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2)
지금 OO, OO 행 열차가 들어오는 중입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안전선 뒤로…
안내방송이 울리자 팔렸던 정신이 돌아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조잘대고 있었다. 조금 들떠 버렸다. '바 레메디'에 누군가와 함께 방문하는 건 처음이어서다. 역에 들어선 지 15분 정도 흘렀을까. 사람들이 우리 뒤로 줄을 죽 섰다. 시간표상 7~8분 전에 와야 했던 차 한 대가 연착되어 사람이 몰린 것 같다.
토요일 저녁 시간인데 마치 평일 출퇴근 시간처럼 붐볐다. 평소 같으면 속으로 불평을 쏟아냈을지 모르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러든지 저러든지 지루한 시간을 함께 흘려보내 줄 사람과 함께다.
열차가 승강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떠벌이던 입을 잠시 닫고 정면을 바라본 채 섰다. 한 량 한 량 연달아 빠르게 눈앞을 스치는 모습이 꼭 차라락 돌아가는 영사기 필름 같다. 맨 앞에 선 우리의 실루엣이 스크린도어에 반사되어 그 위로 겹쳐 보인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작은 키가 아니지만 상길의 옆에 선 내 모습은 퍽이나 앙증맞다.
열차에 올라타 손잡이를 붙들고 나란히 섰다. 왠일인지 객차 내 면면에서 여유와 미소가 읽혔다. 나에게 지하철 등 대중교통은 그간 언제나 답답하고 숨 막히는 공간이었다. 아침저녁 깊은 갱도로 향하는 광차에 지나지 않았다. 그 안에 몸을 실은 모두가 각자의 일터에서 삶의 정수를 쏙 빨아 먹힌 반 송장 같은 까만 얼굴로만 보였다. 뻐근한 피로가 사방에 싯누렇게 들러 붙은 듯했던 공간에서 긍정적인 기운을 읽어 낸 건 정말 오랜만이다.
아마도 주말이어서일지 모른다. 평일이면 또 여느 때와 같겠지 했다가, 어쩌면 주위 환경이 바뀐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모두 제 처한 상황에 맞게 세상을 인식한다. 기쁨이 깃든 사람은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골라 볼 줄 알게 된다. 반면 절망에 빠져 사는 사람은 온 사방이 구렁텅이다. 노란 색안경을 끼고 본 세상이 파랗게 보일 일은 없다.
짧은 네 정거장을 이동하는 동안에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입 닫고 재미 없게 산 나날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부단히 떠들었다. 내가 말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였다. 열차 출입문 옆에 붙은 '에듀윌' 광고 하나를 가지고, 저거 광고하던 서경석이 실제로 공인중개사 자격증 딴 거 아냐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에듀윌은 공무원 공인중개사 뭔 IT관련 기능사 등등 안 다루는 게 없다고 나중에는 에듀윌이 배출한 국회의원 대통령도 나올 것 같다는 우스개를 늘어놓았다.
상길은 어느 주제든 적절히 맞장구를 치면서 흥미롭게 맞받아 주었다. 그러고 보면 서경석이 요새 TV에 잘 안 보였던 것 같네요, 예전에 어릴 때 조혜련이랑 MBC에서 했던 ‘울엄마’라는 꽁트 되게 재밌게 봤는데. 그게 뭔데요? 아니, '경석아!'랑 '쪼매난 예쁜이' 몰라요? 모르는데요. 와 진짜 아저씨 같았어 방금. 어허, 아저씨라뇨 세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요 무슨….
농담을 주고받는 새 열차가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내려야 하는데 통로에 사람이 그득했다. 언제나처럼 가방을 꼭 틀어쥐고 몸 쪽으로 바짝 붙였다. 틈을 비집고 나갈 채비다. 그 때 출입문 쪽으로 가만히 시선을 뻗던 상길이 손잡이를 잡은 팔과 자신의 어깨 사이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나즈막히 말했다. "현서 씨, 사람 많으니까 제 뒤에 바짝 붙어 오세요." 그러더니 뒤따르는 나를 의식하면서 천천히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상길의 뒤에 바싹 붙어 그가 넓혀 놓은 공간을 따라 조심조심 발을 옮겼다. 걸음마다 그의 큼지막한 등판이 눈 앞에서 들썩였다. 조금 남자 냄새가 났다. 이름만 아빠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아빠 같은 면이 있네. 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듬직하다는 감정을 이성에게 처음 느끼는 순간이었다. 말이 좀 통하는 상대 정도에서, 살짝 달리 볼 수도 있는 힌트를 발견한 심정이었다.
"근데 정말 괜찮겠죠? 저 얼굴도 잘 빨개지고 그래서."
그리고 정확히 20분 만에 상길은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바에 들어서서 '증상'을 각자 종이에 적어 바텐더에게 전달한 뒤였다. 분주하게 음료를 준비하는 바텐더를 보면서 나에게 "혹시 그렇게 돼도 놀리면 안 돼요." 라며 불안한 티를 냈다. 이해가 가기는 했다.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은 지 못해도 6년은 되었다고 하니, 나 같아도 걱정이 될 것 같다.
상길에게 음주 하면 친구들 따라 눈 꼭 감고 소주를 '원샷' 하던 기억이 거의 전부라고, 오는 길에 들었다. 어릴 때는 사람들과 섞이고 싶어서 객기로 마셨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의미 없는 폭음에 지쳐 술과 술자리 모두 멀리 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술자리에서 맨날 듣는 말이 '덩치 값 못한다'는 거였어요. 남들 따라 막 달렸다가 금방 얼굴 터질 것처럼 돼갖고서는 비몽사몽 정신 못 차리고 있던 게 대부분이었거든요."
그 말을 듣고 뒤늦게 걱정이 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나는 좋았던 것이라도 이 사람에게 안 맞는다면 그냥 꽝인데 어쩌지 싶었다. 이곳에 오자는 얘기는 좀 성급한 제안이 아니었을까, 바텐더에게 부탁해 그냥 무알코올 음료를 대신 주문할까 여러 생각에 빠졌다. 그런데 상길의 생각은 달랐다. 바에 들어와서 내부를 둘러보고 바텐더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눠보더니, 한 잔 꼭 마셔 보고 싶다고 했다.
레메디에 막 도착했을 때 간판을 보고 상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재래시장 안에 이런 데가 있어요? 왜? 갑자기?" 그러면서도 정말 들은 대로 독특한 공간이라며 분위기가 정말 좋다고 했다. 이런 데 와서 제대로 시간을 보내 본 적이 없다면서, 정면에 늘어진 술병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바텐더 특유의 빠릿하지만 절제된 몸짓을 보면서는 "잘은 모르지만 저 분, 왠지 신뢰가 가네요." 하고 소곤소곤 덧붙였다.
그럼, 술에 대한 나쁜 기억을 좋은 경험으로 바꿔 주는 게 특기인 양반이다. 바텐더의 '처방'이 오늘 밤에도 유효하기를 바라면서, 살짝 긴장되는 마음으로 술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혼자만 좋아해 왔던 무언가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는 순간의 떨림이란.
"그런데 아까 뭐라고 적었는지 정말 안 알려 줄 거예요?"
증상을 작성할 때, 상길은 펜을 쥐고 꽤나 고민했다. 그러다 갑자기 나를 등진 자세로 상체를 구부정하게 기울인 채 내용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훔쳐 볼 틈이 한 치도 나오지 않는 완벽한 철통 방어였다. 황당해서 아니 뭐야 왜 숨겨요, 하는 나를 아랑곳않고 아 잠깐만요 잠깐만요, 하더니 끝내 한 자도 보여주지 않았다. 거기에 나는 참나 그럼 나도 안 알려줘요 하고 새퉁스레 되받아 버리고 만 것이다.
"그건... 노 코멘트입니다."
참 별게 다, 하는데 바텐더가 조용히 다가와 내 앞과 상길의 앞에 잔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둘 모두 색이 굉장히 곱다. 그간 처방받았던 것과 다르다. 이번에는 정말 번듯한 칵테일이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여성분께는 '체리블라썸', 남성분께는 '피치크러시'를 레메디 스타일로 재해석해 처방해 드립니다."
바텐더의 말에 서로의 앞에 놓인 잔을 각자 뚫어져라 쳐다봤다. 체리블라썸이라, 이름부터 외양까지 굉장히 직관적인 칵테일이다. 약간 볼록하게 생긴 원통형 잔에 길쭉한 직육면체 모양으로 생긴 커다랗고 투명한 얼음과 고혹적인 분홍 빛깔을 띤 술이 담겨 있다. 탄산이 있는지 기포가 아래에서 조금씩 올라온다. 잔 표면에 맺혀 구르는 물방울까지 멋스러워 보이는 한 잔이다.
"우와. 진짜 예뻐요." 감탄과 동시에 바쁘게 손을 놀려 스마트폰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이건 사진을 찍지 않으면 손해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일었다. 한 손으로 잔을 잡고 꽂혀 있는 빨대로 맛을 봤다. 청량한 탄산감과 함께 상큼한 체리 과실 향이 첫 입에 느껴졌다. 뒤이어 산뜻하고 상쾌한 기운이 다가왔다. 꿀꺽 삼키고 나니 희한하게도 꽃과 꿀 향이 입 안에 머물렀다. 마치 봄 기운이 입 안으로 들어온 것 같다.
"봄의 기운을 간직한 술이라면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요. 특별히 벚꽃을 닮은, 살랑살랑 간지러운 봄바람 같은 느낌을 담아서 만들어 봤습니다."
내가 적은 '증상' 거의 그대로다. 아까 벚꽃을 보고 와서 봄바람에 마음이 둥둥 떠 다니는데, 이 간지러운 기분을 계속 가져가고 싶다고 썼다. 하여간에 실망을 시키는 법이 없다.
"그런데 이 꽃 향은 뭐예요? 진짜 꽃이라도 갈아 넣은 건 아닐 테고."
"생제르망이라는 엘더플라워 리큐르를 쓴 거예요. 달콤한 과일 향이랑 꽃 향을 낼 때 주로 써요. 주로 '프렌치 김렛'이라는 칵테일에 대표적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생제르망, 엘더플라워, 리큐르 등 모르는 용어가 연달아 나오니까 또 어지러워졌다. 어쨌거나 맛이 훌륭하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는 생각으로 대충 흘려듣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상길이 오, 오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둥그런 눈으로 설명을 열심히 따라가려 하고 있었다. 경청 스킬이 대단하다. 여태 본 모습으로 미루어 보자면 아마 길을 걷다가 누군가 '마음 공부'나 '심리 치료' 운운하며 이야기 좀 하자고 들러붙더라도 그대로 서서 십분이고 이십 분이고 들어줄 것만 같다.
"잠깐, 잠깐만요. 이쪽 것도 한 번 설명해 주세요."
반응에 신이 난 바텐더가 설명을 길게 늘어뜨리자 보다 못한 내가 나서서 한 차례 끊었다. 이야기를 듣느라 상길은 아직 자신의 칵테일을 맛도 보지 못했다. "아, 이거는요." 경로를 잃은 내비게이션이 한 번 다시 탐색하는 시간을 갖는 것처럼 바텐더가 잠시 주춤했다. "설명 드리기 전에 우선 맛 한번 먼저 보시겠어요?"
그 말에 따라 상길은 자신 앞에 놓인 잔을 쥐고 조심스럽게 빨대를 입에 물었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가 위가 들어가고 아래 쪽이 나온 볼륨감 있는 잔에 든 새빨간 술을 천천히 마시는 광경이 재미있었다. 너무 예쁜 거 마시는 거 아니에요, 장난 치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눌렀다.
잠시 머리를 숙였던 상길은 금세 고개를 들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맛있어요, 맛있어요. 이거 진짜 맛있어요. 상길은 연달아 세 번 맛있다는 말을 뱉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너무 좋은데요. 술 맞아요 이게?" 마치 맨 처음 '토끼구름'을 맛봤던 내 모습과 같이 반응했다.
"네. 처방해드린 피치크러시는 복숭아 리큐르로 유명한 '피치트리'와 크랜베리 주스를 베이스로 만든 칵테일인데요. 단순해서 기주만 있으면 집에서 누구나 만들 수 있을 정도예요."
"맞아요. 복숭아. 황도 국물 같은 향이 나요 술에서. 제가 황도를 진짜 좋아하거든요. 어떻게 술에서 이런 맛이 나지 진짜."
"피치트리를 사용한 술들 특징이 대개 그래요. 친근하고 편해서 칵테일 입문자들이 많이 찾아요. 원래 알코올도수가 비교적 낮은 칵테일이기도 하고, 이건 특별히 제가 맥주 수준로 알코올도수를 조절해 두어서 시간 들여서 천천히 조금씩 맛 본다는 생각으로만 드시면 술을 잘 못 드셔도 별 문제 없을 겁니다."
바텐더 말을 들어 보니 아마 증상을 적는 종이에 술을 잘 못 마신다는 말을 써둔 것 같다. 그런 거라면 나한테 앞서 이야기도 했고, 전혀 감출 말이 아닌데 왜 숨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럼 왜-."
"그리고."
바텐더와 내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왠지 잠자코 있어야 할 타이밍인 것 같아 내 쪽에서 먼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바텐더가 새하얀 린넨으로 잔을 꼼꼼히 돌려 닦으면서 무심한 듯 말을 이었다. "크러시(crush)에는 '반하다'라는 의미도 있고요. 자, 계속해서 즐겨 주시고 필요한 게 있으시면 또 말씀해 주세요." 능청스레 말을 맺어버리는 바텐더가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뭐야 이거.
상길을 홱 쳐다보니 잔을 바라본 채 멍하니 멈춰 있었다. 얼굴이 아까보다 확연히 발그레하다.
"에, 벌써 취했어요? 얼굴이 울긋불긋한데."
"아뇨 아뇨, 아닌데요. 이 정도 갖고는 안 취하죠."
"근데 얼굴 왜 빨개요?"
"그거는 저기... 여기가 좀 덥나 봐요. 안 더우세요? 나만 더운가."
속이 빤히 보이는 이 남자를 어쩔까. 벚꽃을 닮은 술을 한 모금 더 받아들이면서 "참 나." 하고선 고개를 숙이고 쿡쿡 웃어버렸다. 아무래도 오늘 이곳에 함께 오기를 잘 했다. 입에 남은 향긋한 꽃과 달달한 꿀 향에 내내 기분이 좋다. 아무래도 새뜻한 봄을 맞을 준비가 다 된 모양이다.
약제명 / 피치크러시
유형 / 칵테일
재료 / 복숭아 리큐르 1oz, 크랜베리 주스, 스윗사워믹스 2oz
복용 안내사항 / 달달하고 새콤상큼한 칵테일이에요. 알코올도수가 낮아 가볍게 즐기기 좋아요. 복숭아 리큐르의 매력에 딱 '치이기' 좋은 스타일이에요.
약제명 / 체리블라썸
유형 / 칵테일
재료 / 진 1.5oz, 체리브랜디 1/2oz, 엘더플라워 리큐르 1/2oz, 레몬주스 1/2oz, 심플시럽 1/4oz, 클럽소다
복용 안내사항 / 봄처럼 싱그럽고 화사한 매력을 가진 칵테일이에요. 벚꽃처럼 설레는 색감과 가벼운 체리 향, 상큼하고 청량한 맛을 고루 즐기기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