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부드드드, 부드드드.
건조한 진동음이 옆구리를 타고 올라온다. 수면의 바다 아래 내려앉은 의식이 현실로 둥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바짝 죘다. 길게 울리는 걸 보니 필시 전화다. 끄응 소리를 내뱉으며 눈을 여즉 꼭 감은 채 허리께를 느릿느릿 더듬었다. 전화 올 데가 없는데. 광고 전화면 진짜 다 죽여 버려야지, 하는 생각으로 전화기를 힘없이 손에 쥐어 들었다.
"…여보세요."
누군가 목을 가볍게 조르는 듯 잠긴 소리가 새어나왔다. 감기가 아직 다 안 나은 모양이다.
"딸, 뭐야. 이제 일어났어?"
엄마다. 어쩐지 맥이 탁 풀렸다.
"아, 엄마. 나 하루 휴가 냈어. 연차도 많이 남아서."
"목소리는 또 왜 그래? 어디 아프니?"
"아냐 뭘 아파 아프긴. 그냥 이제 일어나서 좀 잠긴 거야. 왜요?"
눈도 못 떴는데 이어지는 집요한 추궁에 대충 둘러대고 봤다. 엄마의 잔소리 폭격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일은 사양이다.
"아니 저번에 엄마가 그 새마을금고 돈 넣으라고 한 거 있잖아 왜. 이자 오 프로 짜리. 그거 했냐고 물어보려 했지."
"아니, 아직. 다음주에 하려고."
"그거 꼭 잊지 말고 해, 응? 별일은 없고?"
감기 걸려 일주일 고생한 게 별일이라면 별일이겠지. 그렇지만 역시 실토할 수 없다. 평소 엄마 마음에 안 들었던 내 행동을 모조리 싸잡은 잔소리가 튀어나올 게 뻔하다.
너 날씨 이렇게 추운데 요즘도 내복 안 입지? 그거 하나 입는 거랑 안 입는 거랑 다르다니까. 엄마가 사준거 그거 뭐야 그, 홍삼진액은 먹었어? 저번에 느이집 냉장고 열어보니까 아주 그대로 있더만. 영양분을 좀 챙기라니까 현서야. 밥도 응, 만날천날 배달 음식 같은 것만 줄창 시켜먹지 말고. 그러니까 면역력이 약해져서 감기 같은 거 걸리는 거야, 어쩌고 저쩌고.
곧대로 이야기하는 순간 듣게 될 말들이 벌써부터 귓전에 울린다. 엄마가 잠자코 넘어가 주기만을 바라며 얼버무린다.
"별 일이 어딨어 그냥 똑같지."
"근데 목소리가 진짜 영 안 좋은데?"
엄마는 집요하다. 대화가 늘어지면 들통날 수 있다. 아휴 겨울이라 건조해서 그래 별 걱정을 다하셔, 하고 넘겨버리고는 길어지기 전에 응 응 할게 알겠어, 알겠어 하며 서둘러 통화를 끝냈다. 머리 굴리느라 잠이 다 깨 버렸다. 모닝콜 효과 확실하다.
전화를 끊고 접착제라도 바른 듯 꼭 들러붙은 양 눈을 가느다랗게 겨우 뜨고는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봤다. 벌써 오전 열시 반이다. 늘어지게 잤다. 암막커튼 사이로 새어든 빛 한 줄기가 발치에 어른거린다. 눈을 껌뻑거리며 멍한 머리에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밖으로 덜렁 빼 둔 한 쪽 팔이 문득 서늘하게 느껴진다. 도로 이불 속에 폭 집어 넣는다. 보들한 극세사 촉감을 느끼려 공연히 안감에 살을 부비며 아래로 두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켠다. 잠은 깼지만 일어나는 건 보류다. 겨울에는 이불 속이 제일 좋다.
일주일 전, 주말을 앞두고 갑작스레 감기에 걸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겨울에 감기에 걸린 일이 거의 없었다. 애초에 사람을 잘 안 만나는 시기다. 추위를 많이 타 겨울에는 약속을 잘 만들지 않는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로 집 밖에 나설 일이 부쩍 줄기도 했다.
그렇다면 내가 어디서 감기를 옮아 왔을까 하니, 역시 회사밖에 없다. 오간 곳이라고는 집과 회사 뿐이다. 뭐든 안 좋은 건 회사 탓을 하고 보면 납득이 된다. 어쩐지 바로 뒷 자리 과장이 종일 기침을 해 대더라니.
침도 못 삼킬만큼 목이 부었지만 꼬박 출근은 해야 했다. 하필 중요한 보고를 앞두고 있었다. 쉬기에는 눈치가 보였다. 콜록 콜록 수준이 아닌 컹, 커어엉 하는 말라빠진 기침 소리를 내며 월화수목 나흘을 일했다.
그사이 감기 증상은 점차 완화됐지만, 보고를 다 끝내고 보니까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별 계획도 없이 금요일인 오늘 연차를 내 버렸다. 그 보상으로 이렇게 침대에서 달콤한 늑장을 부리고 있다.
하아암,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옆으로 돌아누워 습관처럼 핸드폰을 쥐어든다. 포털 사이트에서 뉴스 타이틀을 대충 훑고 인스타를 켜 멍하니 쇼츠를 하나하나 넘겨 본다. 맹한 눈으로 한참 동안이나 액정을 들여다보다가 실증이 나 핸드폰을 침대 위로 홱 팽개친다.
돌아누운 몸을 한번 더 빙글 돌려 아예 엎드린 자세를 취한다. 손을 베개 밑에 쑤욱 밀어넣는다. 가느다란 섬유에 온 몸이 폭 싸인 느낌이 좋다. 몸을 가만 두지 못하고 연신 부비적댄다. 소소한 행복을 극대화하는 순간이다. 보들보들, 기분 좋다.
존재하는 모든 부드러운 것은 이를 받아들이는 상대에게 긍정적인 기운을 전달한다. 부드러운 고양이 털, 부드러운 살결, 부드러운 사람, 부드러운 푸딩, 부드러운 말투, 부드러운 표정. 상상만으로도 포근한 심상을 안긴다.
어째서 인간은 부드러운 걸 이렇게 좋아하도록 설계됐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부드럽지 못한 것들을 너무 많이 마주하고 살아서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맞지. 부드럽기는커녕 드러운 길바닥, 드러운 사람, 드러운 표정, 드러운 음식, 드러운 공기, 드러운 기분 같은 데 대체로 묻혀 살지. 부드러움은 여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종의 심리적 도피처, 이상향의 은유 같은 게 틀림없어.
공상 마인드맵의 가지를 침대 위에서 실없이 늘어뜨린다. 허무맹랑한 생각으로 두뇌를 톡톡 두드려 깨우는 듯한 감각이 좋다.
드러누운 채 침대 위에서만 한 시간 가까이 흘려보내고 나서야 겨우 상체를 일으킬 생각이 든다. 이불 밖의 찬 기운에 살짝 몸이 움츠러든다. 찌뿌둥하다. 더는 목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지만 기력은 아직 조금 없다.
유자차나 모과차처럼 속 따듯한 차를 한 잔 마시면 기운이 좀 날까 싶다. 원체 몸이 냉한 편이라 겨울이면 과일청으로 만든 차를 즐겨 마신다. 냉장고에 유자청 정도는 늘 한 병쯤 구비해 두고 있다. 이불 속에서 빠져나와 주방으로 건너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동시에 잊고 있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 지난 주말에 마지막 한 스푼을 뜨고 병을 비웠었다. 새로 사 놔야지 했는데 까맣게 잊었다. 혹시나 하고 문 쪽 선반을 바쁘게 훑었지만 역시 남은 유자청은 없다.
어쩌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오늘 하루는 온종일 집에서 쉬고 싶었다. 그렇지만 추운 계절에 마시는 달콤하고 따뜻한 차를 포기할 수는 없다.
결국 '어차피 주말에도 소비해야 하니까'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이런 날에는 따듯하고 달콤한 차가 있어야 온전한 나만의 휴식이 완성된다. 간단히 식사를 하고 씻은 뒤에 운동 삼아 한 번 밖에 나갔다 오기로 한다. 서화시장에 수제 청을 파는 가게가 있다.
근육이 쪼그라든 듯 힘 빠진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 평일 오후 두 시의 시장 분위기는 대체로 한산하다. 마음이 괜히 달뜬다. 남들 다 일하는 시간대에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묘한 쾌감이 인다.
시장을 죽 가로질러 목적지인 가게에 금세 도착했다. 유자청 뿐만 아니라 레몬청, 청귤청, 자몽청 등 다양한 제품이 나와 있다. 진열 상품을 무심히 살펴보던 중 ‘감기에 좋은 생강청’이라 쓰인 문구에 시선이 갔다.
병을 만지작거리자 생강 특유의 매콤하고 싸한 기운이 코로 새어들어오는 듯했다. 추운 계절에 엄마가 끓여준 생강차를 마시고 몸이 스르르 녹았던 기억이 났다. 유자청과 함께 생강청도 한 병 집어들었다. 계산을 하고 나와 묵직하게 축 내려앉은 타포린 쇼핑백을 팔목에 걸쳤다. 겉옷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도로 왔던 길을 되걸었다.
자주 오가고는 하지만 시장은 언제나 새롭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좌우로 늘어선 가게를 하나하나 살피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간 걷던 중에 청포묵이며 직접 쑨 도토리묵 따위를 가판대에 늘어 놓고 파는 가게가 보였다. '막걸리 안주로 최고!'라 쓰인 종이가 가게의 회색 여닫이 문 창 위에 붙었다. 불투명한 허연색 막걸리 병도 몇 병 늘어둔 걸 보니 함께 파는 모양이다.
막걸리 하니까 전의 바 생각이 났다. 참 독특한 경험이었다. 시장 한 켠에 자리잡은 바라는 것도 특이하거니와 그 안에서 겪은 모든 게 새롭고 묘했다. 그 날 마셨던 막걸리가 워낙 인상깊어서 한 번 구해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아무래도 파는 곳이 굉장히 한정적인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그 바에 방문해서 이걸 어디서 구할 수 있나 물어볼까 했었는데, 벌써 그로부터 한 달은 지났다.
바 레메디. '처방'을 컨셉으로 하는 바. 분명 이 근처다. 문득 엉뚱한 궁금증이 솟아올랐다. 혹시 '감기에 좋은 술'이란 것도 있을까. TV나 영화, 혹은 어느 책에서 그러고 보니 몇 번 본 것도 같다. 미국인지 유럽인지 서양의 어느 지역 사람들이 한겨울에 와인 같은 걸 데워 마시거나 허여멀건하고 뜨뜻한 음료에 술을 넣어 마시는 장면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진짜 병을 고치는 약방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처방을 컨셉으로 하는 곳이라면 왠지 감기에 들을 법한 무언가를 내어 주지 않을까. 마침 금요일이기도 하고 주인장에게 물을 것도 있다. 남보다 조금 이른 '불금'을 즐기는 셈 치자는 생각을 했다. 아픈 것도 참고 한 주 동안 죽어라 달렸다. 이 정도 일탈은 허용 범위 아닌가.
그런데 '바'라는 곳이 대낮부터 영업을 하던가, 생각하다 오후 세 시부터 문을 연다던 바텐더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은 세 시 오 분. 딱 영업을 시작할 시간이다.
잰걸음으로 금세 업장 앞에 다다랐다. 한낮의 <BAR REMEDY> 간판 역시 밤에 보이는 모습처럼 범상하지 않은 아우라를 내뿜는다.
문 앞으로 발길을 막 옮기려다 잠시 주저했다. 지난 번에는 술이라도 한 잔 하고 밤에 들렀다. 지금은 맨정신에다 대낮이다. 바에 ‘오픈런’이라도 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문을 코앞에 두고 내적 갈등을 하기 시작했다.
끼이익-.
어쩌지, 어쩔까 고민을 하던 중에 갑자기 가게 문이 스륵 열렸다. 바텐더가 손에 청소도구를 들고 서 있었다.
"오, 어서오세요. 오늘은 엄청 일찍 오셨네요."
문 앞에 멍하니 선 나를 보고 그가 미소를 지으며 알은체를 했다. 왜인지 민망했다. 타이밍 한 번 제대로네. 속으로 읊조렸다.
"아,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하하.. 혹시 지금 영업 하나요?"
"네 그럼요. 들어오세요."
바텐더는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맞부딪쳐 살짝 털면서 고갯짓을 했다. 네에, 쭈뼛거리면서 엉거주춤 안에 들어섰다. 두 번째인데도 여전히 행동거지가 어색하다. 어둑한 바를 둘러보니 손님이라고는 나 하나뿐이었다. 평일 이른 시간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지난번에 앉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 한 번 앉아 봤다고 가장 편안하게 느껴졌다.
"저 근데 바로 기억하시네요? 기대 안 했는데."
여전히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실내 공간을 새삼스럽게 훑으면서 바텐더에게 말을 건넸다. 실제로 한 달 만이었다. 막연하게나마 한 번 또 가보면 좋겠다 생각은 했지만 도무지 기회를 잡기 어려웠다.
"아이고, 당연하죠. 그날 워낙 이런저런 얘기 많이 했잖아요. 질문도 많이 하셨고요."
어쩐지 진상 손님처럼 굴었던 것 같아 살짝 뜨끔했다. 너무 들떴었나. 혹시 그 때 지나치게 번거롭게 군 건 아니었는지 물으려는데, 바텐더가 또 테이블 위로 종이와 펜을 슥 내밀었다.
"오늘도 한 번 적어 보시겠어요? 어떤 증상인지."
능청스러운 물음에 앗, 네 하고 대답하고는 곧장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래 맞다. 이게 우선이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이 컨셉을 진심으로 즐기는 것 같다. 종이의 귀퉁이를 왼손으로 고정시킨 다음 펜을 쥐었다. 잠시 생각을 하고선 곧바로 내용을 적어 나갔다.
<지금 기분이나 상태가 어떤가요?>
-감기 걸려서 며칠 고생했음. 지금은 거의 나았지만 아직 기력이 없는 편.
<처방을 통해 어떤 효과를 보고 싶은가요?>
-몸에 온기가 조금 돌았으면.
빠르게 다 써서 내민 종이를 바텐더가 받아 들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종이를 들여다보더니 검은자위를 왼쪽 위로 한 번 치켜들고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음,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텐더는 신속히 움직였다. 허리를 숙여 아래쪽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늘어놓으며 붓고 따르고 덜어냈다. 빠르지만 급해 보이지 않는, 군더더기 없는 몸놀림이 새삼 신기했다. 이런 추상적인 주문을 매번 즉각 소화해 내려면 대체 어떤 소양이 필요한 걸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멋대로 늘어놓고 있을 때, 바텐더가 다가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을 살짝 내려놓았다.
"자 오늘의 첫 번째 처방, 핫 위스키 토디(Hot Whisky Toddy) 입니다."
설마 했는데 정말 따뜻한 무언가가 나왔다. 겉보기에는 그냥 찬찬히 마시기 좋은 차와 비슷해 보였다.
"와, 김이 나네. 이것도 술 맞아요?"
"네. 그냥 따뜻한 차나 음료처럼 보이지만 위스키를 넣은 칵테일이에요. 방금 드린 잔에는 버번이라고 하는 미국 위스키가 들어갔고요."
고풍스러운 잔에 담긴 내용물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황금빛 내용물 속에 든 노란 조각은 분명 레몬이다. 기다란 원통형 막대기 같은 것도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상상했던 바의 이미지에 걸맞는 술에 가깝다.
"이 막대 같은 건 시나몬 스틱인가요?"
"네 맞아요. 핫 토디에 화하고 풍성한 향을 보태는 역할을 해요."
그의 말대로 익숙한 시나몬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코를 잔에 가까이 가져가니까 부드럽고 달달한, 몸에 훈기를 불어넣는 듯한 복합적인 향도 느껴졌다.
잔 손잡이를 잡고 차를 마시듯 호록, 천천히 한 모금을 입에 받아들였다. 따뜻한 온기가 입술부터 혀 끝, 입안 전체를 데웠다. 레몬 차처럼 달콤하면서 산뜻한 기운이 따라왔다.
"이거, 진짜 그냥 차 같은데요? 너무 맛있어요."
속이 슬금슬금 따뜻해지는 기운이 좋았다. 술을 마시면서 이런 기분을 느낄 줄이야. 겨울에 마시기 딱 좋은 스타일이다.
"어떠세요, 몸이 좀 훈훈해지나요?"
"네. 완전."
"40도 위스키에다 꿀이랑 몇 가지 향신료를 넣고 따뜻하게 만든 거라, 몸에 열이 오르는 기운을 금방 느끼실 거예요."
내가 한 모금을 더 들이마시는 동안 바텐더가 말을 이어나갔다.
"서양에서는 이렇게 겨울철에 따끈히 마시는 술이 비교적 보편화돼 있어요. 이렇게 증류주 넣은 칵테일 말고도 뱅쇼나 글뤼바인같이 와인에 약재와 과일 같은 걸 넣고 끓여 만드는 술도 있고요."
"그러면 우리나라에는 이런 술이 없나요?"
"물론 있지요. 도수는 낮지만 모주라는 술을 따뜻하게 해서 마시기도 하고요. 또 이런 게 있는데, 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안 그래도 금방 내 드리려 했거든요."
바텐더가 손을 뻗어 뒷편의 진열장에서 독특한 모양을 가진 술병 하나를 집어들었다. 주둥이가 길쭉한 것이 뭔가 도자기 같기도 했다. 분명 서양 술은 아니었다.
"조선 3대 명주라는 별명을 가진 40도 증류주, '감홍로'입니다. 여기에 이제 따뜻한 물을 부어서 드릴 거예요."
감홍로.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은 이름이다. 하얀 도기 잔을 꺼내어 술을 따라 낸 바텐더는 예고한 대로 뜨겁게 덥힌 물을 부어 가볍게 섞은 뒤 잔을 내 앞에 내려 놓았다.
"이 따뜻한 물을 섞은 감홍로가 오늘의 두 번째 처방이에요. 앞서 드린 핫 토디랑 같이 양약과 한약을 번갈아 맛본다는 느낌으로 즐겨 주세요."
"이건 전통주인가요?"
"네 맞아요. 전통 방식으로 만든 술이에요. 쌀에다 용안육, 계피, 정향, 생강 등 여러 약재를 넣고 발효시킨 술을 증류해서 만들어요. 강렬한 계피 향이 특징이고요."
향을 맡아 보니 과연 온온한 계피 향이 도드라졌다. 핫 토디의 은은한 시나몬 향과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럼 한 번 마셔 볼게요, 하고선 잔을 들고 그대로 맛을 봤다.
"오, 이건 진짜 마시자마자 후끈한데요."
수정과를 마실 때와 비슷하게 화사하고 싸한 향이 비강을 훑었다. 정말 계피를 우린 차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핫 토디가 달콤상큼한 맛을 잔잔한 온열감으로 받치는 듯하다면 따뜻한 물에 섞은 감홍로는 속을 일시에 화끈하게 덥혀 주는 기분이었다.
"어떤가요. 매력 있지 않나요?"
"네. 이것도 엄청 매력 있어요. 처음 주신 거랑은 다르게 그냥 술에 물 섞은 건데, 진짜 전통 차 마시는 것 같다 할까."
"맞아요. 사실 이건 감홍로를 직접 빚으시는 이기숙 명인님을 찾아뵈었을 때 명인님이 저한테 직접 추천해 주신 음용법이에요. 그냥 마시기에 좀 강하다 느끼는 사람은 따뜻한 물에 섞어 마시면 참 좋다, 라고요."
"앗, 술 만드는 분을 직접 만나기도 하세요?"
"네. 곳곳에 특색 있는 술을 만드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가끔 근처에 갈 일이 생길 때 기회가 되면 한 번씩 들러보기도 해요. 물론 사전에 양해를 구하고요."
술에 정말 진심인 사람이군, 속으로 생각하면서 핫 토디와 감홍로를 한 모금씩 번갈아 마셔 봤다. 비교해서 마시니까 더욱 재미있게 느껴진다. 정말 딱 양방과 한방 같다.
더 이상 한기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몸이 많이 따뜻해졌다. 몸에 피가 도는 기운과 함께 은근한 취기도 찾아들었다.
"이것도 술이기는 한가봐요. 취기가 오르네요."
"둘 다 40도짜리 술이 바탕이라 시간을 길게 두고 미지근한 물이랑 같이 천천히 마시는 게 좋아요. 확 취할 수 있어요."
바텐더가 안쪽 테이블에 늘어놓은 기물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가볍게 마시려면 따뜻한 물을 지금보다 조금 더 부어 드셔도 좋아요. 은은하게. 더 드릴까요?"
바텐더가 전기 포트를 들어 보이며 나를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이자 잔에 물을 살짝 더 따라 주었다. 한층 맛이 부드러워졌다. 호록 소리를 내며 한 모금씩 천천히, 천천히 받아들였다.
은근한 취기와 함께 피가 도는 기운이 느껴진다. 추위에 굳어 있던 몸이 안으로부터 서서히 풀려 나간다. 장기를 목욕물에 담군 듯하다. 몸과 정신 모두 편안하게 이완된 기분을 얼마만에 경험하는지 모르겠다.
잔을 양 손에 폭 들어오게 쥐었다. 따스한 온기가 좋다. 눈에 힘을 풀고, 잔에서 살살 피어올라 아련하게 흩어지는 수증기를 들여다본다. 평화롭고 고요하다.
"밖에 눈이 오네요."
바텐더의 말에 시선을 창 밖으로 얼른 돌렸다. 정말이다. 방울만한 함박눈이 사락사락 내려앉고 있다.
"우와, 그러네요. 많이 와요."
타이밍 한 번 제대로네. 아까와 같은 말을 전혀 다른 의미로 내뱉는다. 따스한 곳에서 따뜻한 걸 마시며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본다라. 남 부러울 게 없는 순간이다.
도저히 짬이 안 나 포기했던 일본 여행을 떠올렸다. 설경으로 유명한 일본 홋카이도 지역의 오타루라는 동네를 이번 겨울에는 꼭 들러 보고 싶었다. 유진과 함께 가는 것으로 거의 확정지었다가, 업무가 너무 몰리는 바람에 휴가를 쓸 수 없게 되어 전면 취소했다.
그런데 이 순간만큼은 오타루가 아쉽지 않다. 깃털처럼 가볍게 팔랑이는 눈발을 바라보며 속 따뜻한 술을 한 잔 마시는 것으로 기분이 고조된다. 살갗이 아닌 몸 안으로부터 온기가 전해지는 노천욕을 하는 듯하다.
"오늘은 좀 더 천천히 마시다 가도 되죠?"
이 순간을 느리게, 온전히 즐기고 싶다. 기왕 들어앉은 김에 제대로 푹 한 번 몸을 담구면 좋겠다. 귀한 시간이다. 평범한 회사원의 일상 속에서는 감상에 젖을 기회도 시간도 없다.
"그럼요. 물론이지요."
장바구니 속 유자청과 생강청을 완전히 잊게 만든 한 겨울 낮의 낭만. 조금 남았던 감기 기운마저 뚝 떨어진 듯하다. 소복이 쌓인 눈을 사각사각 밟으며 돌아갈 생각에, 마음이 또 한 차례 설레 왔다.
약제명 / 위스키 핫 토디
유형 / 칵테일
재료 / 뜨거운 물, 위스키(버번) 2oz, 레몬 웨지, 꿀1tsp, 넛맥파우더, 시나몬 스틱
복용 안내사항 / 유럽과 북미 지역에서 겨울철에 즐겨 마시는 따뜻한 알코올 음료예요. 부드러운 시나몬 향과 달콤한 맛이 몸을 편안하게 이완시켜요.
약제명 / 감홍로
유형 / 일반증류주
알코올 / 40%
생산자 / 농업회사법인 (주)감홍로
취급처 / 백화점, 전통주 보틀샵, 인터넷
복용 안내사항 / 따뜻하고 화한 기운을 가진 40도 증류주예요. 강렬한 계피 향을 가지고 있어요. 제품과 따뜻한 물을 1:1 혹은 1:2 비율로 섞어서 차 마시듯 음용하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