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ctrola Coffee Roasters
주문한 카푸치노를 단숨에 마시고 바로 나왔다.
잠깐 산책한다는 마음으로 나왔지만, 밤공기가 너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신나기 시작했다는 사실. 한국에서 안고 온 두려움은 이미 온데간데 사라졌다.
미국에 오기 전부터 가족이나 친구들이 밤에는 절대 돌아다니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무섭거나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홈리스(노숙자) 분들도 별로 없었고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깨끗했다. 후에 알아보니 내가 지낸 동네가 노숙자들이 많이 없고 치안이 좋은 동네였다고 한다.
구글맵을 켜서 저장해놓은 카페 리스트를 빠르게 훑었다. 그중 거리도 만만하고 영업도 늦게까지 하는 두 군데를 정했다.
Victrola Coffee Roasters
Starbucks Reserve Roastery
이 둘은 붙어 있다. 바로 옆집은 아니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10초 안에 뛰어갈 수 있는 거리.
경로를 검색해보고 걸어서 가기로 결정했다. 아직 미국에 도착한 지 몇 시간도 채 안되지만, 평지가 많고 길이 쉬워서 걸어가도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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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멀다"
구글맵에서는 15분 걸린다고 예상 소요시간을 얘기해 주었지만, 실제로 한 25분은 걸린 것 같았다. 사실 긴장을 한 탓에 길을 한번 잘못 들어서 돌아가긴 했다.
먼저 Victrola Coffee Roasters (빅트롤라 커피 로스터스)를 가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단지 이곳 영업시간이 더 짧았기 때문이었다. 매장은 경사진 언덕에 비스듬히 위치해 있었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손님이 많이 없었고, 직원 분도 앉아서 쉬고 계시는 분위기였다. 들어가서 어색하게 인사하고 빠르게 훑어보다가, 그냥 아메리카노 한잔만 따뜻하게 주문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밖이 보이는 자리였는데, 낮에 왔다면 여기 앉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딱 봐도 인기가 좋은 자리 같았다. 밖을 보니 정말 금방 어둠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의 빠른 발걸음과, 거의 문을 닫은 가게들. 생명력이 줄어들고 조용한 거리를 보며 아쉽기보다는 오히려 편안했다. 아무래도 미국에 온 첫날이었고, 많은 외국인들의 시선들과 그들과의 순탄치 못한 대화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니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조용한 밤거리를 바라보는 것도 좋게 느껴졌다.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는데, 정말 놀라웠다. 사실 두 개 이상의 원두를 섞어서 만든 블렌드는 기대를 많이 안 하는 편인데 정말 맛있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단맛이 굉장히 탄탄했고, 산미 또한 단맛과 비등하게 느껴져서 아주 밸런스가 좋게 느껴졌다. 깔끔한 뒷맛은 기본이었고.
조용한 분위기와 맛있는 커피로 기분이 너무 좋아졌다. 이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서 카메라를 꺼내 동영상을 찍었다.
손님도 많이 없어서 매장을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주문을 했던 곳 옆쪽을 보니까 원두 가판대가 있었다. 블렌딩과 싱글 오리진이 있었는데 꽤 다양했다. 원두 정보들을 읽는데, 너무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케냐 원두. 이걸로 먹어볼 수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머릿속에서 바쁘게 번역기를 돌렸다. 완벽하진 않지만 질문을 할 수 있었고, 오늘의 원두가 정해져 있어 내가 원하는 건 맛보기 어렵다는 답을 받았다.
아쉬운 대로 그것도 달라고 하고 결국 두 잔을 먹게 되었다. 무리했다. 제대로 된 식사도 못했는데 의욕만 앞서서 늦은 저녁에 두 잔을 먹어버리니까 속도 조금 안 좋아졌다. 숙소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챙기고 인사를 한 후 바로 나왔는데
"아, 스타벅스!"
스타벅스를 가기로 했었는데, 까먹을 뻔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까 눈에 띄게 큰 매장 하나가 보였다. 고민을 했다. 그냥 숙소로 돌아갈지, 아니면 들릴지.
"들리자.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빅트롤라 커피 로스터스에서 오른쪽 횡당보도 하나만 건너면 바로였다. 보자마자 드는 생각은 엄청 크다 라는 생각. 그리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보였다. 그렇게 안보이던 동양인들과 한국인들도 여기서 처음 봤고.
속으로는 엄청 반가웠지만, 굳이 인사를 하거나 같은 한국인임을 티를 내진 않았다. 그들도 나를 보고 알았겠지만 말이다.
큰 문을 힘겹게 열고 들어가서 매장을 한 바퀴 돌았다. 규모는 엄청 컸지만 사실 커피는 별로 기대가 되지 않았고, 게다가 아까 두 잔을 내리 마셔버리는 바람에 도저히 한잔 더 마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애틀 떠나기 전에 다시 들리겠다는 다짐을 하고 매장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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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렸다. 밥을 조금 사서 먹을까 싶어서 들렸는데, 밥이 터무니없이 비쌌고 동양 식재료가 너무 적었다. 결국 냉동식품 몇 개와 초코칩, 물만 좀 사서 돌아왔고,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으로 느끼했던 속을 조금 달랠 수 있었다.
내일부터가 진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