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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Dec 26. 2021

행복(하기로)하다

덴마크에서 첫 해 겨울을 보내면서, 이곳 사람들의 행복은 약속된 자기 최면이거나 정신 승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침, 낮 같은 시간은 시계에만 남고, 저녁 – 밤 – 밤 – 저녁으로 이어지는 긴 겨울에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오가 되어서야 겨우 희어 멀건 해진 하늘은 오후 4시가 되면 다시 검게 내려앉아 지평선이고, 수평선이고, 집이고 뭐고 모두 삼켜 버리는데, 도대체 언제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9월이 되면 벌써 해가 짧아지고, 기온이 떨어지지만 덴마크 사람들은 참 많은 야외활동을 한다. 바비큐 파티를 하고, 하이킹을 하고, 산책을 하고, 수영을 하고, 자전거를 탄다. 마치 다가올 긴 겨울을 대비해 몸에 해를 잔뜩 담아두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알뜰하고 부지런하게 해를 즐긴다. 9월의 덴마크 사람들에게서는 암울한 겨울이 오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해를 즐기겠다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기온이 뚝 떨어지는 10월이 되면 각종 공연, 실내 행사가 왕성해진다. 이제 시민들은 야외 활동을 하느라 미뤄두었던 문화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아름다운 공연을 즐긴 후에 마주하는 어둡고 차가운 밤거리는 조금은 포근하고, 덜 외롭기라도 한 걸까? 

10월에 공연만큼이나 중요한 행사가 있다면, 핼러윈이다. 10월의 마지막 날 밤에 즐기는 핼러윈 행사는 애초 덴마크의 전통은 아니라지만, 긴 겨울에 활기를 불어넣기에 딱 알맞은 명절로 수입되자마자 전 국민적인 호응을 얻은 행사가 되었다고 한다. 덴마크 어른들은 10월 초부터 거미줄, 호박 장식으로 집 안팎을 꾸미고,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사탕을 준비한다.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따로 모여 핼러윈 복장을 하고 파티를 열기도 하는데, 파티 준비를 하느라 초겨울 내 분주하다. 그리고 드디어 10월의 마지막 날 이미 어두워진 오후 5시부터 사탕 통을 들고 다니는 꼬마들의 행렬은 암울한 겨울의 시작을 잊게 해 준다.


11월이 되면 덴마크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준비한다. 상점들은 11월 초에 이미 크리스마스 단장을 마치고, 사람들은 이미 크리스마스 선물을 구입하느라 주말마다 분주하다. 가족 파티를 열기 위해 장소를 빌리고, 밴드를 초청하는 등의 계획을 하기도 하고, 회사마다 전 직원이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파티 메뉴와 상품 선정으로 고심을 한다. 


12월은 또 본격적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달이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가장 대중적인 의식은 크리스마스 달력과, 대림절 선물이다. 크리스마스 달력이라고 하면 날짜 별로 초콜릿이 들어있는 아이들 달력을 떠올리겠지만, 실제로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크리스마스 달력이 존재한다. 성인 여성을 위한 화장품 달력, 남성을 위한 스포츠 용품 달력, 공연 마니아를 위해 공연 티켓 달력, 액세서리 달력, 상품권 달력 등 기발한 달력들은 날짜에 맞추어 하나씩 열어가며 매일 선물 받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런가 하면 덴마크의 각 방송국은 크리스마스 달력 TV 드라마를 방영한다. 12월 1일부터 24일까지 매일 30분쯤 온 가족이 둘러앉아 크리스마스 달력으로 제작된 일일 드라마를 시청하며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꿈꾼다.

크리스마스 달력이 매일 받는 선물이라면 대림절 선물은 성탄절을 앞둔 4번의 받는 선물이다. 대림절 선물은 보통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일가친척들은 아이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해 트리 앞에 그득히 쌓아두고, 아이들은 일요일 아침마다 선물을 풀어보며 성탄절에 대한 기대를 키워간다. 

크리스마스를 향한 달음질의 중간 지점인 12월 13일은 루치아 성녀의 축일을 기념한다. 로마 제국의 기독교 탄압에 의해 순교한 이태리 시칠리아 출신의 루치아라는 성녀를 기념하는 행사인데, 막상 축일의 근원지인 이탈리아에서는 대대적으로 기념되지는 않는다. 루치아 축일은 해가 짧은 북유럽에서 주로 기념한다. 이 날에는 하얀 옷을 입은 십 대의 소녀들이 촛불 행렬을 하는 행사를 하고, 집집마다 샤프란을 넣어 만든 빵을 먹는다. 12월 13일은 1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라고도 하니, 북유럽 사람들에게 루치아 축일은 가장 긴 밤을 조금이라도 밝고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된 것 같다. 

회사, 학교와 같은 단체에서는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미리 크리스마스 파티를 한다. 큰 식당을 빌려 파티를 여는 게 보통이고, 요리, 스포츠 등 체험 활동을 하기도 한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꼭 빠지지 않는 순서는 참석자들이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원을 그리며 트리 주위를 도는 것이다. 날씨만큼이나 뚱한 덴마크 사람들이 4-5절씩 되는 캐럴을 부르며 신나게 트리 주위를 도는 모습은 몇 번을 보았어도 늘 당혹스럽다. 그렇게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연말연시는 가족과 보내거나 지방에 있는 별장에서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체크무늬 담요를 쓰고, 따뜻한 와인이나 초콜릿을 마시며 보낸다.


1월에는 새해 맞은 기쁨을 만끽하고, 지체 없이 2월에 있는 짧은 겨울 방학 계획을 시작한다. 어른들은 2월 중순에 있는 일주일 간의 아이들의 겨울 방학에 맞추어 휴가 계획을 한다. 겨울 방학에는 각자의 형편대로 해를 찾아 나서는 여행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가까운 서유럽 국가부터 대륙을 넘어 동남아, 아프리카로의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새해가 되었어도 밝지 않은 날들을 견뎌낸다.


2월의 덴마크 사람들은 해를 만나러 가기 전의 들뜸과 해를 만나는 황홀함과 해를 만나고 온 다음의 행복감으로 새해가 왔어도 여전히 밝지 않은 날도 아랑곳 않고 유쾌하다.


그리고 3월을 맞으면 느림보 태양도 이제 슬슬 기지개를 켠다. 


네 번의 겨울을 지켜본 덴마크 사람들은 한순간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유치하고 뻔한 매사에 정성을 다하며 겨울을 보낸다. 이들은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로 한 것이 아닐까?  행복하기로 했기 때문에, 하늘이 종일 검은콩 두유 색을 하고 있어도 행복하다는 이들의 말은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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