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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Feb 13. 2018

가로등 아래 소년들 2

B의 이야기

 B는 엄마를 사랑했다. 우리도 B의 엄마는 따뜻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 거라고 생각한다. 거친 B에게 언뜻언뜻 비치는 따뜻함은 B의 엄마가 주신 걸 거다. 

그러나 그녀는 불행히도 B가 어렸을 때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B의 아버지는 거칠었고 어린 B를 두고 떠나버렸다. B는 부모 없이 혼자 남겨졌다.

그러나 B는 똑똑했 자신을 돌볼 줄 알았다. B는 소년가장이 되어 동사무소에서 주는 쌀로 밥을 해 먹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혼자 학교도 다녔다.

어느 날 어느 마음씨 좋은 동사무소 직원이 B의 친척인 할아버지 찾아냈다. B는 할아버지의 보호 아래 살게 되었다. 그곳에는 처음 보는 형도 있었다. 할머니는 따뜻했고 무너져 내리는 집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배다른 형과 할아버지는 지나치게 엄격했고 이기적이었다. 형과 할아버지는 B를 구박하고 때렸다. B는 차라리 혼자 살던 때가 더 나았다고 했. B에게 나오던 집과 기초수급권 등은 모두 할아버지에게 넘어갔다. B는 중학교 들어갈 무렵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건강하고 힘센 B는 태권도 소년 국가대표 꿈꿨지만 환경과 여건, 할아버지 성화로 포기해야 했다. B는 주먹을 다른 곳으로 쓰기 시작했다. B는 학교에서 혼자였고 길거리 아이들 지내며 술 담배를 배웠다. 그리고 학교에서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A도 만났다. A는 남자아이 치고 예쁘장했고 약했다. B는 A와 점차 가출을 다니며 힘없는 A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다만, 그건 절대 일방적인 헌신은 아니었다. B는 덩치 힘도 있었고, A보다 머리도 좋았다. B는 A를 보호하긴 했지만 독선적이었고, 문제가 생기면 자신보다 전과가 적은 A에게 뒤집어 씌우기도 했다. 자신은 전과가 더 추가되면 소년원에 들어갈 판이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A는 쉼터에서 쉽게 더러운 형들의 먹잇감 되었고 B는 쉼터에서 A 대신 싸우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A 함께 다니는 B는 어느 쉼터도 갈 수 없었다. A와 B는 지쳤다. 둘은 노숙을 하기도 하고 호빠나 어린 십 대 남자아이들을 데리고 노는 추잡한 아줌마들과 돈을 받고 '놀아'주기도 했다. 우리가 처음 A와 B를 만났을 때, 예쁘장한 A뿐만 아니라 꽤 남자답게 생겼던 B까지도 화장을 하고 다녔다


B A 우리에게 왔다. 그러나 약하기 때문에 겉으로 순종적이었지만 속은 분노로 가득한 A와 달리 B는 힘도 의사표시도 강했다. 그리고 결국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우리를 떠났다. 하지만 우리는 완전히 B를 버리지는 않았다. 얼마 뒤 B는 오토바이를 훔쳐 법원에서 재판을 받는다고 연락했다. 보호자인 할아버지 오지 않는다며 와달라고 했다. 우리는 노력하려 했. 그러나 B는 뉘우치고 용서를 빌면 봐주겠다는 판사에게 웃기지 말라며 대들고 싸웠다. 그 바람에 결국 B 감별소 한 달간 가게 되었다.
그때 B는 그만큼 거칠었다.


감별소 가기 전날 우린 B에게 식당에서 밥을 사 먹였다. B는 별 아니라고 큰소리치며 갔다.


그리고 한 달 뒤 B는 사회의 쓴 맛을 보고 돌아왔다. 괄괄하던 기세도 많이 누그러지고 별소 생활을 이야기하며 울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쯤 시간이 꽤 지나 A도 B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성장했으므로, 그리고 무엇보다 B의 사과로 B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B 역시 A처럼 우리와 3년 정도를 지냈다.  B는 고등학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으므로 우리는 B를 고등학교는 보내지 않았다. B는 기술교육을 통해 자격증을 땄다. B는 툴툴대고 거칠어서 절대 다루기 쉬운 학생이 아니었지만 다행히 지혜로운 선생님을 만나 잘 배울 수 있었다. B는 사실 머리도 좋고 체력도 좋았다. 뭐든 해서 못 할 것이 없었다.


우린 명절마다 아이들을 집에 다녀오도록 했다. 제아무리 막장스러운 집이라도 가족과 연이 끊어진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는 기본적인 마음 상태가 달랐기 때문이다. 새엄마는 싫지만 아빠는 사랑한 A는 집에 하루라도 다녀왔다. 물론 후폭풍이 거셀 때도 있었지만 아빠에게 자전거나 운동화를 받고 아이처럼 좋아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B는 늘 집에 다녀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우리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넘어갔다. B는 스스로 혼자 살겠다는 의지가 강했고 집을 정말 벗어나고 싶어 했다. 특히 B의 할아버지가 심했다. 그 덩치 큰 B가 전화를 붙들고 '도대체 왜 할아버지는 계속 내 앞길을 막는 거예요?!'라며 울음 섞인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B의 할아버지 우 입장에서도 굉장한 골칫덩이였다. B가 우리에게 있다고 기본적인 연락을 하자 자신에게 피해가 가는지, 수급이 끊기는 거 아니냐며 새벽부터 밤까지 미친 사람처럼 전화해서 닦달하곤 했. 할아버지는 심지어 B 병원에 가거나 청소년증을 만드려고 하는 경우까지 훼방을 놓았다. 우리가 B 할아버지 아동학대로 신고하려 하자 그 누구보다도 고통받은 B는 '다 늙은 영감탱이 불쌍해요. 놔둬요. 나는 젊으니까 뭐든 할 수 있지만. 할아버지가 뭘 할 수 있겠어요'라고 했다.


우리는 아이들을 동네 이웃들 속에 어울리게 하려 했다. 동네 마을 상인들 아이들을 알았고 그 좋은 분들은 아이들을 따뜻하게 살펴주셨다. 특히 B는 마을 상인분들이 특히나 마음을 써주셨다. 왜냐면 B는 아이 아빠이기 때문이다.


B는 말 그대로 동갑내기 여자 친구와 스무 살이 되기 전 사고를 쳤다. 여자 친구는 낙태를 하기에도 너무 늦었다. 우리는 걱정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반응이 딴판이었다. 일단, B도 여자 친구도 사실 아이를 낙태할 생각 애초에 없었다. 둘은 놀랍게도 '진심으로' 아이를 낳고 싶어 했고 그렇게 했다. 늘 피던 담배를 끊고 술을 끊었다. B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잠을 줄이며 밤낮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예전의 B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길거리 떠돌던 두 아이는 드디어 자신이 만든 가족 안에서 정착하고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둘은 이제 더 이상 외롭고 혼자인 기분을 느낄 일도 없었다. 아이와 가족이 생긴다는 건 B에게 열심히 살아갈 이유와 의미를 심어주었다. B는 정말 가정을 이루고 싶어 했고 그걸 실현했다.

우리는 B가 여자 친구를 버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정반대였다. B의 할아버지 어떻게든 아이를 낙태시키고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부모 동의 없이 불가능한 결혼도 막았고 DNA 검사를 해보라며 난리를 쳤다. 그러나 B는 끄떡도 안 했다. 법적으로 여자 친구는 미혼모여서 시설에 있었다. 그러나 B는 여자 친구를 떠나지 않고 주말마다 번 돈을 전부 여자 친구에게 주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B의 여자 친구는 B를 만나러 올 때 시설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남자들에게 버림받고 홀로 아이와 남은 아이들에게 B의 여자 친구는 절절하게 부러움의 대상이 될  만했다. 여자 친구는 미혼모 시설의 도움으로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했다. B는 그 늘 부리던 고집으로 가정을 책임지기 시작했다.


아이의 돌잔치에 덩치 큰 B는  잡히지도 않을 만큼 작은 아기 숟가락 들고 딸에게 밥을 먹이고 있었다. 우리는 B의 표정이, 분위기가 훨씬 편안하고 긍정적으로 바뀌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여자 친구는 시설에서 기간이 되어 퇴소했다. 그녀가 퇴소했을 때 B는 밤낮으로 번 돈으로 작지만 소박한 신혼집을 마련해놓았다. 그들은 조금씩 주변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그들 스스로 살고 있다. B는 그 덩치에 마누라에게 잡혀 산다. 하지만 우리는 B의 예전 모습을 알고 있기 때문에 B가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다. 지금 B는 두 아이의 아빠이고 열심히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젊은 가장이다.



'선생님, 저녁 식사 사드릴게요. 와요.'

B가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세상에, 이제 B 사주는 밥도 먹어 보는구나. 가보니 마누라 가족들과 함께하는 자리였다. B는 그 모두에게 밥을 사는 어엿한 사위가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B의 20살 마누라는 아들 둘을 보고, 그 마누라의 언니 둘도 20대 초반이지만 이미 10살 가까이 되는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가족들이 모두 거의 사고를 쳤다 수준으로 일찍 결혼한 거였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그걸 흉보지 않았다. 만약 B가 평범한 집 식사에 갔다면 '어린 나이에 사고 치고 고생하는 사위'로 욕먹고 배척받을 거다. 그러나 그곳은 그냥 평범한 친척들끼리 오랜만에 식당 와서 밥 먹는 자리였다.


결국 배척과 차별은 문화의 차이다. 충격적일 정도로 큰 차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결국은 남과 다른 것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지의 차이다. 누군가 수없이 낙오된다면 그건 그 문화와 사회가 지나치게 깐깐하고 비현실적 기준을 들이대고 있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기준은 보는 시야에 따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문화가 포용적이고 인정하 서로 온정적이면 미혼모도 어린가 장도 나름대로의 삶을 꾸려갈 수 있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나쁜 일을 한다면 다르겠지만 미숙해도 책임지려 노력하고 감당하려 하는 이들에게 일단 수용적이고, 도움을 나눠주려 하고, 앞서서 경계선부터 긋지 않으면, 그들 잘 살 수도 있다. 누가 뭐라 하든 나는 나고 이미 살아가고 있는데 구박받으며 지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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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는 거칠었지만 책임감과 정착의 의미를 알았다. 나는 B가 지금처럼 힘차게 살아가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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