있던 그레이스 하버 커뮤니티 병원Grays Harbor Community Hospital에서 태어났다. 그날도 비가 왔다. 병원 간호사들을 시작으로 주위 사람들을 두루 매료시킬 담청색 눈동자의 커트는 3.4킬로그램 몸무게로 태어나 생후 5개월 때부터 금발이 된다. 커트의 부모는 코스모폴리스Cosmopolis 출신 프라덴버그Fradenburg 집안의 열아홉 살 웬디 엘리자베스와 셰브론Chevron 자동차 정비소에서 정비사로 일하던 스물한 살 도널드 코베인Donald L. Cobain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만난 두 사람은 학교를 졸업하고 몇 주 뒤인 1966년 6월에 커트를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 둘은 도널드의 아버지 차로 떠난 아이다호Idaho 여행에서 부모 몰래 결혼했다. 이 젊은 가족은 그레이스 하버 카운티에 있는 작은 도시 호퀴엄의 남의 집 뒤뜰에 딸린 임대 주택에서 살다가 커트가 태어나고 6개월 뒤 시애틀 남동쪽 83마일 거리에 있는, 호퀴엄 인구의 약 두 배1만 6천여 명가 살던 ‘깡촌’ 애버딘으로 이사했다.
외할아버지가 독일인이란 것 정도만 알던 커트는 자신의 성(姓)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고 자랐다. 아버지 쪽이 프랑스와 아일랜드계 혈통인 것, 코베인이 코번Coburn이란 이름의 변형임을 알게 된 건 나중 일이다. 커트의 할아버지 를랜드 엘머 코베인Leland Elmer Cobain은 애버딘에서 1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몬테사노에 살았다. 집안의 비슷한 세대 중 첫 아이였던 커트에겐 외가 쪽에만 여섯 이모와 외삼촌 한 명이 있었고, 친가 쪽엔 삼촌 두 명이 있었다. 친척들에게 보낸 커트의 출생 카드만 50통이 넘었다고 하니, 당시 커트에 대한 집안의 관심을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어른들은 누가 커트를 돌볼지 다투기까지 했다고 한다. 사람들 관심의 중심에 서는 데 익숙해진 커트는 친척들 기대에 부흥,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모든 이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커트의 여동생 킴벌리Kimberly Cobain는 오빠보다 3년 늦게 태어났다. 도널드와 웬디가 28평 2층짜리 내 집 마련에 성공하고서였다. 동생이 태어났을 때 커트는 이미 엄마와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웬디의 말이다.
첫째(커트)를 대신할 존재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커트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이 그 애를 위한 시간이었다. 커트는 분명 똑똑한 아이였다
웬디는 한편으론 커트가 아이에게선 보기 힘든 지각을 가지고 있어 좀 무서웠다고도 한다. 1968년 5월, 그런 커트가 갓 돌을 넘겼을 때 이모 메리 얼Mari Earl은 “내 조카는 뭔가 바라는 게 있으면 일단 소리부터 크게 지른다”라고 학교 글짓기 시간에 썼다. 커트에게는 두 살 때 만든 상상 속 소꿉친구 보다Boddah-보다는 먼 훗날 커트의 유서에도 등장한다가 있었는데, 나중에 이모 메리의 테이프 녹음기에 담긴 자신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걸 들으며 그는 보다의 실존을 믿곤 했다.
걸음마 때부터 노랫말을 직접 지어 불렀다는 커트는 보다를 만난 두 살 즈음 음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세 살 때 생애 첫 곡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커트는 네 살이 되어선 이모와 산책을 갔다 와 피아노에 앉아 되는대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커트의 이모 메리는 기타를 곧잘 쳤고, 커트의 외삼촌그러니까 웬디의 오빠인 척Chuck Fradenburg은 비치코머스The Beachcombers라는 로큰롤 밴드에 몸담고 있었다. 척은 지하실 스튜디오에 어린 커트를 내려놓고 마이크를 준 뒤 테이프를 틀어주기도 했다. 또 웬디의 삼촌은 본명인 델버트 프라덴버그Delbert Fradenburg를 데일 아덴Dale Arden으로 바꿔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오페라 발라디어가 되었다. 아덴은 40대 후반~50대 초반에 음반 몇 장을 내기도 했다. 이처럼 『킹 오브 재즈The King of Jazz』라는 영화에 테너로 출연했던 큰할아버지 델버트 코베인Delbert Cobain 정도를 빼면 커트의 음악 재능은 거의 외가에서 온 듯 보인다.
도널드와 웬디는 커트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작은 미키 마우스 드럼 세트를 사주었다. 웬디는 자신이 드러머가 되고 싶었기에 커트에게 드럼을 강요했다고 인정했다. 웬디의 꿈이 꺾인 건 캐런 카펜터Karen Carpenter가 드러머의 길을 접은 이유와 비슷했다. 드럼이 여성스럽지 않다고 여긴 커트 외할머니의 고리타분한 생각 때문이었던 것이다. 엄마의 한이라도 풀어주려는 듯, 커트는 앉아서 물건을 잡을 수 있게 되자마자 냄비와 프라이팬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주방집기들 외 엄마, 아빠가 사준 미키 마우스 드럼 세트도 망가질 때까지 쳤다. 너바나 음악의 필수 요소가 되는 소음noise에 대한 커트의 관심은 어쩌면 이맘 때부터 형성된 것일까. 그는 외삼촌 척의 집에 있는 실제 드럼 키트가 ‘더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는 이유로 좋아했다. 한편, 첫 드럼 세트를 받은 다섯 살 커트는 생애 첫 싱글도 손에 넣었으니 바로 테리 잭스Terry Jacks의 <Seasons in the Sun>이었다. 아주 나중에 재미 삼아 너바나에서 자신이 직접 드럼을 치며 노래할 곡이다.
오빠는 머리에 떠오른 건 무엇이든 그림이나 음악 같은 예술로 바꿔낼 수 있었다
동생 킴벌리가 한 저 말은 커트의 예술 재능에 대한 일상의 목격담이다. 1972년 9월, 커트는 로버트 그레이 초등학교Robert Gray Elementary 유치원 과정에 다녔다. 그는 이때부터 '사진 같은 그림'을 그려내며 미술 분야에 재능을 보였는데, 아마도 그 재능은 아스팔트 롤러 운전을 했던 할아버지보다 20세기 미국 화가 노먼 록웰Norman Rockwell을 좋아했던 할머니 아이리스 코베인Iris Maxine LaBrot Cobain의 유전자에서 왔을 터다. 과연 커트의 그림 솜씨는 타고난 구석이 있어서, 2학년이 되었을 땐 모두가 그의 그림 솜씨를 알아차렸을 정도였다. 하루는 할로윈Halloween 무렵 커트가 학교 신문 한 부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는데 1면에 자신이 그린 그림이 있었다. 당시 5학년 이상 어린이에게만 주던 ‘우등상 작품’으로 실린 것이었다. 하지만 커트는 사람들이 자기 그림에 대해 하는 우호적인 말들을 믿지 않았다. 작위적이고 따분한 인사치레로 여긴 것이다. 웬디는 그날 이후 커트의 어른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고 했다.
일곱 살 때였나. 그때부터 나는 록 스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커트 코베인, 너바나의 유일한 공식 전기 『Come as You Are』에서
메리는 자신의 기타를 가지고 놀던 저 일곱 살 조카에게 베이스 드럼큰북을 선물했다. 헌팅모자에 아빠의 테니스화를 신은 커트는 이모가 준 선물을 멘 채 동네를 돌아 다녔는데, 북을 두드리며 그가 부른 노래는 비틀스의 <Hey Jude>와 <Revolution 1>이었다. 사실 메리는 싱글을 녹음한 경험이 있는 컨트리 뮤지션이기도 했다. 수년간 애버딘 주변의 바 밴드에서 연주했고 리비에라Riviera 스테이크 하우스 무대에 솔로로 출연하기도 했으며, 『You Can Be a Star』라는 지역 TV 장기자랑 대회에선 2위를 차지한 적도 있다. 커트는 여덟 살이 됐을 때 그런 이모에게 기타를 배울 뻔도 했지만, 인내심이 부족한 조카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오빠는 비정상적으로 활동적이었다.” 킴벌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때 커트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ttention Deficit/Hyperactivity Disorder-ADHD 진단을 받은 상태였다. 당사자에 따르면 여섯 살 때부터 지나가는 경찰차를 향해 자갈이 가득 든 세븐업7UP 캔을 던진 적도 있었다. 아들의 증상 완화를 위해 웬디는 악명 높은 식용 색소인 적색 2호Red Dye No.2와 설탕을 식단에서 빼보기도 했으나, 효과와 한계는 동시에 나타났다. 커트는 끝내 증상을 억제하는 리탈린Ritalin이라는 약을 처방 받는다. 이에 찰스 R. 크로스는 자신이 쓴 커트의 전기에 “리탈린을 복용하는 어린이는 파블로프 조건반사를 일으켜 성장 후 약물 중독으로 빠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일부 과학자들의 소견을 첨부했다. 성인이 된 커트를 파멸로 이끌 마약 중독의 은밀한 서막이었을지도 모를 이 처방은 커트를 새벽 4시까지 깨어 있게 했고 학교에선 잠들게 만들었다.
밖에서 놀며 뱀을 잡고 자전거를 타고,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걸 좋아했다. 에빌 나이벨Evel Knievel은 그 시절 내 유일한 우상이었다
커트 코베인
3학년 때까지 록 스타가 되고 싶었다는 커트는 이후 한동안 스턴트맨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길은 역시 음악 쪽이었으니, 커트는 자신의 활발한 성격과 세상이 자기 손 안에 있다는 자신감으로 록 밴드를 결성해 여기저기서 공연하고 잡지 표지를 장식하는 일이 가능하리라 여겼다. 평소 과장된 표현을 즐겨 한 커트를 감안할 때 일곱 살 운운은 조금 의심스럽기도 하지만그는 원했다면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을 거라고 말했다, 아홉 살 때 조울증에 걸려 그 일록 스타가 되는 일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고 생각이 바뀐 걸 보면 마냥 허풍이라 단정지을 순 없겠다. 커트는 아제라드가 쓴 책에서 이렇게도 말했다. “10학년이 됐을 땐 자존감이 너무 낮아 록 스타가 될 생각조차 할 수 없었어요. 사람들이 록 스타에 기대하는 것이 무언지에 대해 고민할 겨를도 없었고요. 하물며 TV 출연이나 인터뷰 따윈 상상도 못했죠.”
애버딘에서 가장 좋은 동네는 아니었지만 커트의 집은 동네에서 꽤 멋진 축에 들었다. 도널드는 바닥에 카펫을 깔고 모조 벽돌 난로와 목재 패널을 설치하는 등 늘 집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했다. 비록 커트는 그런 부모의 노력을 “중산층으로 위장한 백인 쓰레기였다”고 깎아내렸지만. 웬디는 넉넉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났음에도 그의 어머니는 자식들이 자신보다 더 많은 걸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하려 항상 노력했다고 한다. 웬디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아침 숀 캐시디Shaun Cassidy-미국의 가수 겸 배우처럼 보이도록 커트의 머리를 부지런히 빗겨주고 양치질을 시켰으며,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옷을 입힌 것은 물론 등굣길엔 하이킹 부츠를 신겼다. 심지어 웬디는 커트가 알레르기를 일으킨 스웨터를 ‘잘 어울린다’며 반강제로 입히기도 했다. “커트와 킴벌리 두 아이 모두 애버딘에서 가장 옷을 잘 입는 아이였어요. 내가 그렇게 만들었죠.” 웬디는 내 자식들이 특정 환경에서 자란 특정 배경의 특정 친구들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커트의 기억이 맞다면 그 ‘특정’은 ‘부자’와 같은 말이었다.
엄마는 기본적으로 가난한 아이들을 멀리하라고 했어요 (...) 내가 그런 아이들보다 낫다는 엄마의 말만 믿고 가끔 불쌍한 아이들, 더러운 아이들을 괴롭혔죠. 늘 고약한 냄새가 나는 애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 친구들을 괴롭히고 싸움을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4학년이 되었을 때 난 그 아이들이 상류층 아이들보다 더 바르고 순수하다는 걸 깨달았구요
커트 코베인
이후 커트의 시그니처 패션이 되는 씻지 않은 머리와 깎지 않은 수염, 지저분한 옷차림은 혹시 이때의 흔적이 아니었을까. 참고로 같은 학년 때 커트는 음악 잡지 『크림(Creem)』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커트는 이 잡지를 통해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가 미국 전역을 누빈 운명의 마지막 투어 길을 따라갔다. 그때만 해도 커트는 피스톨스의 음악을 몰랐지만, 기사가 묘사한 밴드의 태도만으로 저들은 커트를 매료시켰다. 커트는 시드 비셔스Sid Vicious의 사진을 보며 그의 삶이 어땠을지 상상하곤 했다.
본인에 따르면 커트는 양손잡이였다. 하지만 도널드는 아들이 커서 왼손잡이가 되어 문제가 생길까 봐 오른손을 쓰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커트가 왼손을 쓸 때마다 ‘찰싹찰싹’ 때렸을 정도라고. 강요는 스포츠로까지 번졌다. 과거 도널드는 고등학교 시절 운동선수들과 어울려 뛰어다니곤 했지만, 나이에 비해 체구가 작아서였는지 운동에 딱히 재능을 보이지는 못했다. 도널드의 아버지는 운동과 관련해 그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건만 그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이 뼈아픈 경험이 도널드가 커트에게 스포츠를 강요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스포츠는 도널드가 아버지 를랜드와 교감해보지 못한 부자 관계를 아들 커트와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보였다.
도널드는 커트가 조금씩 걷기 시작할 때부터 공, 방망이, 글러브를 구비해 야구를 시켰다. 커트는 일곱 살 때 처음 아빠가 코치를 맡았던 베이브 루스Babe Ruth 리틀 리그 팀에 들어갔다. 웬디에 따르면 도널드는 커트가 야구를 못하면 경기가 끝난 뒤 아이에게 모욕감을 줄 정도로 화를 냈다고 한다. “도널드는 커트가 조금이라도 더 완벽하게 행동하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랐어요. 커트를 멍청이라고 부르다 금세 짜증을 내며 머리를 때리곤 했죠.” 커트의 외할머니는 사위가 여섯 살 외손자를 ‘방을 가로질러’ 던진 적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도널드는 아들을 중학교 레슬링 팀에도 입단시켰다. 그러나 커트는 고된 연습이 싫었고 운동선수들과 어울려야 하는 건 더 싫었다. 그저 운동하는 매순간이 마냥 싫었던 커트가 그럼에도 상대를 3초 만에 쓰러뜨릴 수 있었던 건 매트 위에서나마 억눌린 분노를 쏟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커트는 1981년, 부모의 이혼을 겪고 5년 뒤 들어간 몬테사노 고등학교에서도 레슬링을 계속 했다. 같은 체급에서 아들이 교내 레슬링 대회 결승까지 갔을 때 도널드는 흥분했다. 만사를 제쳐두고 경기장을 찾은 도널드. 그러나 커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안 핼퍼린과 맥스 월레스는 자신들의 공저작 『커트 코베인 지워지지 않는 너바나의 전설』에 이렇게 썼다.
(커트의 결승 진출은) 아버지가 자신을 배신하고 ‘그 망할 년’과 결혼한 것을 되갚아줄 둘도 없는 기회를 드디어 잡은 것이었다
결승전에 오른 커트의 반항심이 고개를 들었다. ‘망할 년’은 다름 아닌 새엄마였다. 그는 경기 시작 전 관중석에 앉아 있던 아빠에게 “교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호루라기가 울린 뒤 커트는 입을 다문 채 팔짱을 끼고 상대 선수가 자신을 “메다꽂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것도 네 차례나 연달아. 경기를 보던 도널드는 자리를 떠났다.
반항의 앙금이었는지 결국 왼손잡이가 된 커트는 8학년 때 가벼운 척추 측만증 진단을 받는다. 만성 기관지염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훗날 커트는 자신의 척추가 시간이 지날수록 기타 무게에 눌려 더 휘어갔다고 한다. 커트는 척추 측만증이 자신이 오른손잡이였다면 겪지 않았을 증상이라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척추 측만증은 사는 내내 커트를 괴롭힐 복통의 원인이 된 것도 같은데, 꼬인 척추가 위장으로 이어지는 신경을 꼬집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너바나가 세계적인 밴드가 된 1990년대 초 사람들은 커트의 복통을 단순히 헤로인 복용 습관에 따른 위장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커트는 그와 별개의 극심한 만성 복통에 노출돼 있었다. 척추 측만증이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사회적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은 밴드였다
커트는 스포츠가 싫었다. 스포츠는 도널드의 의지요 목표, 자아실현의 수단일 뿐이었다. 그는 다른 걸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