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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May 08. 2024

자존감이 바닥일 때, <코스모폴리탄> (2)

5화 (2)




빗방울이 살갗에 툭 닿았다. 상념에 묻어버린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보도블럭 위에 콩알만한 반점이 점점이 피어나고 있다. 예보에서 분명 흐리다고만 했는데. 우산을 가지러 사무실로 돌아갈까 하다가 그대로 걸었다. 몸이 젖으려나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비가 정수리를 톡톡 건드리는 느낌도 아주 싫지 않았다. 누군가 내 안위를 살피려 머리에 대고 빗물로 노크를 하는 듯했다. 아직 말짱하지? 괜찮지? 푹 젖을지언정 아무렇지 않을 기분이다.


지하철 안은 퇴근하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통성명도 않은 아무개끼리 몸을 바싹 맞대고 지근거리에서 후끈한 호흡을 조용히 주고받았다. 수면에 뜬 먹이를 먹으려는 금붕어처럼 나는 고개를 쳐들고 빠끔빠끔 덜 오염된 공기를 빨아들이려 애썼다. 몇 정거정 뒤에 사람들이 한 차례 우루루 빠져나가고 나서야 조금 여유가 생겼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다시 한 번 깊은 상념의 세계로 빠져들려는 참에, 출입문 앞에 선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위아래 회색 정장 차림을 한 여자는 손잡이도 잡지 않고 한 손에 가방을, 다른 손에 책을 펼쳐든 채 곧이 서 있었다. 갖은 소음 속에서 집중하기 위해선지 활자를 따라가는 눈과 함께 입술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깨에 내려앉는 굴곡진 중단발 사이로 하얀 진주 귀걸이가 슬쩍 보였다. 나이가 적어 보이지 않는데도 귀 밑으로 드러난 턱선이 또렷했다. 군살 없는 체형과 꼿꼿한 자세만 봐도 자기관리가 잘 된 몸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서부터 자신감과 당당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자기 일터에서 인정받고 사는 여성만이 뿜는 멋. 딱 '커리어우먼'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커리어우먼. 예전에는 여기저기서 많이 쓰던 용어였다. 웰빙이라든지, 엽기라든지 하는 키워드와 함께 지금은 거의 죽은 말이 되었지만 한 때 꽤나 유행을 탔다. 여성은 집안에서 얌전히 애 보고 밥 차려 가장을 보조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아직 남아있던 시절, 전업주부 대신 직장인의 삶을 택한 여성은 누구라도 커리어우먼으로 불릴 자격을 갖추었다. 고분고분하지 않고 되바라졌다는 시선을 담아 부정적으로 쓰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커리어우먼은 당대의 '신여성'을 대표하는 말이었다.


이른 사춘기가 찾아올 무렵부터 나도 이 단어에 매료되어 있었다.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써 보일 일이 있으면 늘 커리어우먼이라 적어 냈던 기억이 난다. '국어선생님'이나 '약사' 같은 흔한 답을 쓴 또래 여자아이들을 보면 나는 혼자 속으로 우월감을 느꼈다. 흥, 난 너희들보다 훨씬 멋진 걸 하고 싶어 한다구. 다른 아이들이 적은 직업이 오히려 더욱 또렷한 커리어우먼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한참 뒤 일이었다.


나는 사춘기를 한창 겪는 중이거나 겪고 난 소녀들의 공통된 지상과제에 충실히 매몰되어 갔다. 할머니나 엄마 세대처럼 비참하고 수동적인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는 태도로 무장하는 것이다. 남자들에게 꿀리지 않는, 탄탄한 경력과 우수한 능력을 가진 커리어우먼만이 내가 지향해야 할 길이었다. 조금 더 크면서 보니까 사회 진출과 경제 활동은 성별에 관계 없이 누구에게나 필수 덕목인 세상이 된 지 오래였고 우먼이든 맨이든 간에 옹벽처럼 단단한 취업 관문을 뚫기 어렵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 때는 그랬다.


회사 인사팀에서 최종 합격 통보 전화를 받았던 날이 떠올랐다. 나는 울면서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엄마, 나 붙었대. 하이고오, 고생했어 우리 딸래미 장하다. 우리 모녀는 짤막한 한두 마디짜리 기쁨을 30분어치로 잘개 쪼개어 낱낱이 맛봤다. 통화 중에 엄마한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이제 사회인이야 엄마." 아마 꽤 오랫동안 품어왔던 꿈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도 이제 '커리어우먼'이야 엄마."




입사 이후 몇 년은 모든 게 대체로 괜찮았다. 어릴 적 그려 왔던 미래의 당찬 내 모습에 현실이 어느 정도 부합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회의에 참여하고, 기획안을 내고, 야근을 하고, 월급을 모아 해외 여행을 가고, 퇴근 후에 집 앞 이자카야에 들러 생맥주 한 잔을 시키는 나의 모습을 한 번씩 멋있다고 느꼈다. 대학생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이제야 비로소 꿈꿔 왔던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대체로 만족스러운 나날이 이어졌다. 직장인 할 만하네, 하고 생각했다.


붕 뜬 기분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한 때는 2년 전 즈음이다. 사회인으로서 한 몫을 해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모든 게 지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업무는 늘 비슷한 일의 변형과 반복이었고 의미 없이 느껴졌다. 비슷한 일상의 쳇바퀴를 앞으로 십수 년, 아니 못해도 수십 년은 더 굴려야 겨우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섭게 느껴지는 날이 하루 이틀 늘어났다. 현실과 이상 사이 '허니문 기간'이 끝나버린 것이었다.


5년차가 되자 이 이상으로 일을 하고 있는 모두가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다들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거지. 어디서 동기부여를 얻는 거지. 재미가 있나. 나는 아니었다. 인생에 다른 선택지가 없어 관성으로 굴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의욕이 싹 빠지니 일을 할 때 거의 않던 잔실수가 많아졌다. 자존감이 곤두박질쳤다. 표정이 사라지고 어디 아프냐는 말을 듣는 일이 늘었다. 수다스럽고 활달한 성격은 원래 아니었지만 회사에서도 더욱 겉돌았다. 어찌 보면 한 번 날 잡아 흠씬 두들겨 맞을 만한 빌미를 모두 품고 있던 것이다.




"어서오세요. 오늘은 혼자 오셨나요?"




겨우겨우 웃는 낯을 해 보이고서 안녕하세요, 인사말을 건네는 나에게 바텐더가 물었다. 혼자 왔냐 묻는 걸 보니 아마도 상길을 찾는 것이다. 상길을 데려온 건 한 번뿐이지만 바텐더는 그 날 우리 둘의 분위기를 소상히 읽고 있었다. 둘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해서도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하고 있을만 하다.




"아 네, 오늘은 혼자가 좋을 것 같아서요."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적당히 대답했다. 아무튼 거짓말은 아니다.




"혹시 더우시면 시원한 것부터 한 잔 드릴까요?"




비가 와서 습한지, 잠깐 걸었더니 뒷덜미와 이마에 땀이 조금 맺혔다. 자리에 앉아서 무심코 손부채질을 했는데 그걸 본 모양이었다. 네 좋아요, 대답하자마자 바텐더는 신속하게 테이블에 코스터와 잔을 놓고는 아래쪽의 작은 냉장고로 손을 뻗었다. 바텐더가 꺼내든 것은 맥주였다.




"이건 부데요비츠키 부드바(Budejovicky Budvar) 라는 체코 맥주예요. 라거 맥주의 원형인 필스너 스타일이고요. 버드와이저 아시죠? 미국 맥주. 그 맥주 이름을 이 제품에서 가져왔다고 해요. 복잡한 스토리가 좀 얽혀 있는데, 재미 없는 얘기니까 관두고 우선 시원하게 한 모금 드셔 보세요."




능숙하게 병뚜껑을 따서 잔에 따라 내며 바텐더가 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다. "이거 편의점에도 잘 보시면 500미리 캔입 제품으로 네 캔 만원대에 종종 팔아요. 병으로 된 건 요즘에 잘 안 보이더라고요. 괜찮은 맥주인데 사람들이 잘 몰라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잔을 들어 한 잔 주욱 들이켰다. 꿀꺽 꿀꺽, 식도와 가슴팍이 기분 좋게 저릿저릿하다. 방금 전까지 남아 있던 끈적한 열감이 싹 가시는 기분이다. "후아, 이거 맛있네요." 굳어 있던 얼굴이 순간 풀어졌다. 마냥 탄산감이나 시원함만 강조한 맥주가 아니고 적당히 쌉쌀한 풍미도 있으면서 매끄럽게 넘어간다. 확실히 맛이 잘 든 맥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하신가요? 사실 더우시면 에어컨을 켜 드리고 싶은데 아직 청소가 안 돼서 냄새 날까봐 못 틀거든요. 다음 주에나 업체가 오기로 되어 있어서. 일단 이걸로 버텨 주세요."




바텐더가 장난스레 말했다. 아무렴 괜찮았다. 한여름도 아닌데 벌써부터 덥다고 유난 떨 일이 아니다. 청량한 맥주가 있다면 더욱 그렇다.




"사장님 근데요."




인중에 살짝 묻은 맥주를 검지로 훔치면서 말했다. 별 중요하지 않은 잡담을 한참 나누고 난 뒤였다. 들고 있던 잔을 코스터 위에 턱 내려놓자 얼마 남지 않은 맥주가 찰박 튀어올라 옅은 포말을 만들었다. 바텐더가 듣고 있다는 투로 네에, 대답했다.




"혹시 사장님도 여기 일 하러 나오기 싫고 막 그래요?"




나의 물음에 바텐더가 고개를 쳐들고 파하하 웃음을 떠뜨렸다. 저렇게까지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 웃음기를 여전히 머금은 채 바텐더는 스읍, 소리를 내면서 눈동자를 굴려 적절한 말을 찾았다. "그러게요. 그냥 누워서 가만 있고 싶다는 생각이라면 거의 매일 하는 것 같은데요 저도." 대답하는 바텐더의 입매가 여전히 위로 솟아 있었다.




"왜 물어봤냐면 저는 이제 진짜 출근하기 싫은 것 같거든요. 출근하고 싶어 하는 사람 아무도 없겠지만, 저는 진짜예요. 진짜 진짜."




그러면서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는 바텐더의 얼굴에 장난기가 사라지고 자못 진지한 표정이 들어앉았다. 




"정말 다른 사람들이 뭘로 어떻게 버티는지 모르겠어요. 이제 저는 자신이 없다고 해야 하나. 나 빼고 다들 제 갈 길 잘 찾아 가고 딱딱 할 일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서 혼란스러워요. 사장님만 해도 그렇잖아요. 정확히 자기 분야가 있고 그거 지금 되게 잘 소화해 내고 있는게 정말 멋있단 말이에요. 근데 저는 하나도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요. 가끔 보면 내가 지금 뭔 일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고."




앞뒤 없이 주절주절 뱉어낸 말을 경청하는 바텐더를 보면서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사람도 나 같은 손님 받으면 참 힘들겠지. 답 없이 징징거리기나 하고. 그렇지만 꾹 눌러 두었던 감정의 줄기를 터뜨려 놓으니 흐름을 멈출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 않을 속내가 줄줄이 뒤따라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여기 오는 길에 진짜 멋있어 보이는 여자분을 한 명 봤거든요. 겉으로만 봐도 엄청 포스 있어 보이고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 있잖아요 왜. 어릴 때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하고 막연히 떠올려 본 머리속 이미지가 현실에 그대로 구현된 느낌이라 해야 되나. 아무튼 오늘 같은 날에 그런 사람을 마주하니까 더 막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나도 그렇게 누가 봐도 멋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참 힘든 하루를 보내셨군요." 비어버린 맥주 잔과 반쯤 젖은 코스터를 치우면서 바텐더가 말했다. 그러고는 노즐이 가느다란 주전자를 들어 빈 유리잔에 물을 채워 주었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맥주 한 병을 비워버린 탓에 취기가 살짝 올랐다. 감정을 우루루 쏟아내어 버린 게 조금 멋쩍어서 물잔을 만지작거리다 한 마디 보탰다.




"네. 힘이 좀 빠졌어요. 뭘 위해 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근데 뭐 아무래도 제가 멘탈이 좀 약한 탓이겠죠. 다들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도 어떻게든 잘 버티고 사는데 말이에요."





바텐더가 입매를 일자로 만들고는 아래턱을 살짝 끌어올린 표정을 지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짓는 바텐더 특유의 표정이다. 




"뭐, 힘든 건 힘든 거지요. 남들이야 어떻게 버티든 그런 거 너무 신경 쓰고 주눅 들고 안 그러셔도 돼요. 자책할 필요도 없고요."




"그런가요?"




"제 말은 그러니까, 남들이 잘 버티든 아니든 내가 힘든 거랑은 별개의 이야기라는 거예요. 힘든 게 뭐 죄인가요. 사람마다 버틸 만한 것과 못 버틸 게 다 다른데요. 겉보기에 무엇이든 잘 하고 잘 버티는 것 같은 사람도, 실은 그게 본인에게 할 만하고 버틸만 한 거니까 버티는 거예요."




그의 말이 조금 아리송했다. 나는 정말 아무 걱정 없이 그저 힘든 것을 힘들어 하면 되는 것일까. 어떻게든 무슨 상황에서라도 버텨 내기 위해서 악착같이 노력을 해야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는 게 아닐까. 버틸 만해서 버티는 거라는 사람들은, 그런 혹독한 과정을 통해 단련이 된 베테랑이 아닐까. 그런 모습을 지향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혼란에 빠진 나의 표정에 답하듯 바텐더가 이어서 말했다.




"매운 음식을 아주 잘 먹고 잘 소화하는 사람이 주변에 몇 보인다고 해서 매운 걸 잘 못 먹는 내가 꼭 이상한 사람인 건 아니잖아요. 그냥 매운 게 몸에 안 맞는 건데. 어쩌다 한 번씩 매운 걸 먹을 때마다 죽을 맛인 나에 비해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그 사람들이 특별히 대단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실은 별 거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매운 걸 더 잘 먹을 뿐인데요 뭘. 남들보다 조금 더 맵게 느끼는 걸 흠이라고 할 수도 없고요. 중요한 건 뭐든 견디려는 무리한 자세가 아니라 내가 그 밖의 무엇에 강한지, 무얼 견뎌내는 데 특화되어 있는지를 똑바로 아는 게 아닐까요."




말을 마친 바텐더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분주해졌다. 병을 여러 개 집어 들고 쉐이커에 이것저것 부어 넣기 시작했다.




"제가 아는 사람 얘긴데요."




바텐더가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손질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뭘 하는지 내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아 턱을 괴고 바텐더의 얼굴을 보면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손님이랑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는 사람이에요. 이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에 다녔거든요. 처음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는 어깨가 완전히 올라가서 다 자기 세상 같았대요. 뭐든 잘 풀릴 것 같았고. 이제 인생이 탄탄대로일 거라 생각한 거지요."




얼음이 든 쉐이커를 눈높이로 들어올려 리듬감있게 착착 흔들면서 바텐더가 말했다.




"그런데 뭐, 예상하셨다시피 그게 끝이 아니었던 거죠. 연봉도 복지도 이름값도 다 좋은데 왠지 모르게 너무 갑갑한 거예요. 회사를 다니면 다닐수록 만족스럽지가 않고, 오히려 불행해지는 것 같고. 그러니까 성과도 안 나고. 다른 사람들 보면 다 적당히 만족하고 타협하면서 다니는 것 같은데 왜 자기만 이럴까 고민을 몇 년이나 했대요. "




바텐더가 쉐이커 뚜껑을 열어 잔에 내용물을 따라냈다. 매혹적인 붉은 빛이 드러나 보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사람은 그냥 조직 생활과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맡은 업무 자체도 그렇고요. 남들도 다 이렇게 살 테니까 버티는 게 당연하겠지 생각하면서 괴로운 시간을 보낸 거예요. 그걸 뒤늦게서야 깨달은 거죠. 좋은 데 취업하려고 오랫동안 들인 노력이랑 그때까지 쌓은 경력 같은 게 아깝기도 했겠지만, 결국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고 사표를 냈어요."



마침내 바텐더가 상체를 들고 자리에 칵테일 잔을 슬쩍 내려놓았다. 오렌지 껍질이 돼지꼬리처럼 가느다랗게 꼬여 가장자리에 얹혀 있다. 가까이서 보니 분홍빛 색감이 더욱 고혹스럽게 보였다.




"그래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게 과연 뭘까, 다시 말해 기꺼이 버틸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하면서 다양한 경험과 공부를 해 보다가 예전부터 막연히 꿈꿨던 자기만의 사업을 시작하게 된 거지요 이 양반이. 돈도 별로 안 된다 하고 미래도 불투명하다지만 아무튼 본인은 현재 아주 즐겁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랍니다. 마무리가 조금 싱겁죠? 자, 이건 오늘의 처방인 '코스모폴리탄'이에요."




저번처럼 서둘러 뚝 끊는 듯한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반가운 이름이 나왔다. 코스모폴리탄이라니. 어쩐지 처음 보지만 뭔가 낯이 익다 했다. 서럽게 울다가 누군가 건넨 막대 사탕을 받아 들고 울음을 뚝 그친 아이처럼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아까에 비해 다소 고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저 이거 꼭 먹어보고 싶던 칵테일이에요. '섹스 앤 더 시티'에 나온 거 맞지요?"




고등학생 때 나는 섹스 앤 더 시티 시리즈를 꽤나 좋아했다. 그때도 이미 오래 된 타이틀이었지만 케이블 방송에서 우연히 몇 편을 보고 나서 폭 빠져버렸다. 어쨌거나 커리어우먼들의 이야기 아니던가. 아주 대단히 문제가 될 내용은 없었지만 제목이 좀 그래서 밤마다 엄마 아빠 몰래 다운받아 봤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성공한 여성과 사랑, 외국에 대한 소녀의 막연한 동경을 채우기에 아주 적격인 드라마였다.




"네 맞아요. 저는 본 적 없지만 그 방송 이후로 90년대부터 미국 전역에서 크게 유행했다고 해요. 자, 편하게 맛 한번 보세요."




막상 맛을 보려고 하니까 조금 긴장이 됐다. 어릴 적 환상을 가졌던 대상에 실망했던 일이 한두 번인가. 그렇지만 기대를 안 할 수 없었다. 우선 조심스럽게 향을 맡았다. 신선하고 상큼한 오렌지 계열 과실 향이 코를 타고 올라왔다. 기분이 산뜻해졌다. 여기까지는 완전 합격. 이제 맛을 볼 차례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잔 가장자리에 입을 댔다. 한 모금을 받아들이는 순간 혀 전반에 새큼한 기운이 찌릿 퍼지면서 침샘을 자극했다. 뒤이어 화사한 과실 향이 올라와 콧속을 가득 채웠다. 생각보다 더 달지 않아서 잡스러운 뒷맛은 남지 않았다. 아주 개운하고 깔끔한 한 모금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꾸욱 감았다가 떴다.




"이건 진짜 감격이다."




"어때요. 괜찮아요?"




"상상했던 그 느낌이에요. 섹스 앤 더 시티 드라마를 술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를 나이에 보긴 했는데, 왠지 캐리가 마시는 저 술은 막 달짝지근하기보다 조금 도도한 맛이 날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제 생각에 그 느낌이 딱 있어요. 끈덕지지 않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성공을 손에 쥔 여자가 즐길 법한 도도한 맛."




그렇게 말하고서는 아까만큼 조심하지 않고 드라마처럼 잔의 머리 부분을 손가락으로 휘어잡아 한 모금 더 입에 담았다. 장난 삼아 다리를 꼬고 꺼드럭거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많이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여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살면서 이것 외에 TV판부터 극장판까지 싹 다 챙겨 본 드라마가 없어서 더욱 몰입이 되었을 수도 있다.




"말씀 안 드려도 저보다 잘 알고 계신 것 같지만, 전적으로 드라마 덕이라 해도 코스모폴리탄은 당당하고 멋진 여성을 상징하는 칵테일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늘어 놓은 기물을 도로 정리하며 바텐더가 계속해서 말했다.




"제가 볼 때 손님은 충분히 멋진 사회인이고 그 사실을 즐길 만한 자격이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드리고 싶었어요. 자신이 잘 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돌아볼 줄 아는 것 자체가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라는 증거예요. 그리고 혹독하고 관용 없는 세상이 비정상인거지 당한 매질에 아파하는 사람한테는 잘못 없어요. 때려 놓고 왜 아파하냐고 윽박지르는 사회가 과연 정상일까요. 속상한 일 하나로 불필요하게 자신을 깎아내리지 않았으면 해요."




나는 충분히 멋진 사람. 바텐더의 진심어린 이야기가 마음에 위안을 주었다. 고개를 숙여 천천히 까딱이며 중지 아래 검지를 걸쳐 잔을 톡톡 건드렸다. 고맙습니다, 하고 말을 받기에는 무언가 쑥스러워 대신 농을 쳤다. 




"맞아요. 난 잘 해보려고 했다고요. 나쁜 건 세상이지 내가 아니야."




아주 좋은 정신이에요, 바텐더가 린넨을 들고 다시 흐흐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아까 말한 이야기 속 주인공같이 꼭 그만둬버리는 게 모든 일의 해답은 아니지만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쥐어짤 필요는 없다는 거, 이거는 분명한 사실이에요."




"근데 그 얘기 사장님 얘기죠?"




"네?"




"대기업 때려치고 사업 한다는 거 사장님 얘기 맞죠?"




"어, 그 사람 사생활이 걸린 이야기라 노 코멘트입니다."




자기가 다 줄줄 말 해 놓고 사생활은 무슨. 이럴 때 보면 이 사람도 참 능글맞다. 빙글빙글 웃는 모습을 보아하니 틀림 없어 보이지만. 아이고 됐습니다, 하면서 보니까 어느새 홀랑 한 잔을 다 비웠다. 고민할 틈 없이 똑같은 걸로 한 잔 더 주문했다. 그래 누가 뭐래도 나는 당당하고 멋진, '커리어우먼'이야. 바텐더가 새로 내 준 잔을 손으로 받쳐 들고 한 모금 꼴깍 삼켰다. 맵고 얼얼했던 하루가 상큼하게 씻겨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오늘의 처방전~

약제명 / 코스모폴리탄
유형 / 칵테일
재료 / 보드카(시트론) 1.5oz, 라임주스 3/4oz, 코앵트로 3/4oz, 크랜베리주스 3/4oz
복용 안내사항 / 향긋한 과실 향과 핑크빛 색상, 새콤하고 개운한 맛이 특징이에요. 한 모금만으로 당찬 사회인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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