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단편선
체호프의 글을 읽을 때면, 알 수 없는 애정을 느낍니다. 이전에는 그것이 그의 겸손한 문체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다루는 실험적 글쓰기 때문인 줄 알았으나 최근에 그게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체호프의 글에는 근로에 대한 애정을 넘어선 일종의 신념이 묻어 있으며 일반적 인간에 대한 관심, 예술의 탐닉에 대한 경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가장 좋아하는 단편인 ‘아버지’ 이야기를 해볼까요.
주인공의 아버지는 매번 아들들에게 돈을 꿔 술독을 메우는 주정뱅이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존심을 굽히기 싫어 아버지로서의 의무는 모두 해왔다는 것을 종종 강조하며, 선물이지만 선물이 아닌 척 건네받은 신발 하나에도 아들의 ‘너그러움’이 본인을 ‘억압’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신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황을 주저리 늘어놓으며 비굴하게 변명하고, 그러한 변명은 놀랍게도 잊히지 않은 과거에 대한 비굴한 참회로까지 이어지기 일쑤입니다. 참회가 끝나기 무섭게 친구들과 애인 앞에서는 착한 아들이 배운 놈이라 늙은 아버지를 무시한다며 본인의 서글픈 신세를 한탄하며 금세 태세 전환을 하기도 하죠. 본인의 누추한 집까지 데려다준 아들에게, 순전히 친구들에게 증명하고자 뒷전에서 아들을 험담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그것을 미안해하긴 커녕, 어쩔 수 없음을 비굴하게 또다시 아들에게 증명하고자 합니다.
근로에 대한 애정, 그리고 거짓은 마음을 병들게 한다는 그의 신념이 강하게 묻어나는 단편입니다.
‘아버지’뿐 아니라 ‘베짱이’, ‘다락이 있는 집’, ‘산다는 것은’ 등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누렁이’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렁이'의 독자들은 헷갈립니다. 누렁이는 노동하지 않고 사랑받는 존재로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죠. 아무리 좋은 잠자리와 음식의 기회에도 노동은 개와 어울리지 않다는 듯 묘사되고, 누렁이는 그러한 삶을 괴로운 꿈, 어둠의 심연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누렁이가 사랑하는 주인은 그를 때릴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지닌 존재, 고깃덩이에 실을 묶어 삼킨 고기를 다시 위에서 끄집어내며 크게 소리내 웃는 존재일 뿐입니다. 누렁이는 그러한 그를 쓸쓸하게 사랑합니다. 좋은 잠자리와 음식을 뒤로하고 주인의 품에 안깁니다. 과연, 또다시, 아이러니한, 밝게, 그러나, 우울에 젖은. 누렁이의 삶.
이러한 이원적 리듬은 독자로 하여금 그 어느 것에도 위안 받지 못하게 하지만, 그의 아이러니는 이야기 속에서 그저 목적없이 부유하지 않습니다.
그의 창작 세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려 8천여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흡사 미세혈관 같은 그의 통찰은 분명 의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정확히 추론해 내는 그의 진단 능력은 철학하는 문학가들의 그것과는 또 다르게 느껴집니다.
아이러니의 미덕은 강요하지 않음입니다. 그 자체의 서정성도 말이죠..!
하나의 이야기는 무의식의 판타지라는 깊은 기저에서 온 것일 때라야만 읽는 사람을 사로잡는 큰 매력을 지닐 수 있다. ... 자신의 진짜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가공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페터 비에리)
#texit #슬림손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