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멋대로 Apr 10. 2024

추억에 아련해질 때, <려 고구마소주> (2)

3화 (2)




"고구마소주에 대해서 혹시 아시나요?"




고구마소주라. 확실히 생소하다. 특별히 의식해 본 적이 없다. 이름 정도야 살면서 한두 번 마주해 봤다. 친구들 만날 때 가끔 갔던 이자카야 메뉴판에서일까. 그러고 보면 막연히 일본 술 종류 중 하나라고 생각해 왔다. 국산 고구마소주에 대해서는 사실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아뇨. 잘은 모르는데 일본 술 아닌가요?"




"일본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술이기는 하지요. 만드는 곳도 셀 수 없이 많고요."




바텐더가 입매를 가볍게 끌어올리며 답했다.




"한국에는 수요층이 두텁지 않아서 생산자가 별로 없기는 한데, 그래도 제대로 된 고구마소주를 만드는 만드는 곳이 우리나라에도 몇 군데 있어요."




바텐더가 병을 집어들었다. 병목 위 은색 캡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 경쾌하게 휘릭휘릭 돌아가기 시작했다. 앞에 놓인 잔에 투명한 술이 천천히 채워졌다. 가는 줄기를 가진 희고 작은 도기 잔이다.




"그 중에 가장 대중적인 제품이라 할 수 있는 게 바로 이 제품, 국순당 여주명주에서 만든 '려' 예요."




"아, 국순당. 국순당은 저도 알아요. 유명한 회사잖아요."




익숙한 브랜드가 언급되자 순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마트나 슈퍼에서 줄곧 보아 왔다. 아빠가 연중 한두 번씩 찾아 드셨던 백세주도 분명 이 회사 거였다.




"네. 아시다시피 국순당은 국내에서 전통주 위주로 술 만드는 회사 중에서는 인지도도 높고 규모가 큰 곳 중 하나예요. 려를 만드는 국순당 여주명주는 경기도 여주에 시설을 둔 계열사 중 한 곳이고요."



그렇구나, 하며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면서 바텐더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미 없는 얘기는 일단 여기서 끊을게요. 우선 맛부터 한 번 보세요."




맛이 궁금해 나도 모르게 잔과 병을 번갈아 보면서 그의 말을 반은 흘려듣고 있었다. 속마음을 한 눈에 들켜 버렸다.




"바로 드시기 전에 먼저 가볍게 향을 맡아 보셔도 좋아요. 잔을 조금 떨어뜨린 상태에서 조금씩 코로 가까이 가져가듯이."




멋쩍게 네에, 대답하고 잔의 줄기를 잡아 들었다. 지시대로 잔을 멀찍이 떨어뜨렸다가 천천히 몸 쪽 가까이 가져왔다.


잔이 얼굴에 가까워지면서 향이라고 할 만한 기운이 조금씩 코를 타고 들어왔다. 어딘가 낯설지 않다. 분명 아는 냄새다. 뭐지 뭐지, 하다가 순간 팟 하고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아, 이거 완전 생 고구마 향 비슷한데."




"와, 예민하신데요. 단번에 향을 잡아내시다니."




바텐더는 정말로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찐고구마, 군고구마를 막론하고 생 고구마까지 즐겨 먹던 사람이다. 초등학생 때 엄마가 시장에서 고구마 한 박스를 사다 두면 한두 개씩 꺼내다 감자칼로 슥슥 껍질을 밀어 벗겨서 간식처럼 오독오독 씹어 먹기를 좋아했다.


깔깔한 질감과 꼭꼭 씹다 보면 서서히 퍼지는 특유의 단 맛이 중독적이었다. 쪄 먹으려고 사 뒀더니 기집애가 홀랑 다 까 먹는다고 엄마한테 잔소리를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날 거 자주 먹으면 탈 난다는 잔소리도 언제나 함께였다.




"다른 건 몰라도 제가 고구마는 좀 알거든요."




자신 있다 할 만한 분야가 나와 괜히 뿌듯했다. 이 공간에서 완전히 무지한 입장으로 앉아있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으쓱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잔을 천천히 입에 가져다 댔다. 한 모금만큼 꼴깍 삼키는데, 혀와 목을 누르는 가벼운 작열감이 느껴졌다. 알코올도수가 아주 낮지는 않은 것 같다. 마신 뒤 곧바로 코를 통해 숨을 내쉬자 설명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향이 올라왔다.




"이거 상당히 느낌이 좋은데요?"




매끈매끈한 질감에 부담스럽지 않은 향이 마음에 들었다. 바텐더가 미리 내 준 미온수로 한 차례 입을 헹구고, 집중해서 음미하듯 다시 한 모금을 입에 담았다. 맛을 더 제대로 느끼고 싶어 이번에는 바로 삼키지 않고 오래 머금었다.




"증류주라 너무 그렇게 하시면 입 속이 매울 텐데요. 그나저나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입을 오물거리면서 검은자위를 위로 치켜뜬 채 이리저리 굴려 대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바텐더가 말했다. 그 말에 곧바로 내용물을 꼴깍 삼켜버리고는 푸우- 숨을 내쉬었다. 지나치게 무겁지 않고 훈훈한 온기가 속에서 올라왔다. 앞에 놓인 각진 병을 쥐어들고 눈 앞으로 바짝 가져와 라벨을 훑으며 바텐더에게 물었다.




"이거 몇 도 짜리죠?"




"지금 드린 건 25도입니다. 25도와 40도 제품이 있는데, 얘는 버전이 좀 다양해요."




"다양하다고요? 도수 말고 다른 게 또 뭐가 있나요?"




"고구마로만 만든 ‘고구마 100% ’ 상품이 있고 쌀 반, 고구마 반으로 만든 블렌딩 상품이 도수별로 있어요. 그러니까 25도 제품이 두 가지, 40도 제품 두 가지 해서 총 네 가지 버전이 있는 거지요."




바텐더가 다시 등을 돌려 해당 제품을 죽 꺼내다 늘어놓았다. 구분은 라벨의 색상으로 하는 모양이다. 40도 제품은 자색, 25도 제품은 연두빛이다. 라벨 하단에 작게 '고구마 증류소주' 그리고 '고구마 쌀 블렌딩 증류소주'로 구분해 적어 두었다. 생각보다 제품군이 다양하구나 싶었다.




"2022년에는 50도짜리 프리미엄 제품이 나오기도 했어요. 500병 한정이긴 했지만요."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까지 세분화해서 제품을 생산하는 걸까.




"이렇게 내는 이유가 따로 있겠죠?"




"고구마로만 만든 소주 제품이 국내에선 호불호가 좀 갈려서 그래요."




"아 그런가요?"




"네. 고구마소주 특유의 향을 비릿하게 받아들이시는 분들이 꽤 돼요. 그래서 쌀소주를 섞어서 향을 좀 죽인 무난한 제품을 같이 내는 거예요. 너무 매니악하게 가면 수익이 안 나니까요."




그럴듯한 설명이었다. 바텐더가 차이를 한 번 보라면서 블렌딩 제품까지 별도 잔에 조금 따라주었다. 맛을 보니까 상대적으로 깔끔하고 무난했다. 확실히 대중적이어서 호불호가 더 적을 것 같다. 다만 내 개인적인 취향에는 향이 짙은 고구마 100% 버전이 더 맞았다.




"저는 역시 이 쪽이 더 마음에 드네요. 캐릭터가 확실하다고 할까, 계속 향을 킁킁 맡게 되고 뭔가 끌리는 요소가 더 있어요."




"하하. 고구마를 정말 좋아하시나봐요."




"그리고 이것만 맛보다 보니까 왠지 따듯한 국물 요리가 생각나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놀라운데요. 저도 려가 국물 요리랑 정말 잘 어울린다고 늘 말하고 다니거든요. 잠깐만 있어 보세요."




다소 들뜬 반응을 보이더니 바텐더가 홱 시야에서 벗어났다. 무언가를 찾으러 간 모양이다. 잔에 든 술을 조금씩 홀짝이면서 삼사 분 정도 혼자 시간을 보냈다. 역시 괜찮단 말야. 만족스럽게 시음을 이어가던 중 바텐더가 손에 무언가를 든 채 천진한 얼굴로 돌아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여기, 이거랑 같이 드셔 보세요."




바텐더가 내민 건 놀랍게도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레토르트 어묵탕이었다. 비닐 포장이 살짝 뜯어진 채였다. 틈새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방금 데워 온 듯했다.




"아니 어떻게 이걸 갖고 계세요? 여기 이런 것도 파나요?"




목소리 톤이 꽤나 올라갔다는 걸 말을 뱉는 동시에 느꼈다. 예상치 못한 물건을 보고 화들짝 놀라 버렸다. 알코올의 기운으로 늘어지던 눈꼬리가 도로 바짝 치켜올라갔다.




"파는 건 아니에요. 제 밥이거든요. 여기서 끼니 해결할 때 즉석밥이랑 같이 데워 먹으려고 몇 개 사둔 거예요. 어묵을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역시 정말 이상한, 아니 기묘한 바다. 데워 먹는 어묵탕을 주는 바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것도 파는 메뉴가 아닌 물건이다. 얼떨떨한 마음에 재차 물었다.




"와, 이거 정말 먹어도 되는 거예요?"




"네. 보통은 음식 냄새가 나니까 안에서만 먹는데, 오늘은 손님이 없어서 괜찮아요. 비매품이라 돈을 받을 수는 없고 그냥 서비스라 생각하고 드세요."




그러고보면 손님이 참 많지 않은 가게다. 나를 포함해 손님이 한 번에 세 팀 이상 머무른 적이 없었다. 장사가 되기는 하는 것인지, 오지랖에 가까운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이런 형태로 파는 '즉석 어묵탕'이 아직 나오는지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슈퍼나 편의점에서도 본 기억이 없어 더 이상 만들지 않는 줄 알았다. 어쩌면 가족과 기차여행을 하지 않을 나이가 되면서부터 인스턴트 어묵탕이라는 것을 떠올릴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디선가 지나가며 봤더라도 머리속에 남아 있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다.



비닐을 완전히 벗겨 내고 동봉된 일회용 숟가락을 사용해 김이 피어오르는 국물을 한 번 떠서 먹었다. 따스한 온기와 짭짤한 감칠맛에 촉촉히 젖어든다. 그리운 맛이다. 흘러간 흑백 필름 같던 아련한 추억에 알록달록 색이 입혀지는 기분이다.


동그란 어묵 볼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보니 이상하게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조금 취한 탓일까. 오랫동안 잊었던 맛을 우연히 찾은 것이 절절히 기뻤다. 차가운 세상에 살다 마주한 뜨거운 추억 그 사이의 온도차에 따라 생긴 결로처럼 눈가에 물방울이 슬쩍 맺혔다. 그간 안 먹었던 음식은 아니지만 이 용기에 담긴 어묵탕은 뭔가 다르다.




"맛있어요 진짜. 맛있다."




난데없이 복받치는 감정을 드러내기 창피해서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수 초를 같은 자세로 가만히 있다가 눈 앞의 잔을 결연히 쥐어들었다. 자연스럽게 고개와 손목을 꺾어 술을 천천히 흘려넘겼다. 쨍한 기운이 가슴팍을 타고 퍼져내려갔다. 그냥 술만 맛봤을 때와 전혀 다른 맛이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어울렸다.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이거 완전 대박, 엄청 잘 어울려요."




바텐더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조금은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남 앞에서 자칫 저만의 감상에 젖어 무아몽중으로 흘러 갈 뻔했다. 이마 앞에서 데엥 종을 울린 것처럼 명쾌한 맛에 정신이 바짝 돌아왔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는 동안 조심스럽게 내 안색을 살폈던 바텐더도 안심했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조합이 괜찮지요? 저는 려가 대체로 생고구마 캐릭터를 잘 드러내는 소주라고 생각해요. 뒷맛에 생고구마 특유의 풋풋한 향이랑 후추 같은 향신료 느낌이 나거든요. 그게 딱 국물 요리하고 잘 맞아떨어지는 요소라고 봐요."




그 말처럼 아린 듯 풋풋한 맛이 어묵탕 국물과 정말 잘 어울렸다. 하나만 먹을 때와 둘을 함께 먹을 때의 맛이 정말 달랐다. 음식과 술의 시너지란 대단한 것이구나, 이번에 명확히 깨달았다.




"기회가 생기면 다음번에 다른 고구마소주도 한 번 드셔 보세요."




용기 바닥에 가라앉은 곤약을 열심히 건져 올리려는 나를 보면서 바텐더가 말을 이어나갔다. 안 그래도 다른 제품이 궁금했다. 고구마소주의 매력에 이미 푹 빠져 버린 듯하다.




"다른 고구마소주들은 이거랑 많이 달라요?"




"아무래도 캐릭터가 다 다르기는 해요. 려는 생고구마 비슷하지만 찐고구마, 군고구마 같은 풍미를 내는 제품도 있어요. 오크 숙성 제품도 있고요. 여기에 빠져서 고구마소주 마시려고 일본 가고시마 같은 곳으로 여행 가시는 분도 몇 봤어요."




술을 맛보러 떠나는 여행이라.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꽤나 낭만적으로 들렸다. 생각해 보면 신선한 회 먹으러 바닷가로 훌쩍 떠나는 것과 별반 다를 것도 없지 않나.




"거기까지 가기 전에 국내 생산자가 만드는 고구마소주도 있으니까 관심 있으시면 구해다 드셔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술아원 '필'이나 '양조학당 서', 금복주에서 만드는 '백로'같은제품들이 있거든요. 백로 외에는 지역특산주라 인터넷 구매도 가능해요."




"잠깐 잠깐. 메모 좀 할게요."




바텐더가 천천히 다시 읊어 주는 제품명을 빠짐 없이 핸드폰 메모장에 적었다. 시간 날 때 하나씩 사서 맛 봐야겠다. 안주는 뭐, 어묵탕이면 적절하겠지. 새로운, 그렇지만 아주 새롭지 않은 취미가 하나 생긴 것 같아 벌써부터 재미있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고구마와 어묵탕을 어른이 된 박현서가 전혀 다른 모양으로 소비하게 됐으니까.




"그런데 지금 중요한 얘기를 하나 안 들은 것 같은데요."




"네? 어떤 얘기요?"




"집 정리랑 청소는 그래서 다 끝내고 오신 거 맞지요?"




느닷없이 허를 찔렸다. 보기보다 집요한 사람이다. 그냥 넘어가 주지 않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밴 목소리로 받아쳤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추억 정리도 정리잖아요, 덧붙이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내 손해다. 이번 주말에는 꼭 끝내겠다고 속으로만 굳게, 아주 굳게 다짐하면서 빤빤한 얼굴로 잔에 남은 고구마소주 한 모금을 비웠다.





~오늘의 처방전~

약제명 / 려 25 (고구마 100%)
유형 / 증류소주
알코올 / 25%
생산자 / 국순당여주명주
취급처 / 백화점, 전통주 보틀샵, 인터넷
복용 안내사항 / 경기도 여주산 고구마로 만든 정통 증류식 고구마소주예요. 풋풋한 생고구마 풍미와 가벼운 후추 향을 느낄 수 있어요. 따끈한 국물 요리와 아주 잘 어울려요.


이전 03화 추억에 아련해질 때, <려 고구마소주> (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