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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Oct 14. 2016

밥 딜런을 위한 변명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상위원회가 “미국 음악의 전통 안에서 참신하고 시적인 표현들을 창조해낸 공로”를 선정 이유로 모던 포크의 거장 밥 딜런에게 2016년 노벨문학상을 안겼다. 조니 캐쉬, 폴 맥카트니와 존 레논, 닐 영, 브루스 스프링스틴, 닉 케이브, 시드 배럿, 조니 미첼, 톰 웨이츠 등이 존경하는, 이미 대중음악계에선 “거장 거장"으로 인정받는 그가 다른 상도 아닌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에 대해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의심과 당황(또는 황당)으로 밤잠을 설친 눈치다. 아니 ‘어이없음’은 거의 전면적이었고 때론 공격적이었다. <쌍둥이 별>을 쓴 조디 피콜트의 비아냥(“밥 딜런의 수상을 축하한다. 그럼 이젠 내가 그래미상을 받을 차례인가”)을 비롯 작가(作歌)와 작가(作家)를 구분하려는 탄식과 지탄, 비꼼은 지난 새벽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논란의 중심은 ‘문학’과 ‘작가’의 정의였다. 노래하는 밥 딜런이 무슨 ‘작가’이며 그가 쓴 가사가 무슨 ‘문학’이냐는 얘기이다. 그럼 노벨상이 가치를 두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지금 밥 딜런의 수상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문학’을 시와 소설, 희곡 같은 일반 의미의 ‘Literature’에만 한정한 데서 당황, 분노하는 것인데 사실 노벨상위원회가 생각하는 문학은 ‘쓰는 행위’ 즉, ‘Literacy’까지 포함하는 차원에서 문학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문인들이 생각하는 ‘문인’이 아니었던 윈스턴 처칠(정치가)과 베르그송(철학자), 테오도르 몸젠(역사학자) 같은 사람들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이유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연히 노벨문학상을 받아야 할 ‘문학 작가’들에게 주로 상을 준 것은 20세기 중반부터였다. 어쩌면 이번 ‘사태’는 문인에게 문학상을 준다는 노벨문학상의 당위와 관례가 깨져버린 것에 대한 해당 업종 종사자, 그리고 그 종사자들을 추종하는 독자들의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필립 로스와 무라카미 하루키 사이에서 상의 향방이 결정날 것이라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굳이 미국 문학 수업 시간에 밥 딜런의 가사를 텍스트로 삼는 것을 근거로 내세우고 싶지는 않다. 혹자는 기껏해야 ‘음악의 파트너’로서만 딜런의 시(詩)를 이해하기도 하던데, 사실 밥 딜런의 가사는 그 자체 문학의 영역에 이미 있었다. 이번 노벨상 수상이 유력했던 소설가 조이스 캐럴 오츠의 말처럼 “딜런의 음악은 아주 깊은 의미에서 문학적”인 것이다. 가령 500페이지 분량 저서를 통해 밥 딜런의 가사를 분석한 영국의 문학 평론가이자 학자 크리스토퍼 릭스는 <황무지>로 유명한 T.S. 엘리엇과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 그리고 영국의 계관시인(桂冠詩人, 영국에서 뛰어난 시인에게 수여한 칭호:편집자주)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작품들과 밥 딜런의 작품들을 비교했다. 참고로 T.S. 엘리엇은 194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 엘리엇과 딜런이 비교 연구되었다는 사실. 꽤 많은 생각이 들게 하지 않는가.



37장의 공식 앨범. 밥 딜런을 부정하려면 ‘blowin’ in the wind’와 ‘like a rolling stone’, ‘masters of war’, ‘it's alright, ma (I'm only bleeding), ’the man in the long black coat’, 'idiot wind’, ‘the times they are a-changin’, ‘knockin’ on heaven’s door’ 등 그 숱한 가사들이 지닌 문학성까지 부정해내야만 할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까지 ‘선정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일부 비판자들의 궤변(그들은 밥 딜런 가사의 일부 ‘선정성’을 지적하며 노벨문학상 수상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간주, 매도했다)이 아닌, 정정당당하고 논리정연하게 딜런의 작품이 가진 ‘비문학성’을 하나하나 증명해나가면 될 일이다. 감정과 편견에 치우친 비판은 비난이지 비평이 아니다.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를 예로 들며 노래와 시의 긴밀성을 말한 영국 소설가 샐먼 루시디와 노벨상위원회의 선정 이유(“호머나 사포 등 그리스 시인들의 시는 원래 (읽는 것이 아니라) 공연으로 듣는 것이었다”)는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딜런 덕분에 고배를 마신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대로 상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혹은 문단적인 형식상의 추인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농담>을 쓴 밀란 쿤데라도 이 농담 같은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리라 믿는다.



또 한 명의 위대한 송라이터 겸 작가인 패티 스미스가 영혼의 단짝 로버트 메이플소프와 “가난하지만 행복한 한때”를 보낼 수 있게 해준 ‘Blonde on Blonde’의 주인. 한대수와 고 김광석에게 무한의 영감을 주고 앤디 워홀을 “걸레를 걸친 나폴레옹(Napoleon in rags)”이라고 일갈했던 위대한 포크 싱어송라이터 인생의 정점. 음악과 문학을 함께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음악과 문학을 함께 일궈온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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