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멋대로 May 01. 2024

자존감이 바닥일 때, <코스모폴리탄> (1)

5화 (1)



 

컨퍼런스실 문이 열렸다.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님." 팀장이 상체를 꾸벅 숙였다. 대표가 탄 엘리베이터 문이 스륵 닫히자마자 팀장은 고개를 들면서 입가에 머물던 미소를 단번에 거둬들였다. 팀장의 시선이 방금 마친 보고에 동석한 백 과장 쪽으로 향했다. 무어라 짤막한 지시를 내리는 듯 보였다. 그러고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옆의 회의실로 들어갔다. 가만 서서 굳은 표정을 한 백 과장이 이 쪽을 한 번 슥 쳐다보고는 핸드폰을 꺼내들어 조작했다. 모니터 우측 하단에 노란 알림 창이 떴다. 팀원만 있는 카톡방에 과장이 띄운 메시지였다. '전부 소회의실로.'

 

메시지를 받은 모두가 뻘밭에 몸을 파묻은 게처럼 파티션 위로 눈만 빠꼼 드러내어 시선을 교차했다. 얼굴의 반도 보이지 않았지만 각각의 표정이 알 만했다. 새 프로젝트에 대한 우리 팀의 보고가 오늘 오전 대표실에서 있었다. 전 팀원이 이 보고 건으로 보름 가까이 고생했다. 나 역시 최근 2주간 평균 퇴근 시간이 오후 9시였을 정도로 보고 준비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런데 무언가,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다.

 

 

 

"문 닫아."

 

 

 

회의실에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 인원에게 팀장이 말했다. 한 쪽 팔에 수첩을 안아든 팀원이 재빨리 노는 손으로 문 손잡이를 당겼다. 반투명한 미닫이 유리문이 '까아악' 소리를 내면서 닫혔다.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 앞에 선 팀장이 두 손을 테이블 위에 걸쳐 기대면서 아래를 보던 머리를 천천히 들었다.

 

 

 

"어이."

 

 

 

침묵이 이어졌다.

 

 

 

"자료 만들 때 수치 바로 챙기라고 내 말 안 했나?"

 

 

 

안 했을리가 없다. 우리끼리 하는 표현이지만 팀장은 숫자에 미친 양반이다. 수치와 그래프를 들여다보고 잡도리하는 게 일이다. 수사적 의문에 더해서 평소에 잘 안 쓰려 하던 사투리 억양까지 섞어 말을 꾹꾹 누르는 모습을 보아하니 칼춤 한 번 제대로 출 거리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내가 오늘 대표님 앞에서 얼마나 개 쪽을 당했는줄 알아? 최종적으로 검토 못 한 나도 잘못인데 내가 한 개부터 열 개까지 일일이 다 챙길 수가 있냐 이말이야. 느이 중에 지금 나보다 바쁜 사람 있어? 있으면 말 해. 이런 기본 수치는 니들끼리 교차검증을 제대로 해 놔얄 꺼 아니냐고 이, 씨."

 

 

 

팀장은 결국 소리를 빼액 질렀다. 자리에 앉은 팀원들은 현충일에 사이렌 소리를 들은 5공 시대 사람들처럼 바짝 굳어서 동시에 고개를 푸욱 묻었다.

 

 

 

"느이 아나, 느이들 싼 똥 치울라고 내 얼마나 날마다 개고생하는 줄 알면은 이따우로 일 못해, 어? 누구는 뭐 좀 지시하고 하면 일한지 맻 년이 됐는데 알아서 하나 할 줄 모르고 뭐가 어쩧고 저쩧고 갖다 붙이는 말만 많고, 누구는 전년도 시장조사 수치 찾아다 옳게 넣으라고 시켰더니만은 3년 4년 전꺼를 갖다가 턱 잘도 넣어 놓고. 기가 찬다 기가 차."

 

 

 

팀장이 내뱉는 음절 하나하나가 따갑게 느껴졌다. 대상을 콕 집지 않았지만 왠지 나를 향한 비난으로 들렸다. 이번 보고 ppt 안에 들어가는 수치에는 대부분 내가 관여했다. 그 가운데 일부 숫자가 유독 튀어서 팀장에게 재차 삼차 이걸 넣는 게 맞냐고 묻는 일도 몇 차례인가 있었다. 결국 내가 맡은 파트가 보고에 중대한 결점이 된 걸까.

 

내 혼자 십자가 다~ 짊어지면 뭐해, 진짜 지겹다 지겨워 아주. 햐, 알아 주고 열심히 따라 주는 사람도 없는데 내가 진짜 이짓꺼리 와 하고 앉았노.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팀장이 허공에 분노를 내질렀다.

 

 

 

"박현서."

 

 

 

넋두리를 늘어놓다 팀장이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다. 속이 뜨끔했다. 왜 나를. 여럿이 힘을 합쳐 한 줄로 들고 가던 통나무 하나를 갑자기 혼자 짊어진 듯한 기분이 되었다. 무겁다. 버겁다. 몸이 기우뚱 기울어 버릴 것 같았다.

 

 

 

"네."

 

 

 

"너 뭐야?"

 

 

 

내가 뭐긴요. 나는 난데요, 속으로 대답하다 뜬금없이 어릴 적 수 없이 반복했던 유치한 말싸움 한 토막이 떠올랐다. 야 너 왜 이렇게 해? 내 맘인데. 니 맘만 있냐? 내 맘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체 뭔 논리인지를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A가 나오면 응당 B가 튀어나와야 하는 한 쌍의 구조였다. 비슷한 게 또 뭐가 있으려나. 난 이제 지쳤다는 말에 따라붙는 땡벌 땡벌?

 

겉보기에는 말을 잃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몸을 사리는 모양이었겠지만 실은 이런 웃기지도 않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오랜 습관이다. 어릴 때부터 누군가에게 혼이 나거나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일부러 엉뚱한 생각을 했다. 상황이 내게 가하는 압박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우스운 생각을 하면 한 순간이나마 정신적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임시 방편일 뿐이었다. 상황을 끝내려면 언제나 공포의 대상을 직접 마주해야만 했다.

 

 

 

"너 뭐냐고 임마아!"

 

 

 

'임마아'에 힘을 가득 실은 노호였다. 언젠가 TV에서 본 쿠크리 나이프가 떠올랐다. 무게 중심이 날붙이 끝에 쏠려 있어 휘두르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무자비한 칼이다. 팀장의 말은 그처럼 날카롭고 둔탁하게 귓바퀴와 고막을 탁 찍어 가르고 들어와 내 여린 속을 숭덩숭덩 헤집었다. 도마 위의 순두부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순두부 탕탕이라네. 형태도 없이 짓뭉개지지요. 고개를 살짝 들고 팀장 쪽으로 눈을 돌려 검은자위를 천천히 들어올려 눈을 맞췄다가 재빠르게 내렸다. '당신의 지적은 옳습니다. 아직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은 당신이 나를 혼내시니 뭐 당연히 혼날 만한 일을 했겠지요. 그냥 저는 머저리입니다.'라는 의미다.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가 자신을 나무라는 주인 앞에서 하는 행동과 똑같다는 생각에 조금 자괴감이 들었다.

 

팀장은 한참 동안 모두 앞에서 나를 비난했다. 역시 내가 넣은 숫자 중에 무언가 잘못이 있었다. 그런데 그거, 내가 그래서 세 번이나 물어봤잖아요. 그렇게 하라며요. 머리속으로 열심히 반박했다.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화가 난 팀장을 이길 팀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겨도 지고 져도 진다. 그냥 맨바닥에 바싹 엎드려 빌어야 한다. 아이구 못 배워먹은 쇤네가 잘못했구만유. 응당 벌을 주셔유, 대감 나으리. 아냐 이건 너무 돌쇠 같다. 나는 여자니까 여자 노비로 해야 하나. 여자 노비의 클리셰는 잘 모르겠다. 잘못했사옵니다, 는 노비 치고는 너무 격이 있는 것 아닌가. 아니 그리고. 따지고 보면 팀장은 대감이 아니다. 같은 노비다. 노비 앞잡이 정도 되는 인물이 대감 눈에 한 번 못 들었다고 같은 노비를 잡아다 대표로 치도곤을 놓는 것이다. 이렇게 노비애 없이 치사할 데가...

 

멈추지 않는 폭격 속에서 이성을 유지해 보려고 나는 부단히 애썼다. 망상을 방공호 삼아 숨었다. 그러나 콰앙 콰앙 터지는 폭발음은 어떻게 흘려보내더라도 몸을 웅웅 울리는 진동과 충격파는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조금씩 데미지가 쌓였다.

 

 

 

"가만 보면 너 참 불성실해. 다른 팀원들 다 죽어라 일할 때 너만 쏙 어디 빠져나가냐? 응? 너 늦게까지 일 하는 꼴을 못 봤어."

 

 

 

퍼엉. 포탄이 제대로 머리 위에 떨어졌다. 너무나도 아찔한 공격에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2주간 특별히 바빴던 것은 둘째 치고, 정시 퇴근을 못한 지 이미 수개월이다. 그간 단 한번도 팀원 중에서 가장 먼저 퇴근해 본 적이 없었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통에 하마터면 '반박'을 해버릴 뻔했다. 여기서 반박을 하는 순간 팀장은 옳다구나 하고 나를 낱낱이 해체하여 회사 전체에 나(였던 것)를 주렁주렁 매달아 전시할 기세로 달려들 게 분명했다.

 

공상의 보호막이 깨지고 나는 순식간에 현실의 압박과 공포에 휩싸였다. 과연 내가 이런 모욕을 다른 사람 앞에서 들을 만큼 잘못한 걸까. 대체 나는 뭘 위해서 이 모든 스트레스를 짊어지고 살아야 할까. 상길이 보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친구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서른 남짓한 사회인이다. 힘들다는 말을 하면 겉으로는 그렇구나, 받아 줘도 속으로는 하나같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다들 그러고 살아. 너만 특별히 힘든 것 같아? 애처럼 징징대지 마. 꼴 보기 싫게. 지극히 외로워졌다.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것 같았다.

 

 

 

회의가 어찌저찌 끝났다. 일부러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뒷정리를 하는 척하면서 고개를 숙인 채 다른 팀원들이 회의실 문을 나서기를 기다렸다. 주변이 고요해졌을 때 주섬주섬 노트와 펜을 챙겼다. 제 자리로 돌아가는 대신 조용히 화장실로 향했다. 사방이 막힌 화장실 칸에 들어서 달카닥, 잠금장치를 밀어 잠갔다. 닫힌 문을 향해 서서 주먹을 한 번 꼬옥 쥐었다 폈다. 손에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바지 대신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털썩 앉았다. 차가운 두 손으로 얼굴을 폭 감쌌다. 이윽고 끄윽 끄윽, 뜨겁고 서러운 소리를 손가락 사이로 조용히 흘려보냈다.

 

얼마간 고개를 쳐박고 있다 보니까 코 뒤쪽이 꽉 막혀 답답했다. 휴지를 손에 돌돌 말아쥐고 큰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흥 흥, 코를 풀었다. 휴지의 남은 깨끗한 부분으로 척척해진 눈가와 뺨까지 살살 눌러 닦았다. 인간은 왜 감정이 극한으로 치달으면 얼굴에서 체액을 쏟아내도록 설계되었을까. 꼴 사납고 번거로운 일이다. 핸드폰을 꺼내 셀카 모드로 전환하여 얼굴을 살폈다. 눈알은 벌겋고 눈두덩이가 부어올랐다. 뺨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히 남았다. 커버할 화장품 같은 것 좀 갖고 올 걸, 하다 웃음을 살짝 흘렸다. 준비물까지 챙겨다 놓고 우는 건 아무래도 웃긴 일이다.

 

회의실에서 나온지 5분이 조금 지났다. 슬슬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상사에게 탈탈 털린 인원은 직후에 자리를 오래 비워선 안 된다. 그 뒤로 벌어질 일이 빤히 보여서다. 현서 씨 어디 갔어? 뭔 일 있는 거 아냐? 가 봐야 되는 거 아냐? 자기가 한 번 가 봐. 나를 빼고 자기들끼리 판 카톡방에 띄울 글을 찍어누르는 키보드 소리가 따가다닥 따가다닥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알면서도 쉽게 나갈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펑펑 운 못난이 인형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핸드폰 화면을 통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휴지로 눈물 자국을 조심조심 지워내고 있을 때, 누군가 화장실 문을 콩콩 두드렸다.

 

 

 

"현서 씨, 안에 있어?"

 

 

 

역시. 예상을 조금도 빗나가지 않는구나 싶었다.

 

 

 

"네 과장님. 안에 있어요. 금방 나가요."

 

 

 

괜찮냐는 물음에 네 괜찮아요, 일부러 명랑한 톤으로 답했다. 울어서 잠긴 목소리를 감추고 싶었다. 목소리가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문 밖에 선 하나 과장님이 재차 걱정을 보탰다. 눈치 하나는 빠르다. 아니 하나가 아니다. 추진력도 좋고 눈치까지 빠른 재원인 것이다. 하나 과장님만큼만 능력 좋고 회사 생활을 잘 했다면 오늘 내가 이런 모욕을 당할 일도 없었을까. 괜한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지 말고 나와 봐. 나랑 잠깐 얘기해 응?"

 

 

 

명실상부 에이스 팀원이 팀에서 가장 겉돌고 문제를 일으키며 일 못하는 직원을 챙기는 꼴이라니. 더욱 서러워졌다. 나와 과장님의 세계가 변기 칸 문을 경계로 둘로 나뉜 것 같았다. 변기 위에 앉은 나는 그냥 한 덩이 똥이었다. 모두가 꺼리는 쓸모 없는 존재. 누가 물을 내려 주었으면, 그래서 어딘가로 확 쓸려 내려가 사라졌으면 싶었다. 자존감이 바닥이 났다.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몇 분 더 대치한 끝에 과장님과 나는 빈 회의실에 들어가 마주앉았다. 나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계속 고개를 수그린 채 있었다. 혼 좀 났다고 일터에서 울어버린, 찌질한 패자의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과장님은 연신 나를 안쓰러워했다. 팀장 그 드러운 성깔 진짜 응, 내가 한 번 단단히 벼르고 있다며 열심히 내 편을 들어 주었다. 거기에 대고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아니에요 과장님 제가 거슬릴 것 없이 더 잘 했어야죠 뭐, 정도로 받아주었다. 아무튼 많이 고마웠다. 하나 과장님은 참 멋있는 사람이다. 나와는 다르게.

 

퇴근하고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는 과장님의 제안은 완곡히 거절했다. 유부녀에다 이제 6개월 된 아이가 있는 사람이다. 육아 유연근무를 쓰고 있어서 하나 과장님은 다른 팀원보다 한 시간 일찍 퇴근한다. 나 하나 위로해 달라고 과장님을 기다리게 만들거나 그가 가족과 함께 나눌 귀한 시간을 뺏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또 과장님이 계산을 할 텐데 염치 없이 모른 체 얻어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하나 과장님을 정말 좋아하지만, 무엇보다도 오늘만큼은 회사 사람과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 근처에도 있기 싫었다.

 

 

상사에게 혼이 났다고 뭉뚱그려 보낸 메시지를 보고 상길은 나를 걱정했다. 퇴근하고 보러 갈까 내게 물었다. 그런데 도무지 미안해서 흔쾌히 오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 가까운 사람 앞에서 무너지는 법을 모른다. 극도로 경계하는 편이다. 다들 힘들 텐데. 다 자기만의 고충이 있을 텐데. 어린아이처럼 굴기 싫다. 정말 고맙지만 오늘은 혼자 있어야겠다고 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떠오르는 장소는 하나 뿐이었다. 남자친구도 가족도 아닌 제3지대. 감정을 상대에게 전이하지 않고 덜어낼 곳은 거기밖에 없었다. 처방과 치유가 절실했다.




<5화 (2)에 계속>

이전 06화 봄바람에 설렐 때, <피치크러시/체리블라썸> (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