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5살에 고아원에 가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따뜻하게 돌보아주던 어느 임시 보호 할머니를 떠났다. 까만 봉고차를 타고 고아원에 갔다고 한다. 고아원은 아이들을 잘 돌보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그곳에 사는 동안 A는 학교를 다녔고 그런대로 지붕 아래서 잠잘 수 있었다. 가끔 봉사를 온 요리사들에게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지냈다고 했다. 그러나 집단으로 아이들을 보려면 규칙이 필요했고 왜소하고 눈치가 조금 부족했던 A는 형들과 선생님들에게 종종 맞았다. A는 입양되기도 했단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무슨 불운으로 입양자는 얼마 못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A는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왔다.
A의 심리 밑바닥에는 `나는 버려졌다`라는 마음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A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원망하진 않았다고 했다. 그저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거니 했다.
A가 중학교에 간 무렵 A의 인생을 바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갑자기 A의 아버지가 나타난 것이다. A의 세상은 무지갯빛으로 변했다. 난 버려진 것이 아니었구나. 나에게도 부모가, 가족이, 아빠가 있어! 게다가 이제는 나를 데리고 가준대. 난 이제 행복해질 거야.
A는 고아원 아이들의 절절한 부러움이 담긴 눈빛을 받으며 고아원을 떠났다. 그런데 집에 가보니, 어떤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새엄마와 동생들이었다. 누구냐는 새엄마의 물음에 아빠는 자기 자식이라고 했다. 남편이 이미 한번 결혼한 적 있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은 새엄마는 그날 아빠와 싸웠다. 가정을 이루고 사니 버린 자식이 눈에 밟혀 데리고 왔다는 아빠의 말에 갑자기 튀어나온 남의 아들을 키우게 된 젊은 엄미는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A는 결국 받아들여졌지만 곧 그 가정 속 자신의 위치를 절감한다.
아빠는 오토바이 배달원이었다. 동네 시장에서 물건 배달을 하는. 기대에 차서 온 집은 생각보다 풍족하지 않았다.
아빠는 일하느라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새엄마는 어려운 살림에 유치원 다니는 새 동생 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무엇보다 A를 싫어했다. A는 아빠와 있으면 좋았지만 가장 노릇 못 하는 아빠는 새엄마에게 잡혀 살았다. 무엇보다 A가 아빠와 있는 시간보다 새엄마와 지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새엄마는 A에게 집안일을 시키고 동생들을 돌보게 했다. 불행히도 A는 고아원에서 집안일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고아원에서 아이들에게 집안일을 시키면 아동학대라고 안 시켰다고 했다. 새엄마는 A를 미워했다. 아주 많이. 새엄마는 아빠가 들어오면 A를 험담했다. A는 자기가 집에 들어가면 새엄마가 자기를 보는 눈빛이 있다고 했다.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리고 A가 새 동생을 성추행했다고 새엄마가 아빠에게 거짓말을 한 날, A는 집을 나왔다.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엄연히 부모가 살아있고 데리고 나왔으므로 고아원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한동안은 가출해서도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출석에 구멍이 많았지만 중학교는 졸업할 수 있었다.
A는 지하철에서, 건물 구석의 빈 곳에서, 화장실에서 잤다고 했다. 한겨울 영하의 날씨에 상자를 덮고 웅크리고 누워 있을 때는 자는 게 아니라 버티는 거라고 했다. 한잠도 못 자고 일어나면 거리를 떠돌았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고 했다. 가출 청소년 쉼터도 갔다. 거의 전국의 웬만한 쉼터는 다 자기 이름이 있을 거라고 했다. 왜소한 A는 가출한 아이들끼리의 세력 다툼에 밀려 맞고, 누명 쓰고, 내쫓기고, 형들에게 성추행당했다. 왜 쉼터를 안 가냐는 질문에 `거긴 죽어도 다시 안 가요. 게이들이 있어.`라며 A는 치를 떨었다.
A는 담배를 배웠다. 그래야 길거리 아이들 무리에 낄 수 있었다. 그건 A에게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무리 속에 있어야 다른 아이들에게 얻어맞지 않고, 가끔 친구들이 사주는 군것질거리로 끼니를 때우며, 운이 좋으면 친구 집 지붕 아래서 하룻밤을 잘 수 있었다. 친구는 빨리, 많이 사귈수록 좋다. 친구가 있느냐 없느냐는 생존을 결정했다. 그리고 친구란 존재는 크레이터만큼 깊은 A의 외로움을 채워주는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성냥개비를 쌓은 것 같은 허술한 하루 이틀의 신뢰가 기반이더라도.
반대로 어른들은 못 되었다. 착한 어른은 도와주겠다며 친절히 경찰서로 A를 데려갔고 경찰은 A를 집으로 보냈다. A는 새엄마의 구박을 받고 아버지의 도대체 왜 이러냐는 호통과 함께 맞았다. 그러면 A는 집을 나왔다. 못된 어른은 밥과 숙소를 제공한다며 A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A는 돈 많은 아줌마들에게 성추행을 당하거나 어딘가로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곳에서 도망 나오기도 했다. 지금도 거기가 뭐하는데 였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A는 술도 배웠다. 동네마다 일명 '동네 형'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냥 좀 덜떨어진 형이거나, 주먹을 쓰는 동네 건달이거나, 혹은 전과가 있는 형들이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이유로 술판을 벌여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에게 술을 먹었다. A는 대부분 안주로 끼니를 때우려다가 술을 마시게 됐다. 차라리 좀 덜떨어진 형이 그나마 나았다. 그 형들은 외로움에 아이들과 술을 마시는, 말 그대로 조금 모자라서 또래 친구가 없는 형들이었다. 주먹 쓰는 형님에게 술과 밥을 얻어먹으면 형들이 부를 때 재깍 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배신자로 몰려 맞거나 밥을 얻어먹을 수 없다. 사실 이들도 10대의 영광에 취해 사실상 사회에 수용되지 못하고 어린애들과 힘자랑 놀이를 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이 형들이 부르는 곳엔 늘 명분 없는 패싸움판이 벌어졌고 재수가 없으면 A는 그곳에 서 있기만 해도 한패로 몰리거나 누명을 쓰고 '소년 전과자'가 되었다. 경찰서에서 다른 아이들은 부모에게 얻어맞고 혼이 났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부모님들이 경찰들에게 싹싹 용서를 빌면 가볍게 훈방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아빠가 A를 데리러 몇 번 왔다. 그러나 가출이 길어지고 이런 일이 반복되자 새엄마의 눈치에 아빠는 오지 않았다. A는 몇몇 호라는 이름이 붙은 보호처분을 받고 매주 한두 번씩 보호관찰소를 가야 했다. 그러나 A는 매번 잊어버려서, 보호관찰소에 갈 차비가 없어서, 가출 생활 속에서 살아남으려 아등바등하느라 가지 못했다. 가더라도 A는 20분의 교육 후 밖으로 내보내 졌고 다시 배고픔을 해결하려 별 볼 일 없는 형들과 어울리며 보호처분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A는 가출 친구 B가 있었다. B는 상대적으로 예쁘장하고 약한 A를 보호하고 동시에 착취했다. 그러나 A는 B가 없으면 가출 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함께 다닐 수밖에 없었다. 둘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길거리에서 여자 친구들을 사귀었다. 단 가출하지 않았지만 그저 좀 놀고 순진한 아이들. 그래야 '사랑하니까' 여자 친구들이 사주는 끼니를 얻어먹고 집에 얹혀 지붕 아래서 잘 수 있었다. 이때 B의 여자 친구는 상담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상담사는 이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여자아이 주변을 맴도는 더더욱 갈 곳 없는 남자아이 둘을 발견했다. 상담사는 조금 이상하고 특이한 센터에 이 두 아이들을 맡겼다.
처음 만난 날, 나는 A를 보면서 털 빠진 노랑 병아리를 떠올렸다. A는 남자아이 치고는 예쁘장한 아이였다. 실제로 A는 예쁘고 약했기 때문에 길거리 생활에서 수없이 당하고 살았다. 둘은 아주 지쳐 있었다. 거의 일주일 내내 잠을 안 잤다고 했다. 둘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씻지도, 먹지도 않고 안내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말, 죽은 것처럼 이틀을 이불 위에 쓰러져 내리 잤다. 우린 두 아이가 살아있나 확인해볼 지경이었다.
당연히, 깨어난 두 아이는 미친 듯이 먹었다. 처음 온 한 달 동안 두 아이는 끝도 없이 고기를 먹고 또 먹었다. A는 그때 너무 말라 허리 사이즈가 맞는 남자 옷이 없어 여자 옷을 사 입힐 지경이었다. 이 먹는 일 때문에 사고가 날 뻔했다. 우린 아이들에게 밥을 해서 주지 않았다. 대신 직접 함께 장을 보고, 함께 요리를 해서 먹였다. 정 안되면 일반 가정집처럼 밥솥에 항상 있는 밥과 냉장고에 항상 있는 반찬을 마음대로 꺼내먹게 했다. 이게 A는 사실 좀 귀찮았나 보다. A는 청소년 센터에 우리를 신고했다. 밥도 안 해주고 굶긴다고. 아이러니하게도 센터에서 불시점검을 온 어느 점심, 우린 다 같이 신나게 삼겹살을 산처럼 쌓아놓고 구워 먹고 있던 중이었다. 우리는 밥 먹는 도중 들이닥친 불시점검에 당황했지만 우리가 아이들을 굶기긴커녕 '산처럼' 쌓아놓고 먹이고 있었기 때문에 한 청소년의 투정 섞인 불평으로 마무리되었다.
처음 온 한 달 동안, 우린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A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A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A가 하고자 하는 바는 항상 B가 잽싸게 대신 이야기했다. 무얼 물어도, 이야기를 해도, A는 그저 예쁘게 빙그레 웃기만 했다. 우린 A가 벙어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는 곧 둘만 있는 방안에서만은 A가 B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한두 달간, 아이들은 우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잘 지내려 했고 예의 바르게, 밉보이고 찍히지 않기 위해, 성실하고 깨끗하게 보이려 정말 노력했다. 지금 가진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지만 사실 이 아이들은 지속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실, 평범한 삶에 대해 잘 몰랐다. 아무리 '척'해도 경험해보지 않으니 몰랐던 것 같다. 그리고 곧 지치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 그 아이들이 살던 세계는 평화로운 삶과 거리가 멀었다. 점점 길거리에서 살던 버릇, 나쁜 습관, 어른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거 없는 불신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태어날 때부터 술을 물이라고 알고 마시던 사람은 시간이 흐른 후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바꾸기가 무척 어렵다. 이미 익숙해져서다. 거기에 모든 정신, 몸, 정서 상태가 고정되어 있다. 이 아이들은 삶의 모든 전반이 이러했다. 사소한 부분부터, 구조적인 부분까지. 사랑이란 아주 멀리서 전설처럼 들려오는 일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사랑이란 동화 같다고 생각했다. 많은 평범한 집들이 부부간에 싸우고, 형제끼리 싸우고, 부모에게 야단맞고, 아이는 반항한다. 하지만 가족은 결국 다시 화해하고 '어이구...' 하는 마음과 함께 잊어버리고 다 같이 저녁밥을 먹는 거다.
이 아이들은 그런 걸 경험한 적이 없었다. 엄마는 무조건 친절해야 정상이고, 아빠는 무조건 듬직하며, 자식은 항상 착해야 한다. 우린 그게 텔레비전 광고 속에서 물건이나 팔려고 만들어낸 환상임을 안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고, 심지어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들 스스로 조차 착한 자식이 아니지 않은가. 그 괴리감 속에서 아이들은 분노하고 자책했다. 아이들은 텔레비전 속 세상이 진짜 세상이라고 믿었다. 왜냐면 그들에게 가장 강한 영향을 미치는 건 부모나 가정이 아니라 텔레비전이나 본인들과 비슷한 또래들 뿐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 사고방식을 충분히 현실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변화시키려 노력했다. 물론 잘 되지 않았고 절대 쉽지 않았다. 여전히 그 여파가 많이 남아있기도 하다. 누군가의 사고방식, 생각을 바꾼다는 건 정말 어렵고 위험하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 거의 불가능할 때도 있다. 아이들의 사고방식은 길거리 가출 생활에 더 적합했다. 그러나 그곳은 너무 힘들고 비상식적이었다. 그곳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삶을 사는 수준으로 가고자 한다면 그 사고방식을 버리고 바꿔야 했다.
예를 들어, 가출 청소년은 경찰을 불신하고 피한다. 걸리면 가기 싫은 집으로 돌아가고 물건을 훔치는 등 범죄를 저질렀다면 보호처분을 받아 잔소리를 듣거나 소년원을 가게 되니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은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일단 경찰을 부르고 기본적으로 경찰을 신뢰한다. 그래야 본인이 지켜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대조적으로, 경찰을 피하므로 이러한 아이들은 정말 위험할 때 보호받지 못한다.
이들의 몇몇 사고방식은 아주 낮은 생활수준을 영위하는 수준이거나 심지어 범죄 집단의 사고방식에 필적할 정도다. 그러나 결국 그 시작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것, 혹은 무언가의 부재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사실 어리고 아직 순수하다고 할 만큼의 무언가가 있다. 분명히 이대로 버리기엔 아쉬운 무언가가 있다. 난 그렇게 믿는다. 보이지 않는 신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종교처럼.
어쨌든, 아이들은 점점 편하고, 길거리에서 처럼 거칠고, 대들고, 폭력적으로 변했다. 우리는 되도록 너무 선을 넘지 않는다면 수용하려 했다. 이들이 겪은 일들로 쌓인 무의식 저 너머까지 쌓인 분노와 절망은 끝이 없어 보였다. A는 사실, 약해서 우리에게 오래 남을 수 있었다. 얼마 못가 B는 거친 행동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B가 떠나고, 우리는 드디어 A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A는 자신의 방에서 홀로 편안히 있기를 좋아했다. 우리는 한동안 A에게 별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우린 마치 평범한 집의 방학 때처럼 일어나서 밥을 먹고, 노닥거리고, 장보고, 이야기하고, 밤이 되면 자고. 그런 기본적인 것들을 거의 6~7개월 정도 했던 것 같다. 왜냐면, 이러한 일이 A에게는 절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밥을 굶는 일이 많아 대충이라도 시간을 맞춰 식사하는 것을 익숙지 않아했다. 잠은 기회가 될 때 자고, 때론 힘들 때는 며칠씩 못 자기도 하니 수면시간도 불규칙했다. 특히 이 수면시간은 정상적인 수준으로 고치는데 거의 2년이 걸렸다. 가족들이 집에서 느끼는 편안함, 편안히 집에서 지내는 것, 때로는 혼자 있는 것. 이 모든 게 A에게는 다 미션이었다. 우린 마치 걸어 다니고 한국말하는 영아를 기르는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걸 하나하나 다 다시 깔아야 했다. 일부분은 결국 전혀 안되기도 했다.
물론 우리는 남이니 완전히 가족 같을 수는 없다. 아이들도 알고 있고 우리도 알고 있다. 그러나 A는 집으로 돌아가기 어려웠다. 그리고 우린 '가족, 혹은 편안한 내 집'이라는 것 없이 사람은 사실 절대 온전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우린 그 비슷한 것이라도 해주려 했다. 물론 성공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놔두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 후 우리는 A에게 검정고시 시험도 치게도 하고, 매일 아침 깨워 교문 앞까지 데려다주며 고등학교도 다시 보냈다. 결국 다 실패하고 자퇴했지만. 여러 가지 기술들을 배우게도 했고 경험도 시켰다. 우린 깔깔 웃던 날도 많았고 벙어리 같던 예전이 무색하게 죽일 듯이 서로 소리 지르며 싸우던 날들도 정말 많았다. 하지만 우린 그냥 다시 같이 밥 먹고 결국 돌아와 만났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어 자립도 시켰다. 3년 정도를 함께 지낸 것 같다.
A는 치킨집에서 치킨을 튀기는 일을 구해서 일했고 지금도 친한 친구인 B와 함께 일을 나가기도 한다. 우리는 A가 그래도 평범하게 생활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다 종종 있는 '그냥 그날따라 힘든 날'에는 마치 친정집 들르듯 찾아온다. 밥도 먹고. 이야기도 조금 하고. 새로운 동생들이랑 이야기도 하고 그러면서.
A는 몇 가지 한계가 있었지만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살았다면 평범하게, 지금보다는 조금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 같다는 데에 우리 모두 입을 모았었다.
물론 지금도 아주 작지만
1cm씩이라도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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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여리지만 그 누구보다 강렬하고 절절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A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