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사이드 <경계의 음악>을 읽고
가끔 그런 사람들을 본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음악을 듣고 있고 또 알고 있는지 과시하려는 치들을. 경험상 그런 이들이 내놓는 식견과 관점이란 대부분 깊이가 없고 겉도는 수준에 머문다. 책으로 치면 말 그대로 ‘넓고 얕게’ 개념만 짚고 넘어가는 <지대넓얕> 수준이랄까. 그럼에도, 인간이 평생을 바쳐도 이룰 수 없는 것을 그들은 이미 다 이룬 것 마냥 쓰거나 말한다. 염치가 없다.
관련 통사 좀 외고 뮤지션의 이름 정도 언급하는 수준에 각 음악장르들의 대표 명반 몇 십 장씩 꿰고 있는 걸로 전문가인양 행세하려 드는 이들은 그래서 가짜다. 음악을 많이 들어본 사람들은 안다. 한 장르, 한 뮤지션만 파도 평생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이 절박하면서도 확고한 진실을 이 ‘가짜’들은 너무나 쉽게 무시하고 자신의 얕은 지식을 부끄러움 없이 대중에게 팔며 평론가로서, 또 강연자·방송인으로서 연명하며 산다. 내가 아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려면 그 앎에 완벽을 기하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게 이치임에도 가짜들은 그 노력을 외면하고 자신이 갖춘 불완전성을 완전함으로 둔갑시켜 지금도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
단순히 많이 들어 아는 척 해 인정받는 시대는 지났다. 청취의 양은 성찰의 질을 위한 담보가 되어야지, 질을 위한 고찰 없이 음악 듣는 양 자체에만 집착하면 그건 애호가일 뿐, 그런 사람을 세상은 평론가라 부르진 않는다. 물론 많이 듣는 건 중요하다. 재즈평론가라 해서 아이돌을 무시하고 국악평론가라 해서 헤비메탈을 등한시해선 안 된다. 그런 사람은 편협한 글을 쓰고 속 빈 발언만 일삼을 게 뻔하다. 록을 듣다 재즈에 빠지는 것이 마치 당위인 것 마냥, 그렇게 해야만 청취자로서 수준이 높아지는 것처럼 묘사하는 일부 취향 계급론자들의 시건방짐 역시 균형 있는 사유를 지향하길 원하는 음악평론가라면 지양해야 할 자세다. 나는 다만, 평론하는 자 개인이 자신 있고 좋아하는 분야를 깊게 파되 파는 삽날을 좀 더 날카롭게 다듬는 차원에서 ‘다양한 장르 섭렵’을 긍정하려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 국내 대중음악 평론계가 무작위 비평이 아닌 장르별 전문 평론으로 가려는 모습은 그나마 고무적이다.
바야흐로 ‘음악의 경계’를 생각해봐야 할 때다. 취향 만족만을 위한 청취자들을 뺀, 적어도 음악으로 평론을 하겠다는 사람들끼린 더 나누고 더 쪼개 각자 분야에서 더 깊이 들여다보며 대중문화 담론 성장에 일조할 고민을 함께 해야겠다. 한 사람이 밥 딜런과 투팍, 마일즈 데이비스와 메탈리카, 신중현과 백현진, 레드벨벳과 비와이에 관해 모두 말할 수 없는 건 자명하다. 하물며 일렉트로닉, 록, 재즈, 힙합, 블루스와 모타운, ECM, 데프잼, 몬스터캣 등 모르는 음악 장르, 레이블들이 없는 듯 구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윤호준 평론가의 말처럼 그것은 젓다가 내밀 여유조차 없기에 영원히 들키지 않을 “아는 척의 오리발”일 뿐이다.
세계적인 석학이자 음악평론가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경계의 음악>은 그런 사이비 평론가들에게 일침을 날리는 책이다. 1982년 캐나다의 피아노 천재 글렌 굴드의 죽음을 계기로 음악 비평에 빠져든 사이드는 문학과 철학, 정치와 사회에 대한 깊은 조예가 음악 평론에 스며들면 어떤 결과물이 나오는지를 보여준 사람이다. 그의 문장은 음악을 평론하는 사람이 왜 인문학과 친해야 하는지, 또 그렇게 소화시킨 인문학을 어떤 식으로 음악에 결부시켜 글로써 배설해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그런 사이드의 “동떨어져 보이는 문제들을 연결해내는 통찰”력을 책 추천사에서 언급하며 “오케스트레이션 분야에 대한 정밀한 지식, 디테일에 대한 꼼꼼한 관심, 바흐 연주를 분석하면서 존 키츠를 인용하는” 사이드를 추억했다. 그것은 성공회대 정윤수 교수가 책 해설에 쓴 것처럼 “벽돌 한 장의 단편적인 정보를 꿰뚫고 들어가 당대의 지적 풍경이나 문화 상황을 집단 초상화 그리듯 펼쳐 보인” 사이드의 통찰력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그리고 선택과 집중. 사이드의 아내 매리엄 C. 사이드는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에드워드는) 굴드가 남긴 녹음 가운데 입수 가능한 건 모두 구해 들었고, 굴드에 대한 글과 굴드가 직접 쓴 글을 모두 읽었다. 또한 굴드의 음반과 관련된 모든 영상 자료와 굴드를 주제로 한 영상물을 시청했다. 에드워드는 굴드에 강하게 집착했고, 자신이 사랑한 천재를 도무지 놓아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이드는 그런 굴드의 기교에 “기교라는 존재를 까맣게 잊게 하는 경지”라는 찬사를 보탰고, 언드라시 시프의 연주를 향해선 “통제돼 있으면서도 열정적이었고, 지성적이면서도 강렬했다”고 극찬했다. 폴리니가 연주한 ‘황제협주곡’에 대해서도 사이드는 “묵직한 망치처럼 다가오는 1악장 발전부의 C♭단조 화음과 여기에 이어지는 E♭옥타브 스케일은, 당최 그러한 힘이 돌연 어디에서 솟아난 것인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압도적이었다”고 썼다. 사이드의 글은 이처럼 인상비평과 연주비평을 점잖게 교차시킨 끝에 비로소 독자의 뜨거운 공감을 얻어낸다. 비록 “관객과 해석자를 가르는 장벽을 허물면서도 음악의 본질적인 고요를 침범하지 않는 종류의 연주”가 훌륭한 피아니즘이라 쓸 수 있거나, 줄리어드 음대 입학 직전까지 갔던 사이드처럼 음악을 세세하게 분석할 순 없더라도 그러기 위해 각자가 저마다 방식으로 노력을 해나가야 한다는 건 분명 국내 음악평론가들이 함께 안고 가야 할 전문가로서 지침, 숙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굴드와 사랑에 빠진 사이드식 집중력이 기반이 돼야 한다는 강조가 <경계의 음악> 전반엔 흐르고 있다.
한 음악평론가가 살아서 한 장르를 다 듣는 건 불가능하다. 여기서 ‘듣는다’는 건 양을 넘어, 들은 것을 이해하고 통찰하는 데까지 완성을 전제로 한 ‘듣기’다. 그런 면에서 한 사람이 한 뮤지션을 온전히 써내는 일도 대상에 따라선 평생을 바쳐야 할 경우도 있다. 결국 이런 얘기다. 자신을 진정 평론가라 여긴다면 많이 듣되 스스로 좋아하고 잘 아는 분야, 잘 아는 뮤지션을 정해 파면서 들으라는 얘기다. 그 외 장르와 음악가들은 자신의 전문이라 내세울 수 있을 분야를 논하는 과정 속에 함께 녹여내면 족하다. 여기에 사이드처럼 음악이론과 인상비평을 곁들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터.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그런 ‘진짜’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음악평론가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것이 어떤 것이고 어떤 과정을 거쳐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인지를, 또 음악 평론에 왜 경계가 필요한지 자신의 책 <경계의 음악>으로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