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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Apr 10. 2016

이승환 단상

나는 [Human]까지 이승환을 좋아한다. 뮤지션으로서 가장 큰 칭찬을 받았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뮤지션 이승환'이 이룬 가장 주목해야할 성취라 일컫는 [Cycle]부터 이승환을 그렇다고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다. 단지 연주와 사운드가 비로소 영미팝에 근접했다는 자부심을, 만든 사람이나 들은 사람 모두가 가진 5집 이후 이승환에게 거는 기대감이란 것이 계속 편곡과 연주에만 집중되고 있는 게 조금 과해보일 뿐이다. 생산적 담론의 질식은 쟁점의 획일화에서 비롯된다. 

내가 보기에 이승환은 영화로 치자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로버트 레드포드, 아니면 밴 에플렉 정도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연기(노래)와 각본(가사), 디렉팅(프로듀싱을 비롯한 전반적인 조율) 등 모든 면에 완벽을 기하는 '장인'의 그것 말이다. 나는 그걸 단순한 집착이라 부르고 싶진 않지만 그걸 집착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은 최근 인터뷰들에서 그의 언급 때문이다. 가령 그는 "완벽주의자"라는 자신의 별명을 반 수긍하며 지난 11집의 반쪽이 "그것의 최고봉"이라고 했는데 이는 곡 당 2~3회에 걸친 믹싱과 6차례 반복된 마스터링, 그리고 1820시간의 녹음 시간과 3억8,000만원이라는 녹음 비용을 바탕 삼은 것이었다. 더 결정적인 건 스스로 "한 땀 한 땀 소리를 만드는 장인이 되고 싶다"고 한 것이나 "이번에도 사운드만은 자신 있다"는 그의 확신에 찬 말들이다.

뮤지션이 자신의 작품에 물심으로 공을 들이는 건 당연한 일이고 어떤 면에선 당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느낀 불균형은 이승환이 한 거의 모든 인터뷰에서 자신의 음악적 성취와 더불어 '대중의 외면'을 말하고 있는 것에서 불거졌다. 앨범을 계속 내야 하나라는 근본적인 고민. 이를 부추긴 앨범이 바로 "상업성에서 참패한" 지난 앨범 [Dreamizer]란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발언은 음반 시장의 추락에 발맞춰(?) [Hwantastic] 이후부턴 디지털 형식으로만 앨범을 발매하겠다던 선언 이후 그가 내보인 가장 "근본적인 고민"처럼 보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중'이다. 89년 '텅빈마음'부터 팬이었다면 그 팬은 지금 적어도 30대 중반, 많이 잡으면 40대는 거뜬히 넘었을 터다. 그들은 돈을 잘 벌기도 잘 쓰기도 하는 최고의 생산 계층이자 소비 계층. 모두는 아니겠지만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과 ‘화려하지 않은 고백’을 아꼈던 그 사람들은 아마도 나처럼 '천일동안'까지 이승환을 제일 좋아했고 아꼈을 줄로 믿는다. 이는 지난 음반 판매고가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고 실제 [Cycle]부터 평단과 대중이 이승환 음악에 보인 반응의 온도차가 증명하는 부분이기도 해서 단순히 나 혼자만의 억측은 아니리라 본다.

결국 대중이 원한 것은 무엇이었나. 바로 듣기 좋은 멜로디와 들어 와 닿는 가사일 것이다. 이승환의 목소리, 가창력은 물론 그 모든 것의 전제다. 연주력과 사운드의 질, 해외 유명 엔지니어와 연주자들이 즐비한 크레디트에 그다지 관심 없는 대다수 이승환 팬들에겐 실상 이거면 될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5집보다 [The War in Life]에 더 주목하고 싶은데 가령 '그대는 모릅니다'에서 '애인간수'로 넘어갈 때, 다시 이규호의 '세 가지 소원'이 이어질 때 많은 팬들은 오태호와 정석원, 김동률이 함께 했던 이승환의 전성기를 떠올렸을 거란 얘기다. 이른바 "사운드의 성취"에 반비례해 자신의 앨범 판매고와 대중의 관심이 식어가고 있는 건 그런 옛 감성을 이승환이 놓쳤거나 놓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앨범을 소개하며 계속 대중성과 멜로디(가령 '화양연화'같은)를 강조하는 것일 테고 대중이 좋아하는 그 무엇을 챙기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는 것이리라. 킴 벌라드나 데이비드 캠벨, 브라이언 피터스나 스티브 대디, 프랭크 마틴이 관여한 것보다 장기호와 김현철, 조동익과 정석원, 오태호가 손 댄 것을 대중이 더 좋아한다면 이승환은 당연히 후자 것도 늘 염두에 두었어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국경의 개념이라면 적어도 이규호나 황성제, 유희열과 함께 '미국' 테크니션들이 만들어낸 퀄리티를 국내에서 비슷하게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해외 녹음'이라는 반 자부심, 반 마케팅 전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 심리란 것이 어차피 서양(특히 미국)에 우호적인 한국 사람들 특유의 사대주의에 기댄 효과일 뿐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난 자신의 지난 궤적을 '추억팔이'로 치부해버리는 이승환의 자기비하에 동의할 수 없다. 그가 자부하는 그 "자신 있는 사운드"는 사실 이승환 앨범 말고도 다른 영미산産 작품들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예컨대 마이클 잭슨과 조지 마이클의 80년대 앨범들만 들어도 내 귀는 충분히 즐겁다. '위험한 낙원'이나 '손'에서 응용한 클래식 어레인지, '악녀탄생'부터 ‘Star Wars’까지 줄곧 이어져온 펑키 브라스 섹션을 이승환이 굳이 "심화"시키지 않아도 그것들은 이승환보다 더 돈 많고 더, 또는 엇비슷하게 음악 잘하는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생산, 재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페이건이 듣고 싶은 사람들이 굳이 이승환을 찾아 들을 필요가 없고 소비자 입장에선 'The Future'보다 골디(Goldie)를 듣는 게 어쩌면 더 값진 일일지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5집부터 이승환을 부정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 11집까지 이승환의 과거 예닐곱 장은 모두 훌륭했고 나름 의미 있는 작품들이었다. 그저 내가 그에게 바라고 싶은 건 이제 궤도에 오른 편곡과 연주에의 관심(또는 집착)보다 "반칙이 원칙이 될 테고"(‘Life's So Ironic’)같은 자신만의 희언법과 ‘Sorry’처럼 대중에게 다가가겠다는 음악적 의지를 좀 더 다졌으면 하는 것이다. 인터뷰들을 읽으며 상업성과 예술성의 "소통의 오류"를 그 역시 바라지 않는다는 걸 확신한 끝에 이 두서없는 넋두릴 갈겼다. 나는 '좋은 날'을 좋아하는 여전한 그의 팬으로서 이승환이 ‘돈 잘 버는 인디 뮤지션’이나 ‘장르 소매상’으로 기억되지 않길 바란다.


* 인터뷰 내용은 <텐아시아>, <한겨레신문> 것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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