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2)
유진은 창가 너머로 시선을 한참 드리웠다. 버스가 속도를 줄이고 좌로 우로 돌 때마다 몸이 기우뚱했지만 유진의 고개는 한 방향을 벗어나지 않았다. 유진이 무얼 보는지 아니면 무엇도 보고 있지 않은지는 알 수 없었다. 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다른 곳을 바라본 채 말 없이 동행했다. 그 사이 피곤기가 유진과 나를 파고들었다. 나도 유진을 따라 몸에 힘을 쭈욱 뺐다. 덜컹이는 버스의 움직임에 따라 고개를 가로로 세로로 저었다.
"너 근데 마지막으로 술 마셔본 게 정확히 언제야?"
정류장에 내려 시장 초입을 향해 걸으면서 유진에게 물었다. 날이 조금씩 저물어 가고 있었다. 옷차림이 가벼운 탓에 마주 부는 바람이 살짝 찼다. 유진도 팔이 썰렁한지 팔짱을 낀 자세로 몸을 움츠리면서 대답했다.
"술? 되게 옛날인데. 그 언제야, 대학교 2학년 개총 때였나. 아마 그게 마지막일걸. 그 때도 그냥 입에만 댔을 거야. 다 같이 짠 했으면 마시는 척이라도 할 수 있지 않냐고 하도 지랄 떠는 선배가 있어가지고."
개총이라니. 엄청 오래 됐네, 하면서 다시 조금 불안해졌다. 상길을 레메디에 데려 갈 때와 상황이 다르다. 상길은 술을 양껏 마셔 본 일이 있다. 그리고 술 자체를 싫어했다기보다 본인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해 안 마셔 온 것이다. 반면 유진은 술을 그냥 싫어한다. 이 세상에 '그냥'보다 더 강력한 이유가 있을까. 그냥은 '내 마음과 기분이 그렇다는데 어쩌라고'의 준말이다. '왜'를 물었을 때 '그냥'이 나온다면 설득을 할 기회도 받아칠 말도 사라진다.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걔가 그냥 싫어. 너를 그냥 사랑해. 그냥 하고 싶지 않아졌어. 그냥 모르겠어. 그냥 기분이 그래. 술이 그냥 싫어. 그냥. 그냥.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나는 정말 괜찮겠냐 다시 물었다. 술을 마시는 게 기분을 나아지게 할 만한 방법이 맞을지 유진의 마음을 한 번 더 확인해야 했다. 유진은 이 상황에 아무려면 더 괜찮은 선택이 뭐가 있냐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았다. 유진은 가끔 입을 열지 않고도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전달하는 법을 아는 것 같았다. 그래 안 하던 짓 하고 싶어지는 기분 나도 잘 알지. 애초에 나 역시 하지 않던 행동을 하다 이곳에 우연히 흘러들게 되지 않았나. 가자 그럼, 하고 나는 유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골목길에 접어들자 레메디의 네온 간판이 보였다. 퍼런 어스름에 녹아드는 은은한 빛이 공중에 뿌려졌다. 그 앞에 유진이 잠시 멈춰 섰다. 호들갑 떠는 일 없이 오 신기하네, 하고는 앞선 나를 따라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바텐더와 내가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유진은 성큼성큼 걸어가 내가 늘 앉던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일러 주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가장 구석 자리를 찾아 앉는 걸 보니 역시 나와 유진은 공분모가 있다. 인사를 마치고 내가 자리로 다가서자 유진이 속삭이듯 말했다.
"분위기 묘하다. 이런 덴 처음 와 봤어. TV에서나 봤지."
나도 유진에 맞춰 조곤조곤 말을 받았다.
"맞아, 여기 정말 묘하지."
유진은 내가 어떻게 이곳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서화시장에 이런 데가 다 있는 줄 몰랐다는, 레메디에 처음 방문한 사람에게는 통과의례와 같은 말을 꺼낸 다음이었다. 너 이런 데 원래 혼자 오고 그런 성격 아니잖아, 유진이 말했다. 나는 엷게 웃었다. 그 같잖은 놈한테 차인 다음에 부대찌개 집으로 너 불러낸 날, 너 가고 나서 걷고 걷다가 어찌저찌 흘러 왔다고 설명했다. 유진이 몸을 돌려 나를 바로 보았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사람 치고는 꽤나 놀란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 날 혼자 소주 마시고 청승 떨더니 바까지 간 거야? 대단하네."
분위기가 바뀌어선지 나와 유진은 여느 때처럼 대화하기 시작했다. 꼭 나흘 만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 장례 과정에는 이성과 본성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필요했다. 어느 한 쪽으로 쏠려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죽음을 수습하는 일 앞에서는 완벽하게 이성적이거나 처절하게 슬퍼만 해서는 안 되었다. 유진은 맡은 역을 잘 해 냈다. 그렇더라도 내 눈에는 유진이 힘겨운 싸움을 하는 모습이 역력히 비쳤다. 장례 절차가 끝나갈수록 유진에게는 일종의 중립 지대가 필요해 보였다. 한 쪽으로 치우쳐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선 채로 뭉친 마음을 풀 수 있는 제 3의 공간. 레메디는 명백히 그런 곳이었다.
"앞에 계신 분은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술은 좀 즐기는 편이신가요?"
바텐더가 다가와 유진에게 물었다. 아뇨 저는 술을 원래 안 마시긴 하는데요, 하는 유진의 대답 뒤에 내가 곧바로 끼어들었다.
"사장님, 얘는 술 진짜 아예 안 마셔요. 싫어하는 쪽에 좀 더 가깝다고 해야 되나."
"아 그러세요. 술이 조금 몸에서 안 받는 타입이신가요?"
바텐더가 다시 유진을 보고 물었다. 어 그렇다기보다는, 하는 유진의 말을 내가 또 한 번 가로챘다.
"그건 모르겠고 그냥 얘는 술 마시는 사람을 잘 이해 못 하는 편이에요. 맛도 없는데다 정신 오락가락해지는 게 뭐 좋다고 찾아서들 마시는지 모르겠다고. 근데 실제로 막 먹여 보면 엄청 잘 마실 수도 있죠. 그건 아무도 모르잖아요."
자꾸 왜 말을 자르냐는 식으로 유진이 눈을 흘겼다. 내가 널 좀 잘 알잖아, 하고 내가 익살스러운 미소로 답했다. 유진은 낯선 곳에서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기를 불편해하는 편이다. 이곳이 상대적으로 나한테 더 편한 장소인만큼 내가 개입해서 유진의 심리적 거리를 금세 좁혀 주고 싶었다. 장난을 섞어 분위기를 조금 더 말랑하게 하고 싶다는 의도 역시 없지 않았다. 바텐더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우리 둘을 번갈아 보더니 유진에게 또 한 가지 물었다.
"술이 좀 힘드시면 알코올 없는 음료로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에요. 오늘은 진짜 술을 마셔 보고 싶어요."
유진이 주저 않고 답했다.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여전히 앞섰다. 지금 하는 일탈이 오히려 더 자신의 기분을 망치게 되지는 않을지, 자신의 처방을 떨떠름해하는 손님을 대하는 바텐더의 모습을 처음 눈 앞에서 보게 되지는 않을지 신경쓰였다. 내 걱정과 별개로 바텐더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잘 알겠습니다, 하고는 종이를 집어서 내밀었다.
"그럼 증상을 작성해 주시면 제가 그에 맞는 술 처방을 해 드릴게요."
유진의 시선이 바텐더에서 종이로, 종이에서 내 얼굴로 옮겨갔다. 나는 이게 여기 컨셉이야. 지금 네 기분을 편하게 쓰면 돼, 속삭이면서 유진에게 펜을 쥐어 줬다. 그러고는 바텐더에게 오늘 내 몫의 처방은 필요 없고 친구와 같은 걸로 내 주면 된다고 전했다. 유진은 종이를 양 손으로 들고 천천히 들여다봤다. 나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어 턱을 괴고 유진을 가만히 기다렸다. 오 분 정도 지나고 나서 유진은 내용을 채워 바텐더에게 종이를 건넸다. 내용을 읽는 바텐더의 눈이 평소보다 진지해 보였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유진이 네 괜찮아요, 대답했다.
"할머님이 살아계실 적 고향이 어디였나요?"
"고향은... 전라남도 고흥이요."
"고흥.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바텐더가 입매를 일자로 만들고는 몸을 돌렸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동선 낭비 없이 착착 움직이는 바텐더의 모습을 유진이 흥미롭게 바라봤다. 얼음 덩어리를 들고 무언가 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고갯짓을 하면서 저게 뭐 하는 건지 내게 묻기도 했다. 얼음 깎는 거야, 대답해 주니까 입술을 쭉 빼고 오오, 하는 소리를 냈다. 무언가를 신기하게 보는 유진의 모습이 오랜만이어서 흐뭇했다. 잠시 잡담을 하는 사이에 바텐더는 나와 유진 앞에 전에 봤던 목이 긴 도기 잔과 얼음이 든 투명한 유리잔을 하나씩 놓았다. 그리고는 샛노란 내용물이 든 길쭉한 유리병 하나를 두 손에 들고 우리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고흥 유자로 고흥 땅에서 만든 유자 술, <어떤유자06> 입니다. 한 잔은 그냥 냉장 보관한 상태로 드셔 보시고 나머지 한 잔은 얼음과 함께 맛 보시라고 잔을 두 잔씩 준비했어요. 우선은 이 잔에 먼저 드릴게요."
유자 기름이 위에 떠 있어 살짝 섞어 줘야 한다면서 바텐더가 병을 가볍게 흔들고는 뚜껑을 돌려 열었다. 도기 잔에 술이 천천히 채워졌다. 샛노란 빛깔이 눈에 확 들어왔다. 코에 가까이 가져가기도 전에 피어오르는 유자 향을 느꼈다. 새콤한 유자 맛이 연상되어 입 안에 벌써부터 침이 고이는 것 같았다. 유진은 바텐더가 내려놓은 병을 들고 라벨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복잡미묘한 얼굴이었다. 나는 조용히 잔을 들어 유진을 쳐다보며 눈 높이로 들어 올렸다. 유진이 나를 보더니 저도 따라서 어색하게 잔을 들어 보였다. 유진과 같이 술을 마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순간 이곳에 유진과 함께 있다는 것도 새삼 신기했다. 사람 일 절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술이 넘어오자마자 입 안에 상큼하고 짜릿한 기운이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새콤하고 달콤한 유자즙 그 자체였다. 건조하던 눈이 어느새 촉촉해졌다. 코 너머로 진한 유자 향이 팡팡 터지는 듯했다. 이거 미쳤다. 넌 어때, 하면서 옆을 돌아봤다. 유진 역시 놀란 눈치였다. 내 눈을 똑바로 보더니 나와 상길 역시 이곳에 와서 바텐더가 내 준 술을 처음 맛본 다음 내뱉었던 대사를 똑같이 반복했다.
"이게 술이라고?"
네 술 맞아요, 바텐더가 만족스럽게 빙긋 웃으면서 내 대신 말했다. 아마 일하면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낄 때가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알코올도수가 6도라 시중 맥주 막걸리랑 비슷한 수준이에요. 작은 잔으로 이렇게 천천히 나눠 마시면 그보다 부담은 더 적고요. 유자 캐릭터가 강한 제품이라 술 맛이 막 나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같은 생산자가 만든 고흥유자주라는 제품도 있는데, 그쪽에서는 확실히 알코올감을 느끼실 것 같아서 입문용에 가까운 요 제품을 드려 봤어요."
바텐더가 제품을 간결하고 매끄럽게 설명했다. 그러고 보면 유자 맛을 가진 술을 마셔본 게 처음은 아니다. 한참 전에 유자 맛 소주 비슷한 제품이 유행했을 때 나도 친구들과 맛 본 적이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 취향에 가깝지는 않았다. 어딘가에서 먹어 본 유자 막걸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제품들은 내가 아는 유자 맛이라기보다는 실험실에서 만들어낸 유자 향이 났다. 쉽게 말해 방향제나 살충제에서 많이 맡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 술은 유자 캐릭터가 자연에 가까웠다. 껍질에 있는 쌉쌀하고 진한 맛까지 복합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여운을 느끼면서 술이 반쯤 남은 잔을 다시 코로 가져가 향을 음미했다. 참 기분 좋은 맛이었다.
적당히 즐기고 있을 때 바텐더가 비어 있던 얼음 잔에 마저 술을 채워 주었다. 이 정도도 부담스러우시면 이렇게 얼음이랑 같이 시원하게 드셔도 좋아요, 하는 말을 듣고 맛을 보니 과연 얼음을 넣은 쪽이 훨씬 부담 없고 상쾌했다. 다만 내 경우에는 얼음을 넣지 않은 쪽의 맛과 향이 조금 더 진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유진은 반대로 얼음을 넣은 것이 더 마음에 든다고 했다. 유진은 왼팔을 테이블 위로 끌어올린 뒤 손바닥 아래 부분에 머리를 살짝 기대었다. 잔을 오른손에 쥔 유진은 잔을 바라보며 초점이 풀린 눈으로 손목을 반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흔들었다. 얼음이 잔에 부딪혀 짤랑짤랑 소리가 났다. 유진이 계속해서 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바텐더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이거는 전통주 같은 건가요?"
"네. 정확히 말하자면 지역특산주지만 일단 전통주기는 해요. 인터넷에서도 살 수 있는 제품이에요."
유자로 만든 고흥 지역특산주라고요, 유진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면서 시선을 낮추고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내 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 솔직히 이런 거는 생각 안 했어. 되게 의외야. '바'라는 데서 전통주를 마실 줄도 몰랐고. 그냥 뭐라도 주면은 눈 딱 감고 마셔서 쫌 취해 버리려고 왔거든. 그런데 이렇게 맛있는 게, 또 유자로 만든 술이 나왔다는 게 참."
유진의 목소리 톤이 낮아졌다. 유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바로 알아챘다. 유자는 사실 유진에게 아주 의미 깊은 키워드다. 일단은 고등학생 때 유진의 별명이기도 했다. 유진이 석식을 먹고 나면 항상 조그만 유리병에 담아 온 유자청으로 야간 자율학습 중에 유자차를 타 마셨기 때문이었다. 반 아이들 보기에 굉장히 독특했는지 유진은 그 다음부터 '한유자'라고 불렸다. 지금 생각해봐도 귀여운 별명이다. 이름과도 아주 찰떡이었다.
"맞아. 신기하네. 오늘 같은 날 유자가. 네 별명도 갑자기 생각난다. 한유자. 추억이네."
"그치. 그 별명도 할매 때문에 생겼는데."
유진이 픽 웃더니 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자는 유진의 별명이었을 뿐 아니라 유진과 자신의 할머니를 잇는 소중한 매개였다.
유진네 집은 늘 유자 향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누군가의 집을 냄새로 기억했다. 집집마다 고유한 냄새가 있었다. 어떤 친구 집에서는 물 먹은 종이박스를 한 번 말리고 난 듯한 냄새가 났다. 또 누구네서는 델몬트 유리병에 담긴 보리차 같은 구수한 향이 나기도 했다. 현관에 들어설 때 맡는 냄새는 곧 그 집에 대한 인상과 다름없었다. 집 냄새는 그 집이 지어 보이는 표정처럼 다가왔다.
그렇게 보면 유진네 집은 언제나 봄처럼 활짝 웃는 것 같았다. 겨울에 가까워질수록, 유자 향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더욱 그랬다. 고흥에 남아 농사를 짓는 유진네 외삼촌은 수확 시기가 되면 해마다 신선한 유자를 서울로 왕창 올려보냈다. 그맘때 유진네 집에는 식탁 위에도 거실에도 냉장고에도 베란다에도 유자가 있었다. 할머니가 유자를 손질해 커다란 대야에 넣고 김장하듯 청을 담그는 모습 역시 놀러 갔을 때마다 자주 보게 되는 풍경이었다.
곳곳을 차지한 유자는 유진 집에 핀 개나리 같았다. 할머니는 들꽃처럼 화사한 유자를 솜씨 좋게 다루는 정원사였다. 겨울이어도 봄처럼 싱그럽고 화사한 기운이 집에 넘실댔다. 내성적인 유진이지만 집 안에서는 늘 생기 있어 보였다. 할머니 품에서 유진은 언제나 봄이었다.
유진의 가방에 매일 아침마다 유자청을 담아 준 것도 다름아닌 유진 외할머니였다. 혹여라도 내용물이 샐까 뚜껑을 닫아 돌리기 전에 랩을 한 번 씌우고 보자기로 감싸서 유진의 가방 안쪽에 잘 넣어 뒀더랬다. 유진은 학교에서 손을 많이 쓰는 게 귀찮아 그냥 보온병에다 넣은 채로 싸 가면 안 되냐 했지만 할머니는 완강했다. 미리 타 놓으면 너무 오랜 시간 우러나서 맛이 별로라면서 한사코 병에 넣은 유자청을 유진 품에 들려 보냈다. 유자차를 달고 살아선지 할머니의 보살핌 덕분인지 유진은 당시 웬만한 감기나 독감 같은 바이러스 질환이 유행할 때도 앓아눕는 일이 없었다.
내가 유자차를 즐겨 마시기 시작한 것도 전적으로 유진과 할머니 덕이었다. 할매가 너 가져다 주래, 하면서 유진은 주기적으로 내게도 유자청을 나눠 주었다. 유진 외할머니가 직접 담은 유자청은 아주 진하고 향긋하고 맛이 좋았다. 할머니가 몸져 누우신 이후에는 어쩔 수 없이 어딘가에서 사다 먹기 시작했지만 어떤 제품도 유진 외할머니의 손맛이 묻은 유자청만큼의 맛을 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상실감은 나보다 유진이 훨씬 컸을 것이었다. 할머니가 병원 신세를 오래 지면서부터 유진네 집에는 유자 향이 사라졌으니까.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버렸으니까.
유진은 어느 순간부터 조용해졌다. 곰곰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하다가 잔을 기울여 한 번씩 술을 홀짝일 뿐이었다. 술에 취미가 전혀 없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 모습이 잘 어울렸다. 나는 버스 안에서처럼 애써 말을 붙이지 않고 유진만의 시간을 존중해 주었다. 바텐더도 눈에 띄지 않게 제 할 일을 묵묵히 하면서 조용한 분위기를 무너뜨리지 않으려 애쓰는 듯 보였다.
"선생님, 이거 참 괜찮네요. 골라 주셔서 고맙습니다."
유진이 침묵을 깨고 여전히 술잔을 손에 쥔 채로 바텐더에게 공손히 말했다. 오래 말을 않고 있어선지 살짝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표정은 여전히 없었다.
"맘에 들어 하셔서 다행이네요. 조금 걱정했는데."
"좋아요. 저는. 마음에 들어요."
"저, 좀 주제넘는 말일 수도 있는데."
바텐더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이 정도로 조심스러운 바텐더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너무 감정을 옥죄기보다 마음을 조금 편하게 내려놓아 보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더라도 아주 무너지실 분은 아닌 것 같아서요. 충분히 강한 분이라는 게 저는 느껴져요."
유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유진은 천장을 향해 눈동자를 올렸다가 곧 아래로 시선을 깔았다. 눈을 몇 차례 꿈뻑거리더니 맞아요, 맞아. 나는 강하지. 안 약하지. 우리 할매가 나 그렇게 잘 키웠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또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코로 한숨을 흐으음 길게 내쉬더니 크흠 목을 한 번 가누고 나에게 말했다.
"그거 알어?"
"뭐?"
"나 할매 증상 좀 더 심해지고부터는 유자차 비슷한 것도 한 번 안 마셨어. 지금까지."
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었다. 유진에게 유자란 곧이 할머니와 함께 한 생활이자 내리 받는 사랑이었다. 할머니 없는 세상에 미리 익숙해지려면 우선 그를 상징하는 물건과 먼저 결별해야 했을 것이다. 유진이라면 기꺼이 그런 훈련을 해 왔을 테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서 울지 않을 수 있는 강인한 정신이 그냥 생겨났을 리 없었다.
유진이 잔을 쥔 채 고개를 푹 숙였다. 할매가 고향 땅에서 편안하게 있다 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나 때문에 서울에 계속 있지 않았다면 할머니가 사고 날 일도 없지 않았을까. 유진은 가만가만 읊조렸다. 눅눅해져 오는 목소리에 어째선지 나까지 콧날 근처가 매웠다.
"할매 냄새가 나. 그리운 냄새가 나. 나는 할매 없이 어떻게 해. 나는 할매 없이..."
유진은 내 옆에서 긴 시간 눈물로 눈물로 할머니를 흘려보냈다.
약제명 / 어떤유자06
유형 / 기타주류
알코올 / 6%
생산자 / 어떤하루(녹동양조장)
취급처 / 전통주 보틀샵, 인터넷
복용 안내사항 / 유자 향이 폭발하는 새콤달콤 유자 술이에요. 일본을 대표하는 유자주, '츠루우메 유즈'에 전혀 뒤지지 않는 고유의 퍼포먼스를 가지고 있어요. 알코올도수가 높지 않아 얼음 등과 함께 부담 없이 즐기기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