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목요일 업데이트 예정이던 <너바나 평전> 연재를 8월 한 달간만 목/일요일 두 차례 올립니다.
이유는 '제13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 <너바나 평전>을 응모하기 위해서인데요, 8월 말부터 시작될 응모 자격이 연재 브런치북일 경우 '10편 이상 연재 시 응모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론 지난 12회까지 대중음악 책은 단 한 권도 나오지 않은 프로젝트인데, 이번에 그 관행(?)을 깨보려 도전해봅니다.
한국인이 쓴 첫 <너바나 평전>이 안정된 출판사에서 빛을 볼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 드립니다:)
나는 정말 괜찮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홉 살 때까지만.
커트 코베인, 1992년 『스핀』과의 인터뷰에서
커트는 유서에 “일곱 살이 넘어서부터 모든 사람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고 썼다. 그런 그가 행복했던 시절을 ‘아홉 살 때까지’로 특정한 건 1976년 2월, 아들이 아홉 번째 생일을 맞고 일주일 뒤 웬디가 도널드에게 갈라서자고 말했기 때문이다. 커트가 일기에서 그 시기 “대화의 고갈”을 언급한 이유다.
두 생명을 책임지기엔 너무 젊었던 걸까. 도널드와 웬디는 돈과 육아로 힘들어했다. 급기야 둘은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예민한 커트는 1974년 말부터 감돌기 시작한 엄마아빠 사이 불안한 기류를 눈치 챈다. 시작은 별거였다. 처음 커트와 킴벌리는 애버딘의 2만 달러짜리 작은 집에서 엄마와 1년간 살았다. 도널드는 호퀴엄에 아파트를 빌렸다. 를랜드 코베인은 별거 중이던 아들의 당시 모습을 이렇게 떠올렸다. “도널드는 그 일로 너무 충격을 받은 듯 보였어요. 당연히 다시 합칠 거라고 생각했죠.”
도널드는 절대 이혼을 원하지 않았다. 커트에게 가족이 전부였던 것처럼, 도널드에게도 아버지라는 역할은 생애 처음 자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걸 느끼게 해주었다. 하지만 웬디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남편이 농구나 야구 팀 코치, 심판 일을 핑계로 집안에 소홀한 걸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를 사랑한 적이 있기나 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결국 도널드는 1976년 3월 29일, 웬디가 법원에 제기한 이혼 소장을 받는다. 그리고 그해 여름, 도널드와 웬디의 이혼은 공식화 됐다. 이 과정에서 웬디는 집과 아이들의 양육권, 68년형 카마로Camaro를, 한 달에 150달러 양육비 지급 지시를 받은 도널드는 65년형 포드 픽업트럭을 각각 가져갔다. 도널드는 이혼 후 부모님이 있는 몬테사노의 트레일러로 이사했다.
혼자가 된 도널드는 벌목 회사인 메이어 브라더스Mayer Brothers에서 검수계로 일하기 시작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엔 아빠를 만나러 온 커트를 데리고 출근했는데, 도널드가 통나무를 세는 동안 커트는 사무실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장난 전화를 걸곤 했다. 아직은 유아 때 활기가 남아 있었는지 커트는 가끔씩 창고로 나가 통나무 더미 위에서도 놀았다. 그렇게 신나게 놀다가 아버지의 밴에 타고선 퀸의 《News of the World》를 배터리가 방전될 때까지 반복해 듣곤 했다.
도널드와 웬디가 헤어진 1970년대 후반 미국에선 요즘과 달리 사회적으로 이혼을 금기시 하던 시대였다. 커트가 행복한 가정에서 부모를 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자신이 비정상인 것 같은 느낌을 받은 배경이다. 부모가 갈라선 뒤 스스로가 이방인처럼 느껴진 커트는 조금씩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펑크 록과 섹스 피스톨스에 관해 다룬 책 『잉글랜드의 꿈England’s Dream』을 쓴 존 새비지Jon Savage와의 인터뷰에서 커트는 부모의 이혼으로 수치심을 느꼈고, 잃어버린 것들을 끊임없이 갈망하게 되었다고 했다.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가족을 갖고 싶었던 커트. 행복했던 그의 세계가 해체되기 직전이었다.
우리의 이혼으로 커트의 삶은 파괴되었다. 커트는 완전히 변했고, 그냥 부모의 이혼 자체를 부끄러워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아이는 매우 내향적이 되었다. 예전의 밝은 성격 대신 음침해진 것이다. 화를 잘 내고 항상 찡그리고, 조롱하는 아이로 변했다.
웬디 엘리자베스
웬디가 말한 ‘음침함’은 과묵한 아이로 변했다는 뜻이었다. 찰스 R. 크로스는 그 이유를 당시 커트가 겪은 “정서적인 홀로코스트” 때문이라고 썼다. 나중에 커트가 워싱턴 주립대학University of Washington 학생 신문 『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설명한 너바나 음악의 특징, 즉 “증오에 기반을 둔 우울하고 원한에 찬 요소들”은 그래서 어쩌면 도널드, 웬디의 이혼에서 처음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을 겪은 커트는 얼마 뒤 살인, 강간, 자살 등에 관해서도 거리낌 없이 얘기하게 될 것이었다. 이는 친해지길 원하면서도 가까워진 뒤 내버려질까봐 두려워하게 된 커트 고유 성격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커트는 정말 복잡한 성격이었다.” 데이브 그롤은 1997년 『히트 퍼레이더Hit Parader』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커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하고 웃기다가도 다음 순간 완전히 자신만의 생각에 몰두할 수 있었다. 우리 중 누구도 그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아버지 도널드의 증언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커트는 어릴 때도 자신을 괴롭히는 게 무엇인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커트는 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것이 사라질 거라 믿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모든 걸 참다가 한꺼번에 터뜨리는 스타일이었다.”
1976년 6월, 커트는 침실 벽에 엄마아빠의 캐리커처와 커다란 물음표가 있는 뇌를 그렸다. 그 아래엔 ‘엄마가 미워, 아빠도 미워. 아빠는 엄마를 미워해, 엄마도 아빠를 미워해. 그게 너무 슬퍼’라고 썼다. 이모 메리의 말대로 커트는 가족들과 떨어지기 싫어서 잠도 자지 않으려 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에게 엄마아빠의 이혼은 “손발이 잘려나간 듯한” 고통이었고, 커트는 아예 부모의 이별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평론가 에버렛 트루가 쓴 너바나 전기 『Nirvana: The True Story』에 따르면 커트는 이즈음부터 영양실조로 위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척추 측만증에 이은 만성 위통의 두 번째 원인이었다. 이 극심한 통증은 이후 커트를 마약으로 안내한다.
미국 이혼율은 70년대 중반에 급증해 10년 사이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이러한 한부모 가정 자녀들은 세계대전이나 대공황을 겪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가족이 없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의 전투는 사적인 것이었다.
마이클 아제라드, 너바나의 유일한 공식 전기 『Come as You Are』 저자
커트는 부모가 헤어진 그 순간 마치 불이 꺼진 것 같았고 본인이 이전과 다른 사람 같았으며, 자신이 쓸모없다 느꼈다. 훗날 커트와 한 집을 쓰게 되는 데이브 그롤은 이런 말도 했다. “커트가 웃으면 방 안이 환해진다. 평소에는 웃지 않기 때문이다 (...) 커트가 정말 불행한 건지 원래부터 불행했던 건지, 아니면 행복해지는 방법을 모르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커트는 원래부터 불행하지도, 행복해지는 방법을 모르지도 않았다. 앞서 살펴봤듯 그는 잘 웃고 잘 뛰어놀던 누구보다 행복한 아이였다. 그런 커트를 "정말 불행하게" 만든 건 70년대 중반부터 미국 사회에서 급증했다는 부모의 이혼이었다.
1976년 겨울. 커트는 몬테사노의 비콘 애버뉴 초등학교Beacon Avenue Elementary School로 전학했다. 이듬해 10월 무렵엔 도널드가 제니 웨스트비Jenny Westby라는 여성과 데이트를 시작한다. 이혼 후 도널드는 커트에게 다신 결혼하지 않겠다고 무심코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1978년 2월, 도널드는 아들과의 약속을 저버린 채 제니와 재혼했다. 제니는 전남편과 낳은 두 아이를 데리고 몬테사노 남쪽 플리트 가Fleet St 413번지에서 도널드와 합쳤다. “커트야, 세상일이란 변하는 거란다.” 아들은 아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커트는 새 가족, 특히 새엄마와 전혀 어울리지 못했다. 그는 새엄마를 좋아하면 친엄마를 향한 사랑과 ‘진짜 가족’을 배신하는 걸로 여겼다. “여태까지도 새엄마보다 더 나쁜 사람은 생각할 수 없다.” 커트가 어른이 되어서도 저렇게까지 얘길 한 걸 보면 당시 상황이 커트에게 안긴 혼란은 가볍게 넘길 수준이 아니었던 듯하다. 그렇게 아빠에 대한 배신감은 새엄마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 “‘진짜’ 아버지가 있다고 느낀 적이 없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아버지가 나에겐 없었다.” 커트는 외로웠다.
1979년, 제니는 도널드와의 첫 아이인 채드 코베인Chad Cobain을 낳았다. 커트 입장에선 아버지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겨뤄야 할 상대가 한 명 더 는 셈이다. 그는 어린 이복동생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오빠보다 네 살이 어린데도 부모님이 외출할 때 채드를 도맡아 돌본 의붓여동생까지 커트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커트는 아빠가 동생들을 위해 장난감을 많이 사주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커트가 자신만의 지하실 방에 숨어 있을 때 아빠가 쇼핑몰에 가 스타호스Starhorse나 통카 트럭Tonka Truck을 사오곤 한 것이다. 분노한 커트는 여동생 인형의 목을 잘랐다. 아빠의 재혼은 간신히 버티고 있던 커트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가족의 일원으로 느끼게끔 커트를 법적으로 보호하려 계속 노력했어요. 하지만 커트는 우리와 있고 싶어 하지 않았고 웬디와 함께 살길 원했는데, 정작 웬디는 커트를 원하지 않았죠. 그럼에도 커트에게 웬디는 좋은 사람이었고 나는 죽일 인간이 된 겁니다.
도널드 코베인
찰스 R. 크로스의 기록에 따르면 커트는 1978년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에만 무려 여섯 집을 돌아다녔다. 당시엔 친엄마 웬디에게도 남자 친구 프랭크Frank Franich가 있었다. 이듬해 6월 18일, 아들과 함께 살길 원치 않았던 웬디에게서 커트에 대한 법적 양육권이 도널드에게로 넘어간다. 3개월 뒤 몬테사노 중학교에서 7학년이 된 커트. 2년 전인 5학년 때부터 음악 수업을 들은 그는 드럼을 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 26일 학교 신문 『퍼피 프레스Puppy Press』에 따르면 커트는 이 시기 이엘오Electric Light Orchestra, ELO의 <Don’t Bring Me Down>과 미트 로프Meat Loaf를 좋아했다고 한다. 커트는 멜로디가 좋은 음악을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