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지점에 근무하면서 큰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개인 고객에게 상환계좌를 잘못 알려주는 바람에 금전적 손해가 발생한 일이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내가 그런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믿지 않는다. 그 고객이 특정 시점(실제로 통화가 있긴 있었다)과 특정인(나다)을 지목하여 하도 우겨대는 바람에 하는 수없이 시인했을 뿐이었다. 여하튼 조용한 개인주의를 지향하던 나는 지점에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고, 가능하다면 내 선에서 해결 방법을 찾고 싶었다. 다행히 그 방법은 아직 내 안에 있었다. 다소 복잡한 설명이지만 계좌를 혼동한 탓에, 그러니까 상환을 하지 않은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고객이 약간의 이문을 벌게 된 일이었다. 나는 바로 전화기를 부여잡고는 낮은 목소리로 힘을 다해 이를 설명했다. 손으로는 그 이문에 연신 동그라미를 갈기며. 그러나 오랜 회유 뒤,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것은 "어어.. 그러니까.. 상환이.. 됐다고..??" 칠순이 넘으신 할아버님의 가늘고 쇤 목소리. 어떤 설명에도 토시 하나 변하지 않던 섬뜩한 외침이었다. 아마도 실수의 당사자로 나를 처음 지목했을 때, 그때가 할아버님이 가장 총명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할아버님의 서툰 고집에 깊은 자괴감에 빠졌고 자백의 시점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할아버님이 문득 "어어.. 그럼 됐지 머.."라고 말해줄 것도 같았다. 꿈에서라도. 그래서였을까. 이후 일주일 동안 나는 회사가 끝나는 대로 할아버님께 매일같이 전화를 드렸다. 그러나 할아버님은 늘 넘어올 듯 넘어오지 않으셨고, 나는 늘 때려치울 듯 때려치우지 않았다. 그때 기억에 남는 것은 통화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부아가 치밀 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나는 전화를 끊고 호흡을 고른 뒤 다른 자아로 가장한 채 재차 전화를 걸었다. "네, 아버님 방금 통화하신 박 대리랑 같이 일하는 이 과장이라고 하는데요. 저에게도 어떤 상황인지 좀 알려주시겠.." 그렇게 일주일 간 모든 자아와 모든 직위를 총동원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할아버님은 기어코 총기를 되찾지 못했고, 남은 것은 전화를 하며 갈겨쓴 동그라미와 분노. 잘못에 대한 뒤늦은 시인과 거만한 동정들이었다. 그나마 사람 좋은 팀장의 위로에 잠시 울컥하기도 했으나, 할아버님과 전화를 하며 얼굴이 시뻘게지는 팀장을 보며 나의 비극이, 나의 협상이 아직 남았음을 직감해야 했다.
내가 이 불편한 서사를 다시 생각한 것은 요즘 우리 집 화장실에서 그와 아주 닮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다른 육아와 달리 양치질은 서하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니까 서하가 입을 양껏 벌리고 적어도 10초 정도는 멈춰 줘야 한다. 물론 그게 4살 아이에게 쉽지 않은 일임을 잘 알기에 우리는 온갖 달콤한 유혹과 서사가 뒤틀린 동화 때로는 날선 협박으로 그 시간을 겨우겨우 때워왔다. 그런데 유독 최근 서하가 양치질을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입을 앙 다문 채 눈을 피하거나 칫솔에 달린 모형만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고 있다. 충치가 많았던 유년에 대한 회한 때문인지 그래도 나는 인내심을 잃지 않고 어떻게든 그 과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해본다. 그런데 그 시간, 어떻게든 서하에게 양치의 절실함을 주입시키려 애쓰는 그 순간, 오래전 전화기를 붙들고 결과적 이문이라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매달렸던 시절이 떠오르는 것이다. 역시 넘어올 듯 넘어오지 않고 나는 때려치울 듯 때려치우지 않는다. "서하야 아빠가 퇴근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충치 벌레가 딱 있는 거야. 어디 가냐고 물어보니까 아니 서하 집이라고.." 벌레의 이웃, 또는 벌레 그 자체, 때로는 치과 괴물이나 서하의 동생이 되어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늘 그 결말만이 궁금한 서하의 동그란 눈동자다. 그리고 실패로 돌아간 협상 뒤에 남은 것은 여전히 분노다. 깊은 자괴감. 유리에게 협상 결렬을 시인하는 일. 거만한 질책이다. 그래서 양치를 잘 하면 큰 소원을 들어준다는 낡은 문법까지 마지막으로 동원해 보지만! 꿈쩍하지 않는 서하의 작은 입이다. 어떠한 회유에도 넘어오지 않는 그 기막힌 절제력. 그 절망적인 상황에 서하가 말하는 것 같았다. "어어.. 그러니까.. 상환이.. 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