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나의 심경변화

Ep.13

by 니디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죽음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살았다. 왜냐면 울 엄마가 죽고 없어질까 봐. 어렸을 때 나는 꽤 자주 악몽에 시달리고는 했는데, 겨우 겨우 꿈에서 깨 눈을 떠보면 베개가 푹 젖어 있고는 했다. 베개는 축축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흠뻑 젖어 차가워져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매번 눈물이 찰박 거리는 베개 위에 빳빳하게 마른 수건을 덧대어 머리를 뉘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바삭거릴 정도로 완전히 말라있던 수건마저도 다시 눈물에 젖기 일쑤였는데, 그 이유는 꿈속에서 엄마를 잃은 슬픔이 너무나도 커 눈물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죽는 것.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면 꿈이 시작됐다. 그 어둠의 세상에서는 엄마가 없었다. 이쪽 현실에는 내 목숨과도 같은 엄마가 분명히 살아 있는데, 저쪽 현실에서 별안간 갑작스럽게 엄마가 죽어버린 것이었다. 뭐가 진짜고 뭐가 진짜가 아닌지 어린 나이의 나는 단번에 분간해내지 못했다. 지금 까지도 생생히 생각나는 악몽이 있을 정도다. 해서 그렇게 엉엉 여명이 트기도 전에 막 울어 버렸던 거겠지.


엄마는 내가 당신의 삶의 이유라 자주 말해주곤 했다. 해서 나 또한 자연스럽게 엄마가 나의 삶의 이유가 되었다. 엄마가 회사에 나가고 집에 혼자 있을 때면 가끔 나는 식은땀이 흐르고 끙끙댈 정도의 고통이 찾아오곤 했다. 하지만 나는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속상해하니까. 꼬맹이었던 나이었을 때부터 나는 엄마가 나 때문에 미간을 찌푸리는 일은 정말로 싫었다.


우리 엄마 내가 행복하게 해 줘야지.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최고야. 우리 엄마 내가 제일 사랑해.


그래서 나는 '죽음'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두려웠다. 죽음은 곧 엄마의 부재니까. 세상 사람 다 죽어도 엄마는 영원불멸, 내 곁에서 언제나 이렇듯 큰 품으로 나를 감싸주었음 했다. 당신은 지금껏 사는 게 너무 힘들고 팍팍하고 이런 일, 저런 일 너무도 많이 겪어 가끔 쉬고 싶다고 했었다. '쉼'이라는 가면을 쓴 '죽음'은 항상 엄마 옆구리에 찰싹 붙어있었다. 나는 모르지 않았다.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왜냐면 어린 내가 보기에도 울 엄마 너무 힘들어 보였으니까. 나를 향해 웃던 엄마, 아마 나를 향한 미소를 제외하고 그 이외의 모든 엄마의 미소는 당신의 가면 중 하나였다. 물론 나를 향한 것에서도 억지는 있었을 수 있었겠지. 그런 현실 속에서 얼굴에 웃음을 띄운다는 것 자체가 현실성이 없었으니까. 로맹 가리는 그의 책 '가면의 생'에서 말했다. 가면을 안 쓴 삶이 어디 있겠느냐고. 확신하건대 가면 뒤에 엄마의 진짜 얼굴은 퉁퉁 부은 두 눈과 먹먹한 코 그리고 축축한 두 뺨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새벽, 몰래 잠에서 깨 거실로 나온 나는 식탁 의자에 홀로 앉아 가면 속 진짜 얼굴을 하고 울던 엄마를 봤다. 나는 다시 몰래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사실 오줌이 마려웠지만 참았다. 왠지 엄마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어린 딸에게 보여주기 싫었을 것 같았기 때문에 모른 척했다. 그날 난 어김없이 엄마가 없어지는 꿈을 꾸웠고, 이 날 꾼 꿈은 지금도 생생하게 내 눈앞에 아른거린다. 캄캄한 동굴, 그리고 없어진 엄마.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고 엄마가 죽는 꿈은 더 이상 꾸지 않게 됐다. 여전히 엄마가 하루아침에 없어진다는,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는 현실은 너무나도 두렵고 막연하고 부정하고 싶은 종류의 것이었지만 어찌 됐건 꿈은 꾸지 않았다. 울 엄마의 언젠가 그날을 생각하면.. 마음이 진짜로 너무 아프지만 구태여 생각하지 않기로, 저 뒤로 젖혀두기로 마음을 먹었고 지금껏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다가 요즘에는 이 막연한 죽음이 나에게 조금은 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언젠가 남편이랑 나란히 앉아서 인도네시아 문화가 묘사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자연, 음식, 생활, 교육 등등 다양한 주제가 순서 없이 스크린을 통해 보이고 있었는데, 그중에 종교에 대한 주제가 나올 때였다. 주민들은 매일 아침 탁발하는 승려에게 봉양을 하며 무릎 꿇고 기도를 했다. 그들에게 물었다. "무엇에 대해 기도를 하시나요?"


눈이 아주 예쁜 어머니는 가족 모두가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기도를 드린다고 했고, 세월의 주름이 얼굴에 깊이 파인 할머니는 손자 녀석의 앞날이 창창할 수 있도록 기도를 드린다 했다. 그리고 젊은 남자는 올해 농사가 수확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기도를 드린다 했고, 어린 남자아이는 부모님이 아프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역시 사람 사는 풍경은 같구나 생각하던 중 초록빛 비단옷을 입은 아주머니의 한마디가 내 뇌리에 박혔다. "저는 다음 생에 환생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었어요. 만약 제가 환생을 한다면 그것은 이생에서 죄를 많이 지어 벌을 받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매일 아침 기도를 하고 좋은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답니다."


정말 이생에서의 삶이 전생에서의 과오 때문에 펼쳐진 것일까? 정말로 저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삶에 대한 태도 자체가 다를 것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매일을 회개하며 겸손한 태도로 하루를 살아가겠구나. 자신들을 이 세상에 보낸 이의 의도를 생각하며 순간을 살겠구나. 탈무드의 그 말처럼. 그것은 도무지 억지스러울 수가 없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겠구나.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생각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졌던 그 순간, 죽음에 대한 내 생각도 그 방향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삶과 죽음 그 이원적인 분리적 개념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평화를 선사하는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그 아주머니. 분명 다큐멘터리는 이로운 것이 많다.


옆에 앉아 가만히 아주머니의 말을 귀 기울이던 남편은 말했다. "아마, 저분의 삶이 팍팍한가 봐. 그래서 다음 생을 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닐까"


남편의 말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삶의 여유 등의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어쨌든 현실은 절대 천국이 될 수 없어. 돈이 많든 적든 행복하든 안 하든."




솔직히 말하면, 요즘 정말 감정이 힘들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때 살짝 죽으면 어떨까, 정말 평온이 찾아 울까 생각했다. 마지막 숨이 후하고 불어지면, 그 후는? 나는 여전히 생각을 할까 아님 생각 또한 마지막 숨과 함께 깔끔히 멈춰질까. 고통이 있을까 아님 없을까.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공상이 별안간 떠오른 것을 보면 내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어른이 된 건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 그전에 난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하는, 역시 사는 게 힘든 것인가 왜 이렇게 투정을 부리고 있는 건가 하는 자기 연민에 빠지고 만다. 죽음은 정말로 무전여행을 하듯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있는 세상인 걸까. 결코 그쪽 세계에는 눈물도, 슬픔도 없는 곳인 걸까.


전원 버튼을 켜고 끄듯 내가 원하는 만큼만 잠깐 죽어있다가 다시 살아나 생을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본다.