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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Apr 17. 2024

봄바람에 설렐 때, <피치크러시/체리블라썸> (1)

4화 (1)




오후 3시 32분. 시계를 흘긋 보고 나서 마음이 더욱 다급해졌다. 약속 시간까지 한 시간도 안 남았다. 지하철 역까지 가는 버스는 다섯 정거장 전에 있다. 시간 맞춰 가려면 오 분 내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 도대체 귀걸이가 어디 갔는지를 모르겠다. 가진 것 중에 유일하다시피 한 데이트용 아이템이다.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 분명 화장대 위 플라스틱 서랍함에 넣어 둔 것 같은데, 없다.


방 안을 마구 헤집다 잠시 멈춰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턱을 치켜 올리면서 입을 벌려 한숨을 탁 내뱉었다. 허탈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봤다. 고민에 빠졌다. 그냥 포기하고 나갈까. 발만 동동 구르면서 수십 번은 더 들여다 봤던 전신거울에 빠르게 다시 한 번 몸을 비췄다.


전반적인 느낌은 괜찮아 보인다. 밝은 원피스를 골라 입고 연청색 자켓을 가볍게 걸쳤다. 오늘처럼 청명한 봄날씨에 딱 어울릴 듯하다. 입술에는 새초롬한 오렌지 색을 입혀 포인트를 줬다. 여기에 하얀 컨버스화만 신으면 완벽할 것 같다.


아니, 완벽하지 않다. 역시 그 귀걸이가 있어야 한다. 옷이랑 신발만 미리 준비해 두지 말고 어젯밤에 귀걸이도 같이 찾아 둘 걸, 평소에 정리 좀 잘 해 둘 걸 푸념을 속으로 늘어뜨렸다. 반 포기 상태로 무맥하게 책장 쪽을 곁눈으로 훑었다. 한 쪽으로 기운 책더미 오른편에 자그마한 물체가 순간 눈에 탁 걸렸다. 가까이 다가가 살폈다. 익숙한 무늬다. 귀걸이를 넣어 둔 작은 목제 보관함이다. 살았다, 생각하면서 대체 왜 이걸 여기에 쳐박아 뒀는지 의중을 알 수 없는 과거의 내 행동에 욕을 퍼부었다.


먼지가 엷게 내려앉은 보관함을 재빨리 집어들었다. 다행히 내용물은 그대로다. 자잘한 큐빅이 박힌 리본 모양에 물방울 장식이 아래로 늘어진 금침 귀걸이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대상 없는 고마움을 연신 표했다. 냉큼 꺼내서 거울 앞으로 들고 가 서둘러 귓볼에 끼웠다. 이제 최종 점검이다. 옷 좋아. 화장 괜찮아. 귀걸이 딱 어울려. 오늘 나는 오랜만에 예쁘다.





"그나저나 현서 씨, 남자 소개 안 받을래?"




3주 전, 같은 팀 과장님이 소개팅 제안을 해 왔다. 주선자를 자처한 박하나 과장님은 회사 사람과 대체로 거리를 두는 내가 유일하게 마음 터 놓고 언니처럼 따르는 인물이다. 점심 시간에 잡담을 나누다 말고 느닷없는 소리를 하기에 처음에는 별 생각 않고 장난처럼 받아쳤다. "뭔데요. 누군데요. 사진 봐봐요."



남자는 자기 남동생 친구인데,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족처럼 봐 온 사이라고 했다. 나이는 나보다 세 살 위. 그런데 애가 참 괜찮다고, 한 번 만나나 보려냐고 슬근슬근 떠 보는 말이 이어졌다. 나중에는 거의 부탁을 하는 꼴이었다. "부담 갖지 말고 밥이나 한 번 먹어봐 응? 주말에 딱히 안 바쁘잖아 그치?" 아니 그건 맞지만, 하면서도 내 사는 생활 패턴을 대충 아는 사람이라 딱히 마땅한 변명을 더하지 못했다.


문제는 상대 사진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만 있어 보라더니 핸드폰을 뒤져 보여 준 사진은 죄다 멀찍이서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이목구비가 명확히 보이지도 않았다. 수더분한 남자 애라 셀카 같은 건 당연히 없거니와 어릴 때부터 사진 찍히기를 어색해하고 부끄러워 한다나. 가진 건 다같이 한 번 놀러 갔을 때 찍은 사진이 전부라고 했다.


과장님이 상대 남자에 대해 가장 많이 붙인 수식은 '착하다'였다. 현서씨 자 봐. 요즘 세상에 착한 남자 얼마나 찾기 어려운 줄 알아? 얘 진짜 요즘 애들 같지 않게 순수한 면이 있는 애라니까. 진국이라고. 근데 여자 앞에서는 조금 숙맥 같은 면이 있어서 말이지, 응. 내가 안타까워서 그래 진짜. 둘 다.


한순간에 안타까움의 대상으로 나까지 편입되었다. 당혹스러웠다. 나는 갑자기 왜. 전에는 안 그러더니 결혼하고 2년 쯤 지나고 나서는 오지랖이 한층 넓어졌다. 그럼에도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나에게 애정이 있기 때문에 하는 소리라는 걸 알고 있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우리의 내적, 외적 친밀도가 그 정도는 된다.



사진으로 얼핏 본 외양에서 받은 그의 인상은 '크다' 였다. 자세히는 덩치 자체가 큰, 곰 상에 가까웠다. 사춘기 소녀 때부터 불과 최근까지 내 이상형은 한결같이 마르고 늘씬한 체형이었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이러한 외적 조건에 더해서 자신만의 세상과 사연이 있는 듯한 예술가 유형의 인물상을 명확히 이상형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요새 말하는 병약미, 퇴폐미에 딱 가닿는다.



전 남자친구라 부르기도 싫은, 최근 만난 남자도 비슷한 결이었다. 빼빼하지만 전체적인 비율이 좋은 모델 같은 체형이었다. 다만 조금 능글대는 모습이 만날 때마다 마음에 걸렸다. 까 놓고 말해 상대가 먼저 다가왔고 외적인 호감이 커서 만났지만, 결국 얼굴 값 하는 뺀질이였다.


지금껏 내가 만나 왔던 다른 남자들도 실은 이와 별반 크게 다르지 않다. 이상형 범주 내에 들어온 남자가 호감을 표시하면 나는 쉽게 넘어 가는 편이었다. 한 번 튕기는 스킬도 없고, '밀당'을 잘 하지 못했다. '나한테 관심이 있다고? 그래 나도 그럼 너 좋아.' 식이었다. 그런데 남자들은 쉽게 마음을 얻어낼수록 나에 대한 흥미를 빠르게 잃었다.




주도권을 쥐어 주고 시작하는 연애를 여러 번 하다 보니까 상처를 받을 일이 많았다. 대학생 때 한 번은 술에 취한 남자친구한테 이런 말까지 들어 봤다. "상처 받으라고 하는 말은 아닌데, 그냥 너는 뭐랄까 조금 재미가 없다고 해야 되나. 너무 순순해." 기분 나쁘게 듣지 말라면서 시작하는 말보다 기분 나쁜 말은 없을 거라는 말을 그 날 제대로 실감했다.



회사 일이 점점 바빠지고, 나이를 한두 살 더 먹어가면서 조금씩 이런 패턴이 지겨워졌다. 이제는 전처럼 떠나간 남자를 떠올리며 엉엉 울 체력부터가 부족했다. 작년 겨울 짧은 만남을 끝으로 한동안 이성 관계는 맺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실제로 지난 몇 달은 서너 번 들어온 소개팅 자리를 모두 고사하고 회사와 집만 오가며 살았다.


이번 제안은 그래서 상당히 나에게 도전적이었다. 우선 쌍팔년도도 아닌데 상대 얼굴을 명확히 모른 채 만남에 임해야 했다. 그나마 사전에 파악 가능했던 게 우람한 체형인데, 살면서 한 번도 이성적 매력을 느껴 본 일 없는 쪽이다. 어쨌거나 결정권은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알겠지? 그럼 나 얘기 한다. 다음주 토요일에 보는 걸로 해. 빠를 수록 좋잖아. 봤는데 아니면 아닌 거고. 맞지? 부담 없이 봐 그냥." 나는 어버버 하다가 제안을 받아들인 꼴이 되었다.





첫 만남 장소는 합정역 부근 카페였다. 이 역시 과장님이 정했다. 둘이 어디서 만날 거냐 묻다가 결국에는 본인이 약속 장소와 시간 조율까지 한 자리에서 모두 마쳐 버렸다. 괜히 사내에서 '추진력 하나'로 통하는 인물이 아니다. 박하나 과장 추진력 하나는 알아 줘야 한다며 붙은 별명인데,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 말장난 한 번 적절히 잘 쳤다. 어쨌거나 그 능력을 이런 데에까지 발휘하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소개팅보다 중매에 가깝지 않을까.


맨 처음 그를 만나러 약속 장소에 나갈 때는 주말 출근을 하는 심정에 차라리 가까웠다. 솔직히 전혀 기대가 되지 않았다. 명백히 과장님 등쌀에 밀려 갖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옷도 회사에 출근할 때와 별반 다름 없이 입었다. 이따 저녁에 돌아오면 집에서 뭐 하지, 생각하면서 심드렁하게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합정역 5번 출구로 나와 안쪽 길을 따라 쭉 걸었다. 구름은 좀 꼈지만 대체로 날이 맑은 편이다. 해의 기운이 적당히 따사로워 이제 봄볕이라 할 만하다. 나무가지에 오종종 움트는 초록 새순이 반갑다. 대낮에 해를 보며 걷는 게 참 오랜만인 것 같다. 주변을 새삼스레 훑는 사이 지도에 찍어 둔 건물이 건너편에 보였다. 카페는 분명 2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라 난간을 붙잡고 터덜터덜 계단을 올랐다.



남자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은 명확히 몰랐지만 외형만 봐도 한눈에 알아보기 쉬웠다. 안쪽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혹시 박현서 씨...?"




"네 맞아요.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가식을 적당히 섞은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남자는 아이고 아뇨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하면서 양 손을 열심히 좌우로 흔들었다. 굉장히 필사적으로 부정하는구나 생각하면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눈을 몇 초간 맞추고 서로 어색한 웃음을 낮게 터뜨렸다. 우선 마실 것부터 주문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상대는 따뜻한 라떼를 주문했다. 주문을 받은 점원이 테이블에서 멀어지는 것을 보고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들으셨겠지만 저는 정상길이라고 합니다. 만나봬서 정말 반갑습니다."




덩치 큼지막한 사람이 긴장한 내색을 여실히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네. 저는 박현서예요. 저도 오늘 뵙게 돼서 반가워요."




처음 남자의 이름을 주선자에게 전해 들었을 때 든 생각은 아빠 같은 느낌이네, 였다. 이 땅 어딘가에 '아빠 이름 사전'이란 게 있다면 왠지 박영수, 안기태, 양정택 등과 함께 '정상길'도 실려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긴 뭐 내 이름도 썩 세련되지는 않으니까 이름 가지고 뭐라 할 일은 아니다.



남자는 여전히 긴장한 듯 의자에서 등을 뗀 자세로 무릎 위에 양 손을 주먹쥐어 올려 놓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싶어 웃으면서 농담을 건넸다. "저기, 너무 벌 받는 자세로 계신 것 같은데 안 불편하세요?" 아 옙, 제가 그랬나요 하하, 하면서 남자는 쓰읍 숨을 들이마쉬며 주먹 쥔 손을 펴고 무릎 위를 위아래로 서너 번 쓰담았다. 과장님이 숙맥 같다고 표현을 한 이유가 뭔지 정확히 알 것 같았다.


둘 사이의 공기가 또 한 번 가라앉으려 할 즈음 마침맞게 종업원이 각자 주문한 음료를 내 왔다. 그제야 남자의 두툼한 손이 비교적 자연스러운 포지션을 찾았다. 잔에 손을 가볍게 대고 있는 것만으로 아까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누군가와 마주앉아 이야기할 때 꼭 차 한 잔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겠다 싶었다.



초반 대화는 전반적으로 내가 이끌어 갔다. 어디서 오셨냐 뭐 타고 오셨냐 가벼운 질문부터 시작하여 오늘 날씨 완전 봄이더라, 야외 활동 좋아하시냐 하는 일은 잘 맞냐 쉬는 날엔 보통 뭐 하면서 보내냐, 취미가 있냐 식으로 막힘 없이 말할 거리를 만들었다.


나는 다소 낯을 가리지만 나보다 더 낯 가리는 사람을 만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져 대화를 리드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딱히 첫 눈에 긴장할 만큼 이성적 매력을 느낀 상대가 아니어서 더 편하게 이야기했을 지 모른다.


우물쭈물하던 남자도 대화를 이어가면서 분위기가 조금 말랑해지자 자신의 페이스를 찾은 듯 보였다. 목소리가 한결 편안해졌다. 대화 요소요소에 적절한 농담을 섞기도 했다. 걱정한 것처럼 아주 전형적인 숙맥은 아닌 듯했다. 서른 초반 남자다운 여유가 그래도 조금씩은 묻어나왔다.



다양한 화제를 늘어놓다 보니 생각보다 우리 둘 사이에 공통점이 많았다. 신도시에서 자라온 환경부터 성격과 성향, 취향까지 비슷했다. 쉬는 날 아무 데도 안 나가고 방바닥에 퍼질러 앉아 컬러링 북을 칠하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 줄 몰랐다. 그 큰 덩치로 펜을 이쑤시개처럼 잡고 색을 칠하고 있을 모습을 상상해 보는 재미도 있었다.


대화가 생각보다 잘 통해 카페에서만 두 시간 반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전혀 예상 못한 전개였다. 지하철 손잡이를 붙들고 약속장소로 향하면서 상상한 오늘의 시나리오는 이랬다. 우선 카페에서 한 시간 이내로 차를 마신다. 이후 근처에 간단히 밥을 먹으러 가서 배를 채우고 집에 돌아온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 피곤한 일 하나 쳐 낸 기분으로 맥주를 한 캔 마신다.


넉넉잡아 두세 시간이면 끝날 외출로 여겼다. 그런데 이미 카페에서만 그만한 시간을 소요했다. 어느새 나는 직장 생활에 대한 피로와 무료한 삶에 대한 고민을 그에게 털어 놓고 있었다. 말이 통한다는 기분을 얼마 만에 느끼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고서도, 지난 주에 가진 두 번째 만남에서도 우리는 쉴 새 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성적인 긴장 상태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대화가 잘 되는 상대를 만났다는 자체가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다. 사회에 나와서 내 서투른 감정 하나 이해하고 공감해 줄 사람 찾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상길은 귀를 열고 묵묵하게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한심한 얘기나 떠벌이기 좋아하던 남자들과는 자못 달랐다. 달변은 아니지만 참 진솔하다는 인상을 줬다. 말하자면 무해한 사람이다. 자극적이지 않고 꿍꿍이가 없는 사람. 과거의 내 시선으로 봤을 때는 별 매력을 못 느낄 만한 타입이지만 지금의 나라면 글쎄, 어떨까.






옷맵시에 신경을 쓰면 몸가짐도 달라진다. 만나기로 한 공원 앞을 향해 어느 때보다 당당한 걸음을 걷는다. 벚꽃이 어느새 사방에 흐드러졌다. 올해는 참 꽃이 잘 핀 것 같다. 아니, 봄에 꽃 구경을 언제 마지막으로 가고 안 갔는지 사실 기억도 잘 안 난다.


멀리서부터 상길이 보인다. 참 알아보기 쉬워서 좋다.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다가오는 나를 발견한 그가 오른팔을 위로 쭈욱 뻗어 좌우로 붕붕 흔들었다. 처음 만날 땐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 지 모르고 눈치 보는 불안한 강아지 같았는데, 지금은 꼭 헤실헤실 순박한 웃음을 지어 보내는 리트리버 같다.


한 주에 한 번씩, 이제 꼭 세 번째 보는 날이다. 곧 만개할 것 같은데, 같이 벚꽃 보러 가지 않겠냐는 제안은 지난 번 만남에서 상길이 먼저 해 왔다. 혹시 비라도 오면 어쩔까 걱정했지만 구름 하나 없이 날이 푸르렀다. 공원 내부는 어딜 봐도 벚꽃 천지였다. 순백색에 설렘 한 스푼을 섞은 듯 발그레한 연분홍 빛 꽃송이가 탐스럽게 예뻤다. 큼직한 벚나무를 하나 골라 그 아래 돗자리를 펴고 함께 앉았다. 멋진 풍경 속에서 누리는 여유. 기분이 한껏 고양되었다. 한동안 둘이 꺼낸 말이라곤 태반이 와, 오, 아 같은 감탄사였다.


다리를 쭉 뻗고 팔을 뒤로 빼 상체를 지지하는 자세로 한참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핸드폰을 꺼내 셀카 모드로 전환하여 들고는 말했다. "상길 씨, 여기 봐요." 동시에 어어, 잠시만요 하더니 상길이 당황한 듯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아니 좀 봐 봐요." 사진 잘 안 나와서 부끄럽다니까요 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아 빨리이, 보챘다.


주저하던 상길이 한동안 숙여서 벌개진 얼굴을 들여올리자마자 찰칵, 빠르게 버튼을 눌렀다. 찍힌 결과물을 보는데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벌건 얼굴에 입을 앙 다물고 인중을 빼죽이 길게 늘어뜨린 표정이 너무나도 원숭이 같았다. 아니 이거 뭐예요, 진짜 바보 같아. 나는 혼자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거봐요 제가 사진을 진짜 진짜 못 찍어요. 아니 못 찍힌다 해야 되나, 변명하는 모습도 바보 같아서 귀여웠다. 보여줄 말짱한 사진이 없다던 과장님의 말이 그제야 확실히 이해가 갔다.




"현서 씨. 근데 오늘 되게 예뻐요."




한참 서로 웃다가 갑자기 이상하게 조용하다 싶었는데, 상길이 목을 큼큼 가다듬고 나서 고개를 저쪽으로 하고 한 마디 던졌다.




"으악, 뭐래. 소름 돋았어."




낯간지러운 말에 면역이 없어 그가 수줍게 전한 마음을 나도 모르게 장난스레 튕겨내 버렸다. 그래도 진심으로 싫지는 않았다. 애써 꾸미고 귀걸이를 찾아 단 보람이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며 허둥대는 그의 얼굴이 또 한 번 벌게졌다. 왠지 옆에 두고 계속 놀려 주고 싶은 남자다. 아름다운 벚나무와 날씨가 주는 고양감이 왠지 조금씩 전이되어 다른 마음까지 달뜨게 만드는 듯했다. '흔들다리 효과'의 벚꽃 버전일까. 아무려면 좋다. 결심했다. 오늘 밤은.




"우리, 저녁은 그냥 간단히 먹고 같이 어디 갈래요?"




"네? 어디요?"




"제가 아는 바가 있어요. 같이 가요."




"아, 저 술은 잘 못 하는데요."




별, 반전 요소가 왜 이렇게 많나 이 남자는. 본 중 가장 덩치 값을 안 하는 사람이다. 뭐, 그게 이 사람의 매력이라면 매력인 것도 같다.




"거기는 그런 걱정 안 해도 돼요. 가요."




그간 만났던 남자들에게서 절대 채워지지 않던 무언가가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 그간 나는 정말 외로운 만남을 하고 살았구나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돗자리를 접고 자리를 정리했다. 그의 두꺼운 팔에 닿을락 말락 옷소매를 살짝 붙든 채, 나는 그를 '바 레메디'로 인도했다.




<4화 (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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