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여행기 #16. 황금열매
시장투어.
내가 여행 중에 특히 좋아하는 시간이다.
생필품과 현지 식자재가 가득한 곳. 시장. 거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하는 먹고사니즘을 가장 리얼하게 만날 수 있는 장소다. 그곳에 가면 진짜 현지를 만날 수 있다. 이국적인 시공간이지만 어디를 가도 낯설지 않은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볼거리 천국이다. 때문에 나는 여행지 시장 구경을 좋아한다.
장터에 가서, 생동감 넘치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 현지 냄새를 폴폴 맡으며, 현지 언어로 쓰인 가격표를 구경하고, 저마다의 스타일로 디스플레이한 매대를 관찰한다. 동남아에서는 야시장을, 일본에서는 편의점을, 유럽에 가면 마을 시장을, 미국에 가면 마트를 그렇게 구경한다. 그럴 때면 내 눈동자는 바쁘게 움직인다. 분명 필요한 게 있어서 들르지만, 무엇이 필요하다는 건 사실 핑계다. 유명 미술관이나 건축물을 감상하는 때처럼 신나서 모든 물건을 세세하게 살핀다. 불필요한 것도 들어보고 읽어보고 흔들어본다.
페루의 시장. 그곳에도 볼거리가 많았다.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황금열매라고 불리는 '루쿠마'다.
여느 여행 때처럼 나는 '뭐 색다른 거 없나'하며 페루의 시내 시장을 살폈다. 그러던 내 눈에 그 생소한 열매가 들어왔다.
“오잉 이건 뭘까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과일이 놓여있었다. 아보카도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빛깔이 좀 더 연했다. 크기도 1-2센티미터 정도 더 작았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소비 요정이 찾아와 하나만 사보라며 나를 부추겼다.
“이거 뭔지 궁금한데…. 사서 먹어볼까요?”
조심스레 다른 일행들의 의견을 물었다. 나보다 더 모험심이 강한 A는 무조건 좋다고 했다. C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빠르게 아주머니에게 '이거 주세요'라고 말했다. 괜히 의견을 물어봤나 싶을 정도로 그렇게 금방 구매가 결정됐다. 갈팡질팡하며 고민하는 시간 따위는 없었다. 막상 그렇게 쉽게 사고 나니, 괜스레 '맛이 없으면 어쩌지'하며 걱정스러운 맘이 들었다. 그래도 한두 개니까. 맛이 별로여도 다 경험이라며 웃어넘기면 되겠지. 나는 뚠뚠 거리며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과연 어떤 맛일까 상상했다.
드디어 숙소에 돌아와 신비에 감춰져 있던 그 과일을 반으로 쓱 잘라보았는데 놀란 소리가 나왔다.
“어머머. 이거 보세요.”
진노랑색 낯선 속살. 반으로 쩍 갈라진 루쿠마는 예상외의 모습을 드러났다. 껍질 속에는 보드라운 과육이 숨어있었다. 아보카도처럼 한가운데에 씨가 있었고, 씨를 주변으로 찐 고구마 같은 물렁한 과일이 채워있었다. 과육에는 세로로 결이 나 있었다. 마치 군고구마 같았다. 색깔도 질감도 딱 호박고구마랑 비슷했다.
그 맛이 궁금하면서도 나는 선뜻 먹어보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다. 슬쩍 눈치만 보고 있는 나보다 앞서서, A가 맛을 봤다. 한 입 베어 문 A에게서 맛있는 소리가 났다.
“으흐음~~~~”
“어때요? 괜찮아요?”
“한 번 맛보세요.(엄지 척) 엄청 단 호박 고구마 맛이에요.”
그제야 나도 과도에 살짝 묻은 과육을 조금 덜어내서 입에 넣었다. 어라. 신기하다. 맛있잖아. 또 먹고 싶은 맛이었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면 당도가 높은 호박고구마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유사했다. 항공기 규정만 없다면 몇 개 사서 가져가고 싶은 탐나는 열매였다. 황금열매. 이 혁신적인 열매를 모르고 살았다니.
그때까지 나에게 맛있는 노란색 맛은 '카레'와 '애플망고'정도가 전부였지만, 그날 부러 내가 아는 노란색 맛이 하나 도 생겼다. 여행을 하면 이런 장점도 있구나. 처음 경험했다. 맛의 영역이 확장되는 기분을.
또 다른 여행지를 가면, 그때는 더 용감하게 신기하고 진귀한 것들을 맛보고 싶다. 시장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구경하고. 새로운 맛에 도전해보면서. 맛있는 기억을 많이 만들면 좋겠다.'그래 그런 멋진 맛도 있었지.' '그래 그런 지옥 같은 맛도 있었지.'이러면서. 세상의 다양한 맛을 익히고 배우고 경험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