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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Apr 03. 2024

추억에 아련해질 때, <려 고구마소주> (1)

3화 (1)




"뭐냐 하면요. 그런 기분 있잖아요. 괜히 센치할 때. 비 올 때 멍하니 창 밖을 보게 된다든지 이제 어느덧 겨울이네. 한 해가 저무는구나, 싶을 때요."




말을 던져 놓고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이것과는 조금 다르다. 머리에 든 추상적인 심상을 남에게 전달하려니 여간 어렵지 않다. 양 눈 사이에 주름을 잡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오른손 검지로 아랫입술을 갉작거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면, 아니면 이런 거. 왜 핸드폰 저장용량 부족 알림 가끔 뜨잖아요. 그래서 사진 정리하려고 사진첩 막 뒤적뒤적 하다가, 예전에 찍은 사진을 하나씩 찬찬히 들여다 보게 되는 거죠. 생각지도 못하게 추억에 푹 젖어버린 그런 기분."




"음, 조금 아련해지는?"




"아련…. 맞아요. 그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오늘 제 기분이 딱 그래요. 집 청소하다가 옛날 앨범이 나와서 한참 들춰 봤거든요. 완전히 과거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어요. 반가우면서도 이상하게 조금 가슴이 아려오는 듯한. 이게 아련한 기분 맞겠죠?"




"그런 것 같은데요.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해 보시겠어요? 재밌네요."




"그러니까 제가..."





그러니까 내가 바텐더에게 아련한 추억에 빠져들게 된 경위를 늘어놓게 된 건, 모처럼 벌인 대대적인 집 정리가 발단이었다. 요사이 밤 늦게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벌러덩 나자빠지기 바빴다. 무얼 할 기력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데나 옷을 벗어던지고 흐물거리는 몸을 겨우 소파 위에 뉘는 것이 고작이었다.


먹는 건 잘 챙겨 먹고 살자 주의였지만 요즘은 집에서 저녁 한 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다. 스트레스 탓인지 사무실에서 낮밤으로 끊임없이 뽀삭뽀삭 간식을 까 먹어 대는 통에 밥 때가 되어도 입맛이 그닥 돌지 않았다.


모든 의욕을 상실한 표정으로 누워서는 머리를 텅 비우고 핸드폰 액정을 도닥댈 때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되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자유는 하루 중 오직 이 시간에만 주어지니까. 그 밖에는 하나같이 시끄럽고 귀찮은 일만 가득할 뿐이다.


가만 누웠다가 잠이 올락말락하면 몸을 겨우 이끌고 화장실에 가 세안을 한다. 물론 씻지 않고 그대로 잠들어 버릴 때가 부지기수다. 처음 몇 번은 그렇게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 자괴감이 조금 들었다. 이제는 그러든 아니든 별 생각이 없어졌다. 가만히 푹 퍼질 수 있는 상황만 주어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게 행복이지' 싶다가도, 꼭 한 번씩 심리적인 위화감이 찾아든다. 과연 내가 누리는 요 짤막한 안락이 행복이라 이름 붙일 만한 감정인지 분간이 잘 안 간다. 어쩌면 불행하기를 몇 시간 동안 잠시 유예한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음울한 생각에 빠지고야 마는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가, 담임선생님 눈 밖에 날 만한 짓을 해 혼이 났다. 화가 난 선생님은 나더러 복도로 나가 무릎 꿇고 손 들고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선생님은 나를 용서해 주지 않았다. 다음 시간에도, 그 다음 시간에도 벌을 서게 했다. 다만 쉬는 시간만큼은 다리를 움직이고 손을 내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속 가능한 체벌'을 위한 뒤틀린 관용에 가까웠다.


여하간 그 쉬는 시간의 달콤함은 대단한 수준이었다. 차가운 복도 바닥에 긴 시간 맞닿아 불그죽죽해진 무릎을 쓰담으며 일어나 저리고 쑤시고 아픈 팔다리를 한 차례 풀어주는 것만으로 순간적인 쾌감과 행복감을 느꼈다.


내가 요새 퇴근 후 행복이라 명명한 감정 상태는 아마 이런 수준에 불과하지 않을까. 벌 받는 듯한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고통을 피할 수 있는 데 대한 소극적 환희. 그렇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그 작고 소중한 시간을 사수하기 위해 오랫동안 집안일을 미뤄 왔다. 당연히 집 상태는 엉망진창 수준을 넘어섰다. 싱크대에는 아무렇게나 쳐박힌 식기가 수북했다. 방바닥에는 갖가지 잡동사니가 정신없이 흩어져 있었다. 난장판 만들기가 주특기인 여섯 살짜리 조카 은율이라도 이 현장을 보면 천진한 미소를 거두고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이모, 왜 이러고 살아?"


말 그대로 개판 오 분 전인 상태. 아니 오 분 후인가. 옷가지부터 온갖 삶의 흔적이 질서 없이 흩뿌려진 그런 상태로 발 디딜 틈 없이 몇 달을 살았다.




"와, 미친. 너네 집에만 지진 났었냐?"




절친한 친구 유진조차 집 상태에 대해 독설을 아끼지 않았다. 줄 게 있다며 제 발로 굳이 찾아와 놓고서는 저 키우는 개 집만도 못한 꼴이라는 말을 남기고 곧바로 돌아갔다. 집 정리 하기 전까지는 다시 안 온다면서. 꼴 보기 싫으면 도와 주기라도 하지, 매정하기는 한유진을 따라 올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친구에게까지 외면 받는 비참한 삶을 계속 이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벌레가 꼬이지 않을까 슬슬 겁이 나기도 했다. 마침 설 연휴가 코앞이다. 큰 마음 먹고 집안 청소와 정리를 할 계획을 세웠다.




결전의 날. 일어나 간단히 세안을 하고 편의점에서 미리 사 둔 샌드위치로 가벼운 아침 식사를 했다. 도대체 왜 튀어나와 있는지 모를 사물로 가득한 바닥에 시선이 내려앉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견적 안 나오는 작업량에 시작도 전에 기운이 빠질 것 같았다.



'안 되지, 안 돼.'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크게 한 번 도리질을 했다. 지금 안 치우면 나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지도 모른다. 잡동사니 호더 내지는 쓰레기에 파묻혀 사는 20대 여자로. 단단한 결의가 필요하다. 기합을 넣는 의미로 머리를 바짝 올려 묶었다.


차근차근 하나씩 해치우기로 전략을 세웠다. 우선 사방에 널부러진 옷가지가 타겟이다. 집에 돌아오면 옷부터 아무 데나 홱 벗어 던진 탓에 옷으로 봉분이 만들어졌다. 출근할 때는 동묘시장에서 옷 건지듯 무더기 사이를 이리저리 뒤져 원하는 옷을 찾아내어 입곤 했다. 나름대로 편리한 방식이기는 했다. 사회화된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면 말이다.


허리춤에 손을 얹은 자세로 찬찬히 '각'을 보고 작업에 착수했다. 언제 입고 벗은 지 모를 옷들이 쌓여 이룬 옷무덤을 하나씩 파묘하기 시작했다. 코트와 패딩이 쌓인 곳을 들춰 보니까 계절 지난 옷까지 수두룩하다. 현재를 돌보지 못해 생긴 지난 삶의 부스러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하나하나 집어 들어 계절별, 종류별로 분류했다. 옷걸이에 걸어 둘 옷과 개서 리빙박스에 넣을 것, 빨아야 할 것을 나눴다. 에너지 소모가 굉장했다. 옷 정리에만 족히 한 시간은 넘게 걸렸다. 그래도 부피가 큰 편인 옷가지를 전부 들어내고 보니까 대충 다음 할 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갈 곳 잃은 물건을 차근차근 제 자리에 돌려 놓을 차례다.




막바로 눈에 들어온 것은 소파 앞 접이식 테이블이다. 테이블을 중심으로 잡지와 우편물 그리고 책이 잔뜩 널부러졌다. 읽지도 않을 책을 그간 참 많이도 사다 흩뿌려 놨다. 모두 어릴 때에나 들었던 문학소녀 칭호를 아직까지 놓지 못한 탓이다.


아마도 대학교를 졸업한 뒤부터가 아닐까 싶은데, 어느 순간부터 긴 글을 잘 못 읽게 되었다. 확실히 일을 시작하고나서는 활자를 집중해서 읽는 일이 정말 피곤하게 느껴졌다. 빈 시간을 채우려거든 머리 아프게 책을 읽느니 쇼츠나 들여다보는 쪽이 마냥 편하고 좋았다.


다만 책에 대한 향수와 언젠가 꼭 다시 열독을 시작하겠다는 막연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읽지도 않을 책을 사 뒀다가 괜히 책장에서 꺼내 대충 뒤적거리고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독서를 대신하는 기이한 행위를 시작했다. 사서 읽는 게 아니라 사 모으는 데 더 가까워진 것이다.


테이블 주변에 깔린 책들은 이러한 '의식'의 흔적이었다. 잘 정리해 책장으로 돌려 놓기로 했다. 한 권 한 권 집어들어 품에 안고 책장에 꽂아 넣으려는데, 아까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옷이 어째선지 여기에도 널려 있었다. 별 희한한 데 다 벗어던져 놨네, 꿍얼거리며 양손 가득 든 책을 바닥에 우선 두려고 몸을 수그렸다.




책을 턱 내려놓고 몸을 일으키려던 참이었다. 아래쪽 책장 구석에 꽂힌 알록달록한 무언가가 시선에 걸렸다. 폭이 두툼하고 세로 길이가 짧은 책이다. 아니, 자세히 보니 책이 아니다. 분명 어릴 때 찍은 사진을 모아 둔 앨범 몇 권 가운데 하나다. 엄마가 본가에 두라는 걸 내 사진이라며 굳이 한 권 챙겨와서는 한 번도 들여다 본 일이 없던, 바로 그 앨범이다.




무릎을 접어 쪼그려 앉은 모양으로 자세를 고쳤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앨범을 꺼내어 왼손에 받쳐 들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한 장 한 장 넘겨 보기 시작했다. 그리운 색감으로 박제된 천진한 시절을 들여다보니 나도 모르게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몇몇 사진은 찍을 당시 기억이 선명해 한참을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병아리 같은 노란 체육복 차림으로 쪼그려 앉아 제 얼굴만한 고구마를 들고 있는 사진이다. 가슴팍에 '새솔유치원 희망반 박현서'라고 커다랗게 쓰인 이름표가 돋보였다.


나를 기준으로 친구 두 명이 양 옆에 같은 포즈로 쪼그려 앉아 있다. 그런데 나와 친구들 사이 ‘온도차’가 상당하다. 모두가 깃털이 달린 띠를 이마에 두르고 얼굴에 색을 칠했는데 내 얼굴만 깨끗하다. 게다가 혼자만 잔뜩 심통이 난 표정이다.


아무래도 인디언 분장이 싫었던 것 같다. 분명 사춘기 이전까지는 얼굴에 무언가 인위적인 칠이나 치장을 하는 데 굉장한 거부감이 있었다. 당시에 선생님한테 이거 안 한다고 울고 불고 떼를 썼던 기억이 난다.


각종 메이크업 제품과 화장품을 잔뜩 찍어 바르고 다니는 지금 생각해 보면 픽 웃음이 나는 일이다. 그래도 왕고구마를 캔 것만은 분명 좋았던 기억이다. 지금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러고 보면 어릴 때는 고구마를 특별히 많이 좋아했다.


중학생 때까지 제일 좋아했던 간식이 고구마 맛탕이었고, 추운 계절에 사거리 횡단보도 근처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아저씨가 보이면 엄마나 아빠를 졸라 꼭 한 봉지를 안고 들어 왔다.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달콤한 고구마가 너무 좋았다.




"잠깐만요. 말 끊어서 죄송한데 집 정리는 하다 만 건가요? 저는 지금 그게 가장 신경 쓰이는데요."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바텐더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으로 끼어들어 물었다. 고구마에 얼마나 빠져 살았는지를 설명하려던 참에 김이 팍 샜다. 하기야, 가게 내부의 깔끔한 모양새나 빠릿하고 군더더기 없는 행동거지를 보면 정리정돈에 꽤나 집착하는 성격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게 아닐 만하다.




"아뇨 아뇨. 하긴 했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들어 보세요 일단."




앨범을 들여다 보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발만 담그려 했는데 추억의 물살에 아예 휩쓸려 버렸다. 계속 쪼그려 앉은 자세로 있자니 다리가 슬슬 저려 왔다.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철퍽 주저앉아 버렸다. 양반다리를 하고 앨범을 마저 뒤적였다.


휙휙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던 중에 사진 하나가 또 눈에 걸렸다. 무심코 몇 장인가 더 넘겨 버려서 거꾸로 거슬러 가야 했다. 차근차근 다시 훑어 찾아낸 그 사진에는 기차 창가 좌석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는 조그만 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창 너머를 묵묵히 응시하는 어린 소녀의 옆모습이 눈을 타고 들어와 마음에 콕 박혔다.


기억 속으로 순간 빨려들어갔다. 명절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전라남도 시골로 내려가던 날이었다. 해질녘 차창에 스치는 올록볼록한 산과 널따란 논밭을 바라보며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물큰한 감정에 휩싸였던 기억이 살아났다.


감상에 젖는다는 게 뭔지도 몰랐던 나이에도 나는 그 분위기를 즐겼다. 두근대는, 간질거리는, 이상하게 조금 무섭고 떨리기도 하는 묘한 감정에 매혹되었다. 책을 열심히 읽기 시작한 이유 역시 책에는 무언가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기차를 타면 늘 아빠가 사 주었던 어묵탕도 생각이 났다. 하얀 곤약과 실타래 같은 곤약면, 다시마, 뽀득뽀득한 어묵이 들었었다.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제품의 비닐 캡을 힘겹게 벗기고 나서 맛보는 따끈하고 감칠맛 가득한 국물 맛이 떠올랐다. 이 때도 분명 먹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때만 해도 기차 승무원이 객차 내에서 카트를 밀고 다니면서 먹거리를 팔았다. 지금은 자판기로 대체하거나 매점 칸이 별도로 생긴 것으로 안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만큼 여러가지가 변했다. 감수성 촉촉한 문학소녀에서 사막처럼 메마른 일상을 보내는 평범한 회사원이 된 나 역시 그 중 하나다.




"사진 속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느껴지는 괴리감, 격세지감. 그런 감정이 밀려왔겠네요."




마저 이야기를 듣던 바텐더가 팔짱을 낀 자세로 말했다.




"비슷해요.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나 싶기도 하고. 이 때의 나는 어디로 갔나 싶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듣다 보니까 오늘의 처방은... 이게 적격일 것 같네요."




말을 꺼내면서 바텐더가 등을 돌려 자기 키 높이 위의 선반에서 제품 하나를 꺼내어 들었다.




"여주산 고구마로만 만든 정통 국산 고구마소주, '려' 입니다."




정방형으로 각진 몸통에 먹색 라벨이 붙은 병이었다. 멀찍이서 볼 때는 식별이 안 되었지만 바텐더가 잔과 함께 테이블에 내려놓을 때 보니 말 그림이 박혀 있다. 어쩐지 멋스럽다. 궁서체로 큼지막하게 쓴 제품명에서 비장한 기운이 전해진다. 이건 또 뭘까, 호기심이 일었다.




<3화 (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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