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기로 하고 무작정 책상에 준비물들을 펼쳤다. 새 4B연필을 연필깎이에 꽂고 힘차게 돌려 뾰족히 깎아 둔 뒤 말랑말랑 미술 지우개와 여러 색들의 색연필을 펼쳐 놓고 의자에 앉았다.
"아- 드디어 그림을 그리는구나. 뭘 그릴까?" 흰건 도화지고 검은건 4B 연필. 머리는 흰 도화지처럼 텅 빈 듯 했다. 내가 뭘 그리려고 했지? 생각해보니 나는 한번도 내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해 본 적이 없었다. "아 이런. 역시 쉽지 않구나." 미술학원에서는 그리고 싶은 참고 자료를 펼쳐 두고 똑같이 묘사하는 일에 집중하는 작업들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 내 생각을 표현 했던 경험이 없었고 진중히 고민해 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내 생각을 이야기 하는 거나 표현하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 친구들을 만나도 대부분 듣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고 토론 수업은 정말 피하고 싶은 수업 중 하나였다. 그런데 막상 그림을 그리려니 그림은 내 이야기를 잘 표현 해야 하는 경험이 필요 했다. 그래서 더 막막했고 왜인지 흰 도화지가 나에겐 학창시절 영어 단어 시험 쪽지 같았고 빈칸을 적지 못해 암울 해 하던 내 시험 쪽지 결과물을 보는 듯 했다. 갑자기 막막히 다가오는 것이었다. 아 역시 어렵구나. 시험지에 답을 내지 못한 내 자신이 자격 미달이 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으므로 우울감에 발을 담그지 않기로 했다.
얼른 휴대폰을 켜고 유튜브에 검색을 했다. 여러 유튜버들이 자신의 경험담을 자세히 이야기 해주었다. 일상의 경험에서 소재를 얻기도 하고 음악 영화 전시회 등 대부분 다양한 경험에서 얻는 소재들로 그림을 그리는 듯 했다. 나도 영화 음악 전시회를 좋아했기에 맨날 가서 보고 듣지만 나는 잘 모르겠던데 하며 영상을 껐다. 역시 재능은 타고 나야 하는걸까? 나는 같은 걸 보아도 소재를 얻지 못하는데 역시 쉬운 일은 없구나 하며 털썩 방바닥에 드러누었다. 살아오며 내 이야기를 이야기 하거나 표현해 본 경험이 별로 없던 나는 내 안의 무언가를 표현해내는 일이 참 아득하고 어렵게 느껴졌었다. 일상 생활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라. 내가 뭘 하고 살며 내가 뭘 생각하며 살았더라. 생각하니 나는 한번도 내 하루를 깊이 생각해본 적도 바라본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단순히 손으로 그려내는 작업보다 그걸 구연 해내기까지의 과정이 참 어렵기도 하고 깊이 보면 철학적이기도 했다. 그 과정이 있기에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일러스트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새삼 작가님들을 더 존경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지하게 그림에 대해 생각하며 산 일이 있던가? 생각해보니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릎쓰고 진학한 디자인학과생 생활 중에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디어를 내어 과제물을 제출 해야 하는 고된 수업들이 많았다. 디자인 과제물 덕에 나는 매주 아이디어를 내야 했다. 내가 가고 싶었던 학과를 선택해서 왔는데 나를 위해서라도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을 조금 덜기 위해서라도 나는 좋은 결과물을 내고 싶었다. 그래서 난 과제를 위한 과제에 의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는데 버스를 타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그 과제에만 몰두 했었다. 각을 잡고 앉아 과제에 대해 고민할때는 생각이 나지 않더니 버스를 타고 가던 길에 답을 찾기도 하고 샤워를 하거나 길을 걷다가도 불현듯 생각은 답을 내어주곤 했다.
마음 한 켠에 질문을 두고 그 시야로 일상을 보내다보니 허무하게도 갑자기 해결되곤 했던 것이다. 그림도 마찬가지 아닐까? 나는 한번도 일러스트레이터의 시야로 살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내가 무심코 지나친 감동적인 영화와 공감 가는 음악 또는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의 기억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그림의 소재가 될 수 있었는데 나는 그냥 지나친 것이다. 유투버 작가님들이 말씀이 옳았다. 역시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내가 함부로 판단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야기를 충분히 받아들이고 소재가 될 만한 주변의 모든 것에 집중하며 떠오르는 것들을 바로바로 메모장에 담아두었다.
일상에서도 그림에 대한 고민의 해답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불현듯 찾아오는 해답 알아 챌 수있도록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 소재들이 쌓여 내 그림이 되었고 그 그림이 내가 되었다. 지금도 역시 소재가 떨어질 때가 많지만 그래도 각 잡고 앉아 머리로만 고민하지 않고 여러 경험을 하여 답을 얻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나를 이야기 하려면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 안에서 물고기를 낚듯이 소재를 얻어 표현하는 것이 표현의 어려움에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이었다. 앞으로 나는 내 안에 많은 것들을 표현 할 것이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지 않더라도 불현듯 떠오르는 그것을 표현하여 그리고자 한다. 내 꿈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