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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Mar 20. 2024

몽글몽글해지고 싶을 때, <토끼구름>

1화



차였다. 이유를 모르겠다. 이유랍시고 내뱉는 말이 귀로 흘러 들어오긴 했지만, 이해가 안 갔다. "네가 싫어진 건 아닌데 지금은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아. 이해해 줬음 좋겠어."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애초에 번호 달라고 길바닥에서 먼저 엉겨 붙은 게 누군데. 그 때는 생각이란 게 없었나. 재수 없다. 그 자식, 아니 전 남자친구는 두 달 만에 나를 바보로 만들었다. 슬프기보다 열이 뻗쳤다. 아예 처음부터 연락처를 주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가볍게 커피 한 잔 할 시간만 내 달라던 능글맞은 대사를 왜 귀엽다고 생각했을까. 자기혐오에 휩싸인다. 죽어라, 나 자신.



"야, 그냥 귀엽고 모자란 애 하나 만나서 두 달 잘 놀았다고 생각하고 치워. 꼴랑 두 달이면 뭐 아까울 감정도 없잖아."



국자 한 가득 퍼올린 부대찌개를 앞접시에 옮겨 담으면서 유진이 말했다. 도움 안 되는 년. 한유진한테 공감을 바란 내가 바보지. 됐다 됐어, 하며 인상을 팍 쓰고 부글부글 끓는 부대찌개 위 라면 사리를 괜히 휘저었다. 한 잔 해야 할 기분이라고 불러냈을 때 바로 나와준 건 고맙지만, 별 일 아니라는 듯 뭉툭하게 받아치는 유진이 얄밉다. 중학생 때부터 꼭 한결같이 무뚝뚝하다.


빈 잔에 초록 병 소주를 꼴꼴 채웠다. 평소에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사실 맛을 모르겠다. 그냥 이럴 때 취하려고 마시는 게 술 아닌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남자한테 차였고, 날은 춥고, 기분은 구리고. 안 하던 짓을 하고 싶었다. 시장 골목 부대찌개에 소주라니. 참 아저씨 같네, 하면서 한 잔 탁 털어 넣었다. 혀를 뒤덮는 차갑고 씁쓰레한 기운에 태어나 처음 레몬 조각을 입에 넣어 본 갓난아이처럼 얼굴이 우그러들었다. 크으, 소리가 절로 나온다. 냉큼 뻘건 부대찌개 국물을 한 숟갈 퍼다 입으로 가져간다. 불쾌한 쓴 맛을 맵고 짠 맛으로 얼른 뒤덮는다.



"드라마 보는 것 같다 야. 맛있냐?"



소주 한 모금에 끄으, 소리를 곁들여 찌개 한두 숟갈 퍼먹기를 두 번 정도 반복하자 신기하다는 듯 유진이 말했다.



"술을 맛으로 먹냐, 인생이 쓰니까 마시지."



드라마 같다기에 딱 그에 맞는 대사를 읊어주었다. 언젠가 꼭 한 번은 뱉어 보고 싶은 말이었다. 타이밍이 좋았다. 뿌듯해하는 내 면전에 대고 유진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니가 아주 정신을 놨구나, 하면서 15년 지기 친구는 공깃밥 뚜껑을 열고 앞접시에 퍼 둔 부대찌개 국물에 밥을 슥슥 비벼 먹기 시작했다. 유진은 술을 전혀 안 마신다. 그런 맛 없는 걸 대체 왜들 먹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이 맛 없는 게 뭐라고 사람들은 홀린 듯 술을 찾는 걸까. 또 한 잔을 따라내면서 의미 없는 물음표를 띄웠다.


식사를 마친 유진은 강아지 산책을 시켜야 한다며 일어났다. 별 볼 일 없는 놈한테 마음 쓰지 마라는 말만 재차 남기고 금세 돌아가 버렸다. 동공에 힘을 풀고 쟁반처럼 넓적한 냄비 속 뽀그락뽀그락 쫄아붙어 가는 뻘건 부대찌개 국물 위에 갈 곳 없는 시선을 얹었다. 막 취한 것도 안 취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기분이다. 이 상태로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울적해졌다. 그래도 혼자 부대찌개 집에서 소주 한 병을 더 마실 용기는 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죄 아저씨 아니면 할아버지들 뿐이다. 완벽한 이방인으로서 저들 사이에 자연스레 섞일 만한 '바이브'를 내려면 이별이 아니라 이혼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며 터덜터덜 가게를 나왔다. 든든히 입고 나섰지만 밤공기가 제법 쌀랑하게 느껴졌다. 옷이 벙벙한지 새로 산 하얀 오리털 패딩 안으로 찬 바람이 새어들어온다. 겉보기에 말짱하고 괜찮아서 샀더니 제 몫을 똑바로 못 한다. 꼭 내가 만났던 남자들처럼. 몸보다 마음이 더 시려운 연말이다.


무작정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밤거리를 배회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가슴이 답답했다. 평소에 자주 지나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서화시장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크다. 미로 같은 길을 이리저리 걷다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지 모른다.


포근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상대에게 많은 걸 바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나도 한 번 저도 한 번 기댈 수 있는 그런 관계였으면 했다. 그런데 만나는 놈들마다 하나같이 제멋대로, 자기 내키는 대로 행동하며 관계를 쥐고 흔들려 했다. 헤어질 때 조차도. 심장이 빳빳하게 경직된 기분이다. 말랑말랑하고 몽글몽글한 감정을 주고 받는 연애란 정말 영화 드라마에만 존재하는 걸까. 패딩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시장 골목을 멋대로 누볐다. 묵직한 상념에 잠긴 보로통한 얼굴로 시선을 땅에 묻은 채 발을 내딛었다. 예고 없이 불어대는 바람에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굳은 자세로 얼마간 걷다 보니 목과 어깨가 슬슬 뻐근했다. 십여 분은 아무 생각 없이 걸어온 것 같았다. 걸음을 살짝 늦추고 기지개 켜듯 어깨를 쫙 펴면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엥, 여기가 어디더라전에 와 본 기억이 없는 낯선 골목에 다다랐다. 전반적으로 어둑한 기운이 서렸다. 가로등 불빛조차 희미하다. 끄트머리에는 은은한 간판 불빛이 골목 한 켠을 묵묵히 물들이고 있었다. 호기심이 일었다. 뭐 하는 곳일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천천히 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약간의 취기 때문인지 한 번 들여다 보고 싶다는 충동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따랐다. 보통 때 같았으면 관심 없이 돌아갔겠지만 나는 평소와 달랐다.


가까이 다가가 간판을 살폈다. 'BAR REMEDY'라고 영문으로 쓰인 글씨가 녹빛 바탕 위에 흰색 네온으로 빛나고 있었다. 주변이 어두워 까만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드러난 글자를 들여다 보는 듯했다. 어쩐지 외국에서 볼 법한 약국 간판 같다는 인상도 받았다. 레메디? 치료? 치료 바가 뭔 뜻이래. 그보다 시장 구석에 이런 이색적인 가게가 다 있었나. 눈을 아래로 돌리니 또 다른 문구가 시선을 홱 잡아챘다.



당신의 기분에 꼭 맞는

술을 처방해 드립니다.

                -바 레메디(Bar Remedy)



흰 종이 위에 정자로 쓰인 두 줄짜리 문구가 출입구로 보이는 문 위에 붙어 있었다. 요상스러운 단어의 조합에 생각을 뺏겼다. 술을 처방한다고? 기분에 맞게는 또 뭐야. 도통 와 닿지 않는 문장에 오히려 호기심이 커졌다. 무언가에 홀린 듯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안 하던 짓 오늘 참 많이 하네, 하면서 안을 살피려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어서오세요. 바 레메디입니다. 혼자 오셨나요?"



문틈 사이로 분위기만 보려 했는데 직원이 대번에 내 존재를 알아챘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몰래 훔쳐 보려다 들킨 사람처럼 속이 뜨끔했다.



"아, 저, 아뇨, 네. 저기 저 한.. 명인데, 자리 있나요?"



당황하여 추임새가 많이 붙었다.



"네 그럼요. 이쪽에 앉으세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얼떨떨하게 바 테이블 구석 자리로 향했다. 어디 면접 보러 온 사람처럼 엉거주춤한 걸음과 굳어 있는 표정이 스스로 생각해 봐도 우스웠다. 골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던 모험심과 패기는 빠르게 휘발되어 날아갔다. 바라니. 바에 와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가장 최근 기억을 떠올려 보면 거의 3년 전이다. 그때는 직장 후배가 소개해 준 남자와 함께였다. 나한테 독한 술을 골라 먹이려 부단히 애쓰던 사람이었다. 그 마지막 기억이 참 별로여서 '바'라는 공간에 대한 인식도 덩달아 지금까지 안 좋게 남았다. 그런데 이런 곳을 내 발로 다시 찾았다. 그것도 혼자. 그것도 부대찌개에 소주를 마시고서. 놀라운 일의 연속이다.


겉옷을 벗어 두고 주변을 둘러봤다. 조도가 상당히 낮다. 테이블마다 버섯 모양의 은은한 조명이 포자처럼 야트막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어쩐지 몽환적인 인상을 주는 공간이다. 내가 앉은 자리 정면에는 족히 수십 종, 어쩌면 백여 종은 넘어 보이는 외국 술이 줄줄이 놓였다. 하나하나 이름 외우기도 어렵겠네. 여기서 일하는 사람도 이거 다 마셔보기는 했을까.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자리를 안내한 직원, 그러니까 바텐더가 테이블 안쪽에서 나타났다. 무언가 적힌 종이를 테이블 위로 펜과 함께 슥 내 쪽으로 내밀면서 말을 건넸다.



"혹시 술을 즐기시나요?"



"아아뇨, 잘은 안 마셔요. 잘 모르고요."



하지만 어쩌다 빡이 치면 부대찌개에 소주 한 잔 할 줄은 아는 여자랍니다,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그러면 여기 증상 한 번 작성해 보시겠어요?"



증상? 아, 그래 그렇지. 이곳의 컨셉을 깜빡 잊고 있었다. 바텐더가 내민 종이에 뭐라 적혔는지 찬찬히 살폈다. 현재 기분이 어떤지 묻는 생각보다 간단한 질문이었다. 고민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간단히 적어 냈다.



<지금 기분이나 상태가 어떤가요?>

 -(쓰레기 같은) 남자한테 차여서 매우 가라앉아 있음. 화도 남.


<처방을 통해 어떤 효과를 보고 싶은가요?>

 -기분이 좀 몽글몽글? 해 졌으면.



다 써서 내민 종이를 바텐더가 받아 들었다.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 보더니, 알겠다는 듯 입을 일자로 한 번 다물고는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하고 몸을 돌려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바텐더가 손에 병 하나와 잔을 들고 돌아와 내 앞에 내려 놓았다. 뿌연 내용물이 든 병을 얼핏 보니까 길쭉한 페트병이다. 잠깐, 페트병이라고? 머리속에 물음표가 잔뜩 떠오르는 순간 바텐더가 입을 열었다.



"이건 울산 운곡도가에서 생산하는 6.8도 막걸리, '토끼구름'입니다. 라벨이 귀엽지요. 우유처럼 뽀얀 색도 매력적이고요."



"네? 막걸리요?"



전혀 예상치 못한 주종에 깜짝 놀랐다. 바에서 막걸리라니. 위스키, 보드카 같은 걸 넣은 형형색색의 그럴듯한 무언가를 내심 기대했다. 아니면 최소한 와인이라든지. 혹시 이 사람이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 죄송한데 이게 처방.. 인가요?"



벙찐 얼굴로 묻는 나를 보고 바텐더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특별한 막걸리예요. 한 번 드셔 보세요. 왜 이걸 처방해 드렸는지 알게 될 거예요."



말을 덧붙이며 바텐더는 요령 좋게 가슴 앞에서 동그란 원을 그리듯 병을 수평으로 흔들어 층이 분리된 내용물을 잘 섞었다. 그러고는 뚜껑을 돌려 열어 받침이 있는 둥근 유리잔에 부연 술을 따라냈다. 미심쩍은 표정을 거둬들이기 힘들었다. 막걸리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흔한 술 아니던가. 색다른 막걸리라 하면, 대학교 근처 술집에서 팔던 과일청 막걸리나 알밤 막걸리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지방에 여행을 갔을 때 지역 막걸리라고 파는 것들을 식당에서 사 먹어본 기억 또한 있다. 어쨌거나 내 입맛에는 사실 하나같이 비슷비슷한, 그냥 막걸리일 뿐이었다.


바텐더는 어째선지 여유로워 보였다. 미소를 띄고 테이블에 양 손을 올려놓은 채 나를 지긋이 쳐다봤다. 내가 머뭇거리자 고개를 끄덕이고 손바닥을 위로 하여 잔을 가리키는 제스처를 취했다. 어서, 어서 하는 눈빛으로. 나 참 이게 맞는 걸까, 생각하면서 막걸리가 찰랑대는 잔을 쥐고 입에 살짝 갖다 댔다. '어, 잠깐. 이게 뭐지?'


혀끝에 처음 닿은 맛이 내가 생각한 것과 아주 딴판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이 동그래졌다. 입술을 조금 더 열어 입안에 과감히 받아들였다. 꿀꺽 꿀꺽. 잔에 든 술이 대번에 반으로 줄었다. 잔을 내려놓자마자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이거 뭐예요? 진짜 맛있다."



알고 있던 막걸리 맛이 아니었다. 솜사탕을 먹는 듯 가볍게 달콤했다. 질감은 또 어찌나 보드라운지, 놀라웠다. 막걸리라 하면 무조건 탄산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 술에서는 딱히 탄산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맛있지요? 울산에 있는 소규모 양조장 겸 전통주점에서 만들었어요. 알던 막걸리 맛이랑 좀 다를 거예요."



"네 완전 달라요. 이런 막걸리는 처음이에요."



제일 놀라운 건 새큼하고 콤콤한, 일반적인 막걸리에서 느꼈던 맛이나 향이 거의 안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입안을 그처럼 많이 깔깔하고 텁텁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가만 들여다보니 말마따나 술병 디자인도 귀여웠다. 핑크빛 구름과 토끼가 그려진 라벨이 부드러운 맛과 꼭 맞았다. 가라앉은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제야 바텐더가 왜 이 술을 내게 처방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착 가라앉은 기분에는 적당히 단 맛이 특효예요. 거기에 몽글몽글한 심상을 담으면 딱 이 술이 돼요. 이름부터가 토끼구름인데다 부드러운 질감에 핑크빛 라벨 디자인. 세 가지 요소의 조화가 절묘하지요. 지금 손님에게 내드릴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이에요."



술이 맛있다고 느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니, 실은 정말 맛있는 술을 마셔본 적이 있나 싶다. 항상 술 맛의 기준이 참이슬, 처음처럼 같은 초록 병 소주였다. 쓰고 역한 맛을 잘 감춰서 그보다 먹을 만하면 괜찮다, 맛있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 '술 치고는' 이라는 조건이 그러고 보니 늘 앞에 붙었다. 그런데 이런 건 처음이다.



"이런 술이 많은가요?"



"네 그럼요. 사람들이 잘 모를 뿐이지 재밌고 맛있는 술이 셀 수 없이 많지요.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고요. 여기서는 그런 매력적인 제품들을 한 분 한 분께 맞춤형으로 처방해 드려요."



이쯤 되니 내내 속을 간질이던 질문을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네. 그럼요."



"왜 여기서는 처방이라는 용어를 써요? 저는 처음에 약국인가 싶었어요. 간판도 녹색이고."



바텐더는 씨익 웃으면서 도로 나에게 질문을 건넸다.



"제가 드린 술을 맛봤을 때 어떠셨나요?"



"기분이 정말 나아졌어요. 그리고 신기했어요."



"그거예요. 상한 기분을 나아지게 만드는 것. 회복 작용을 하는 것. 술에는 그런 기능도 있어요. 속이 더부룩할 때 소화제를 먹고 머리가 아플 때 두통약을 먹는 것처럼요."



그는 바 테이블을 천천히 정리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막무가내로, 객기로 마시면 문제가 되기 쉬워요. 술이 뭐 다 똑같지 하면서 오용을 하면 결국 독이 돼요. 길바닥에서 실수도 하게 만들고, 다음 날 속 쓰리게 하고. 그쵸?"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그랬던 적이 있다. 성인이 되고 대학을 다니면서 술이란 걸 접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분위기에 휩쓸려 과음을 하고선 숙취에 시달렸던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러니까 전문가의 손길을 한 번 거쳐야 확실한 약이 되는 거예요. 약사가 환자의 상황에 알맞은 약을 조제해서 내 주는 것처럼요. 그런 의미에서의 처방인 거예요. 상황에 꼭 맞춰 기분을 한결 나아지게 돕는, 약이 되는 술을 준비해 주겠다는 말이지요."



듣고 보니 이해가 갔다. 오늘도 몸소 겪었다. 남들 하는 것처럼 찌개에 소주 마시는 건 나에게 썩 효과적이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신 술 한 잔이 더 큰 위로를 건넸다. 이런 거였다.


진짜 괜찮다, 맛있다 하며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750ml 한 병이 삼분의 일도 남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기본 안주로 나온 과자 외에 딱히 곁들인 음식이 없다. 막걸리만 이렇게 마셔 본 적은 처음이었다. 딱히 다른 음식 생각이 나지 않기도 했다.



"이건 음식이 없어도 마시기 괜찮네요? 보통 막걸리는 전이나 뭐 그런 음식이랑 같이 먹잖아요."



"맞아요.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술은 단독으로 마시기에도 나쁘지 않지요. 술을 즐기는 방식은 여러가지예요. 음식을 곁들일 때도 절대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내 주관대로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는 쪽이 더 나아요. 한층 나에게 꼭 맞는 맛을 새로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전혀 모르던 세계에 눈을 뜬 듯한 기분이었다. 갑작스레 물어볼 거리가 샘솟았다. 바텐더와 한참을 술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었다. 실은 대화라기보다 내가 일방적인 질문 공세를 퍼붓고 그가 하나하나 성실히 답을 해주는 쪽에 가까웠다. 평일 저녁이라선지 매장에 손님이 많지 않은 것도 한 몫 했다. 한참 바텐더의 얘기를 듣던 중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검지로 핸드폰 액정을 톡 건드려 보니까 10시 52분이었다. 으엣, 소리가 새어나왔다. 벌써 밤 열한 시에 가까워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내일 오전 회의 준비하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큰일이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미쳤나 봐. 이만 일어나야겠어요."



옷을 주섬주섬 챙기고 서둘러 계산을 했다. 계산을 마치고 카드를 도로 돌려주며 바텐더가 인사를 건넸다.



"다른 증상 생기면 또 오세요. 새로운 처방을 해 드릴게요."



네 다음에 뵐게요 안녕히 계세요, 입꼬리를 끌어올려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대략 서너 시간만에 받아들이는 바깥 공기가 무척 상쾌하다. 싸늘하고 냉랭하게만 느껴졌던 아까와는 전혀 다르다. 감정이 많이 차분해진 탓일까. 청량한 겨울 밤 공기에 정신이 기분 좋게 각성되는 듯하다.


유진의 말이 옳다. 그럴 가치 하나 없는 남자에게 감정을 소모해 봐야 나만 손해다. 말은 무심하게 해도 늘 정곡을 콕콕 찌른다. 얄밉지만 싫어할 수 없는 기집애라니까. 이제는 나를 기분 좋게, 부드럽고 달콤하게 취하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꼭 오늘 마셨던 술처럼. 겉만 번듯하지 속은 저질 싸구려에 불과한 인간은 이제 사양이다.


숨을 잔뜩 들이쉰다. 선선한 기운이 폐를 거쳐 온 몸에 퍼졌다. 흐읍, 가자 그래. 걸음을 재촉했다. 한 발 한 발 빠르고 경쾌해졌다. 처방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저 멀리 달이 참 밝고 동그랗게 떴다. 말랑말랑한 밤. 지금이라면 달 위를 뛰노는 토끼 한 마리가 보여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의 처방전~

약제명 / 토끼구름
유형 / 막걸리(탁주)
알코올 / 6.8%
생산자 / 운곡도가
취급처 / 전통주 보틀샵, 전통주점 일부 (인터넷 구매 불가)
복용 안내사항 / 기분이 착 가라앉았을 때 부드럽고 달콤한 맛으로 기운을 끌어올려줘요. 부드러운 질감으로 포근한 인상을 더해요. 안주 없이 단독으로 즐기기에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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